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해칠 권리를 막는 규제공화국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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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8월31일 16시56분
  • 최종수정 2018년08월31일 16시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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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의 칼끝은 누구의 목을 치나

 

 규제는 자유를 억제한다. 규제는 간섭과 통제다. 규제는 정부가 휘두를 수 있는 가장 소극적이면서 동시에 적극적인 장치다. 올바른 규제가 방종적인 자유를 침해하여 통제하는 것은 옳다. 개인이나 기업이 지나친 사행성과 비윤리적 운용으로 경쟁사들의 손익에 큰 영향을 주거나 사회 분위기를 저해하는 경우가 그렇다. 위와 같은 경우 정부는 마땅히 손을 내밀어 시장의 교통정리를 도맡아 원활한 흐름을 유도할 권리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규제가 정당하지 않은 경우, 가령 그것이 소수자가 아닌 기득권을 위한 규제이거나, 권력의 재확인을 위하여 시행하는 규제를 위한 규제이거나, 사적 자치를 지나치게 침해하는 것일 경우 정부의 목소리는 의심받게 된다.

 

 규제개혁을 통한 규제완화가 점차 윤곽을 드러내며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의 규제가 완화되는 반면 다른 한편의 규제는 오히려 강화되고, 그 공권력에 불만을 제기하는 목소리 또한 함께 증가하고 있다. 가령 정부는 은산분리 규제 완화를 시사한 반면에 먹방을 비롯한 요식업 관련 프로그램에 대한 규제 강화를 공고히 할 것임을 공표했다. 사실 규제라 함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임금 인상과 자영업 확장에 대한 규제, 낙태법과 신체의 자유를 향한 규제, 부동산 규제와 포르노 규제 등 정부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규제의 칼끝은 누구의 목을 향하는가. 혹 민생을 위한 규제가 민생의 목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다시금 재고가 필요하다.

 

내 몸을 해칠 권리

 

 먹방을 규제하겠다는 정부가 그 이유로 내세운 것은 그것이 폭식을 조장하여 사회 분위기를 흐린다는 것이다. 규제의 명분이 설득력을 갖추지 못해 대중의 공분을 사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먹방이라는 콘텐츠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비지니스라면 응당 규제는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보건복지부는 혹 거대자본의 큰 축을 차지하게 된 먹방 콘텐츠의 지나친 비대화를 경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로인한 폐쇄적 시장 형성을 규제하여 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필드를 형성하기 위한 규제라면, 규제의 정당성은 합리적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는 폭식을 조장한다는 어설픈 근거가 아니라, 거대 스폰서를 비롯한 암암리 이뤄지는 탈세와 허위광고로 인한 부당수익, 그리고 이로부터 선의의 피해자를 보호하여 시장의 진입장벽을 낮춘다는 식의 근거를 들었어야 옳다. 절차상의 오류를 최소화하고 투명성을 보장하여 시장의 긍정적인 로드맵을 제시했다면 규제는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 폭식을 조장한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것은 국민의 기본적 권리, 능력, 자유를 무시한 처사다. 설령 먹방과 폭식의 상관관계가 사실이고 폭식을 조장한다고 할지라도 폭식에는 어떠한 불법적 소지가 없을뿐더러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위 사항은 국가의 강제가 아닌 자유로운 자기 결정 아래 놓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먹방 규제의 근거는 포르노 규제와 그 꼴이 닮아있다. 음란물을 규제함으로서 성범죄를 줄이겠다는 연관성 부족한 탁상공론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포르노가 성폭행을 유도한다는 유비추론과 마찬가지로 먹방이 폭식을 유도한다는 논리다. 둘 사이는 오감의 대리만족성이라는 특성을 공유한다. 자극적인 클로즈업과 강박적인 리액션 요구가 제공하는 모종의 적나라함 또한 둘 모두에서 함께 나타나는 특징이다. 먹방을 두고 종종 포르노적이라는 수사가 뒤따르는 경우는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포르노가 성범죄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는가, 그리고 먹방과 폭식의 상관도 그러한가. 둘의 상관관계가 논리적으로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포르노-먹방 규제는 쾌락에 대한 국가의 통제이다.

 

 「슬픔이여, 안녕」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저술한 프랑스 여류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극에 달한 사치와 낭비, 두 번의 이혼, 수면제 과복용에 마약과 도박 중독, 경제적 파산을 겪은 불행의 산증인이다. 마약 복용 혐의로 재판정에 선 그녀는 오늘날까지 기록되고 있는 한 주장을 펼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타인은 나를 동정하고 경멸할 권리는 있으나 삶의 방식을 결정하고 옥죌 자격은 없다. 폭식이든 단식이든, 내 몸을 지지고 볶는 일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결정하는 신체의 자유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를 파괴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낙태(이하 임신중절)죄는 더 큰 범위의 자유를 규제한다. 여성의 재생산권과 자기결정권, 건강권은 오로지 스스로의 몫이다. 그러나 명백히 우선시되어야 할 권리가 범죄로써 다스려지고 통제를 받는 것은 위헌의 소지가 다분하다. 생명경시 풍조가 싹틀 수 있다는 근거로 임신중절을 반대하며 윤리적 근거를 제시한다면 한편으론 건강한 쟁점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이의제기가 아닌 산모의 건강과 안녕을 위하여 임신중절을 금지하여야 한다는 것은 탁상공론이며 심지어 가식적이어서 공분을 산다. 산모의 건강과 안녕은 오롯이 산모의 몫이다. 비출산을 선택함으로서 겪게 될 육체적, 심리적 부담은 부부가 감당해 나가야할 뿐이다. 그러나 정부는 결정권을 빼앗아 안 하는 일을 못하는 것으로 전락시키고 산모와 태아의 건강을 위한 윤리적으로 바른 결정이라는 대답만 되풀이한다. 임신중절을 법으로 금지하고 경제적, 심리적 고민을 혼자 떠안게 된 산모가 자신의 건강과 안녕을 고민해주는 정부에게 어떠한 근거로 고마워해야할까?

 

불행한 규제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한병철 作 「피로사회」 p.43]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를 표방한다. 자유와 권리의 범위를 확대하고 이는 개방성과 창의성을 요구하는 4차 산업 혁명의 슬로건과 이념적으로 부합한다. 그러나 자유는 방종을 낳고 방종은 무질서를, 무질서는 규제를 낳는다. 자유와 규제는 비례한다. 보이지 않는 손의 시대의 손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자유의 범위가 넓지 않아 통제를 가할 일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종류의 자유가 무수히 탄생하는 오늘 날엔 그에 상응하는 손도 무수히 탄생한다. 자유로운 21세기를 살아가며 야경국가를 꿈꾸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규제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과잉규제를 완화하여 국민의 행복추구를 최대치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방향으로의 이행이어야 할 것이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효과적이다. ‘~할 수 없다’라는 조동사가 지배하는 사회보다 ‘~할 수 있다’의 긍정성은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창의력과 가능성을 제공한다. 자유와 결정권을 부당히 잡아끄는 ‘너무 많은 손’은 성장을 해친다. 간섭과 통제이며 동시에 권력인 과잉규제는 결국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따름이다.<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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