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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웰다잉 시대와 죽음의 자기 결정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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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1월25일 16시51분
  • 최종수정 2019년01월25일 17시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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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웰다잉,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 존재의 모든 가능성이 끝나는 가장 극단적인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 죽음을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하루하루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다. 따라서 죽음과의 관계를 인지하고 향유하는 존재만이 가능성을 지닐 수 있다. 죽음은 인간이 지닌 가능성의 한계이자 원천인 셈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존재의 한 방식 혹은 삶의 한 방식이다.

 

죽음에 관한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곳에서 살며 잘 ‘살아보려는’ 웰빙(Well-being) 시대에서, 나의 선택 혹은 신념에 따라 잘 ‘죽어보려는’ 웰다잉(Well-dying)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다. 고령화 시대의 도래로 삶을 마무리하는 단계가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고독사 증가, 인구대비 높은 자살률과 같은 사회적 지표들 또한 ‘죽음의 질’에 대한 논의와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웰다잉, 즉 잘 죽는다는 것은 좋은 죽음을 준비하는 태도를 뜻한다. ‘좋은’이라는 관형어와 ‘죽음’이라는 명사의 조합에서 오는 어감이 참 미묘하다. 웰다잉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금기시하거나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오히려 그것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려 한다. 웰다잉을 준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보거나, 임종체험을 해보는 것, 생전 장례식을 열거나 젊은 시절에 미리 영정사진을 찍는 것과 같은 경험적 차원의 웰다잉 준비가 성행하고 있다. 웰다잉은 인간 삶의 물질적 측면, 대인 관계적 측면, 심리·정서적 측면과 맞닿아있다. 그중에서도 죽음은 인간이 맞이하는 가장 큰 신체적 변화라는 점에서, 웰다잉은 개인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 및 질병 치료를 둘러싼 이슈와 밀접하게 얽혀있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와 조력자살 


삶과 죽음은 1인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삶은 개인의 무수한 선택으로 점철되어있다. 따라서 죽음까지도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 맡겨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안락사, 존엄사, 조력자살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다. 2017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50대 남성 암 환자가 연명치료를 중단한 존엄사 사례가 등장했다. 소위 웰다잉법이라 불리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의 개정으로 올해 4월부터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조건이 꽤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안락사, 존엄사, 조력자살은 엄밀하게는 그 의미가 모두 다르다.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생명을 ‘타인이’(의료진이), ‘적극적인 행위’(약물의 주입)를 통해 끊음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되도록 하는 경우를 뜻한다. 존엄사는 소극적 안락사라고 할 수 있는데, 무의미한 생명연장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력자살은 안락사나 존엄사에서 더 나아간 개념이다. 조력자살은 의료진으로부터 약물을 처방받은 개인이 스스로 그것을 복용하여 생명을 끊는 행위를 뜻한다.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스위스이다. 스위스는 최초로 조력자살을 허용한 국가이며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외국인에게도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국가다. ‘존엄한 삶과 죽음을 위해’를 모토로 내세우는 ‘디그니타스’라는 조력자살협회에 가입하기 위해 매년 200명 이상의 외국인이 스위스로 향한다. 디그니타스에 가입한 사람 중 8%만이 스위스인이며 그 외의 신청자는 모두 외국인이다. 한국인 신청자는 2012년 이래 총 18명이었는데, 이는 아시아 국적 외국인 중 가장 높은 수치다. 디그니타스의 조력자살은 매우 엄격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1) 의식 있는 불치병 환자일 것. 2) 유서를 직접 작성할 것. 3) 조력자살 날짜를 직접 선택할 것. 4) 조력 자살 약을 스스로 먹으며 이에 대한 영상을 남기는 것에 동의할 것. 디그니타스는 위의 조건들을 충족한 사람들에 한해 매우 제한적으로 조력자살을 진행한다. 우리나라의 실정법에 따르면 조력자살은 불법이기 때문에 디그니타스를 통한 조력자살 신청자는 처벌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기본권적 권리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조력자살 합법화에 대한 요구가 전 세계적으로 커지고 있다. 불치병 환자가 아닌 경우에도 엄격한 조건과 승인과정을 거쳐 조력자살을 허용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시각도 있다. 

 

불치병 환자들은 삶을 지속하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신체적, 재정적, 심리적으로 큰 부담과 고통을 겪으며, 병세가 악화될수록 자신의 의지에 따라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은 작아진다. 안락사는 사실상 본인 의지를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서 주변인의 동의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반면에 조력자살은 본인의 적극적 의지로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타인의 조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일단 살아있으라’의 기만성 


한국에서 안락사, 존엄사, 조력자살에 대한 국가적·사회적 차원의 논의나 법제 정비는 매우 미흡한 편이다. 죽음 관련 논의에 대한 공론화도 부족하다.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과정에서 환자와 가족, 주변인의 의사를 어떠한 방식으로 반영하고 어떠한 정도로 제한할지에 대한 정책적 고민도 필요하다. 평균 수명 연장과 고령화가 도래한 지금, 죽어가는 것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소극적으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속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고생스럽게 살더라도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인식이 담긴 말이다. 과연 정말 그러한가? 우리는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의지박약으로 치부하거나 생명을 경시한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힘들어도 ‘일단 살아있으면’ 상황이 개선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지 못해 오는 고통을 오롯이 떠안는 개인은 그 고통을 지지 않기로 선택할 수도 있어야 한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결정은 인간이 살면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의지를 발휘한 결과일 수 있다. 그러한 의지는 적절한 방식으로 보호받아야 하며, 죽음을 선택할 권리 역시 보장되어야 한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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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9년01월25일 17시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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