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손에 든 그 카메라를 내려놓아 주세요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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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화의 오류, 폭력을 ‘담다’-
유명한 관광지를 가보자. 당신은 지나가는 10명의 사람들 중 반은 사진기를 가지고 있거나 사진을 찍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일상생활에서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인증’이 생활화 된 오늘 사람들은 모두 사진작가다.
‘보다’라는 서술어는 흔히 눈으로 대상의 존재나 형태적 특징을 알고 인지하는 의미를 내포한다. 대상을 즐기거나 감상하는 것과도 같다. 대상의 감상은 후에 그것을 간직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자아낸다. 여기에 영원성을 불어 넣는 작업이 사진이다.
사진은 그림보다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형태의 보존 방법으로 여겨진다. 사진을 찍기에 앞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대게 경험에 근거한, 가장 실증적이고도 정확한 방식이라고 여겨지는 ‘눈으로 보는 행위’는 대단히 큰 오류를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바로 봄으로써 발생하는 대상화의 문제다. 사진은 대상화를 강화하고 고착시킨다. 대상화는 두 가지의 측면에서 위험하다.
첫째, 사물을 인식의 대상이 되게 함으로써 나와는 별개의 것이라는 거리를 둔다. 우리가 연극을 보고 박수를 치는 행위는 그 연극과 나 자신을 분리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극에서 나타나는 불행, 비극, 시련 등에 공감을 하며 보지만 연극이 끝난 뒤 박수를 침으로써 그것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사진도 같은 맥락이다. 카메라가 즉 박수이고 무대이다. 카메라는 대상과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일정한 거리감을 제공한다. 현실에 있는 ‘나’는 ‘너’를 사진에 담음으로써 나의 세계로 끌어들이지만 그것을 나의 세계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프레임 안의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대상화시킴으로써 오직 프레임 속에서만 존재하도록 한다. 이는 현실의 모습을 반영한다는 예술이 그 대상을 현실의 범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모순을 야기한다.
둘째, 대상화는 곧 상품화로 이어진다. 대상화한 대상에 ‘가치’를 매김으로써 상품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성을 의도한 사진이든 고발을 목적으로 한 사진이든 ‘찰칵’ 소리와 함께 프레임에 갇힌 대상은 상품화의 시장에 노출된다. 어쩌면 자본주의 체계에서 시장에 의해 매겨지는 가격으로 확인을 받고 평가되는 과정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상품화의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논하지 않는다면 이는 생명의 존엄성을 위협할 수 있다.
사진을 찍는 의도에는 ‘해석’이 전제된다. 그대로 본연의 모습을 뽐내는 무언가에 ‘나의 의도’를 집어넣어 재생산 하는 것이다. 사진이 다른 예술품과 달리 ‘푼크툼’을 더욱 활발히 자아내는 이유이다. ‘푼크툼(punctum)’은 텍스트에 담긴 작가의 의도로, 독자를 찌르고 관통한다. 가령, 내가 찍은 광장시장의 구두닦이 할아버지는 나에 의해 자신의 본질과 의도가 훼손되었다고 할 수 있다. 누르스름한 필터 뒤로 묵묵히 그리고 조용하게 움츠린 어깨로 구두를 닦는 할아버지를 찍은 사진은 그의 자연적인 존재를 훼손시킨 것과 다름없다.
오늘날 대상화를 하는 과정이 더욱 문제시 되는 것은 비단 본질을 헤치는 것뿐만이 아니다. 거리낄 것 없는 공격성과 노골적인 경멸에 의해 사진이 소비 될 수 있다.
따라서 대상화는 그 본질을 파악하기 이전에 본질을 흐린다는 오류를 범한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그 대상을 담고 영원성을 불어 넣으려는 의도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 역시, 누군가에게 가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대상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해석’하는 것은 그 대상을 본인의 범위 내에 구속시켜 버리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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