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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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은 짬뽕!
아침에 사발통문이 돌았다.
하교 뒤 하숙집 들리지 말고 바로 길 건너 북경각으로 집합하라는 내용이었다. 하숙생 단합대회인 줄 알았다. 그 집으로 하숙을 온 지 두 달이 갓 지났을 때였다. 내가 올 때 환영회 겸 단합대회를 했으니 그 집의 하숙생 전통은 좀 ‘별나다’는 생각을 했다. 하숙생 구성원들도 내가 다니는 학교보다 이웃 K고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Y는 매사가 분명했고, 행동이나 선택에서 주저함이 없었다. 그 집에 하숙생들은 모두 여섯이었는데 나를 뺀 나머지는 모두 Y네 학교 후배들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그들에게 하늘 같은 선배 대접을 받고 있었다.
나는 학교를 파하고 조금 늦게 그곳으로 갔다. 하숙생들은 모두 모여 있었고 벌써 짬뽕 한 그릇과 빼갈 잔들이 돌려져 있었다. 하숙비가 너무 올라서 스트라이크를 한다는 것이었다. Y와 나를 뺀 나머지는 대개 지방의 유복한 가정의 자제들이어서 하숙비가 오르건 말건 그렇게 걱정할 처지가 아니고 보면 Y가 주도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 같은 선배의 뜻이고, 또한 그 주장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스트라이크에 대한 호기심으로 꽤 진지해 있었다.
자, 우리의 승리를 위해 건배!
짬뽕을 한 그릇씩 말아 올린 우리는 빼갈 잔을 들었다.
가자, 나를 따르라!
곧이어 Y가 오른쪽 주먹을 높이 들었다.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중국집을 나와 곧장 큰길 건너에 있는 하숙집까지 일렬종대로 행진했다.
-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일도 많지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골목으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빼갈 한 잔의 술기로 군가까지 목청껏 뽑았다. 앞장선 Y가 노래 마디 사이사이에 구령까지 넣었다. 우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엇인가 한다는 마음으로 신이 나 있었다. 드디어 집 앞에 다다르자 Y는 대문을 발길로 걷어차며 들어갔다. 노래는 집 마당에 이르러서 더욱 우렁찼다. 밥 때가 되었는데도 하숙생들이 아무도 없자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하숙집 아주머니와 우리 또래의 그 집 딸은 기가 막힌 듯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우리는 안면몰수하고 방으로 곧장 들어가 결의에 찬 자세로 앉았고, Y가 아주머니를 호출했다.
이게 무신 일이고?
아주머니는 여전히 어이없어했다.
하숙비가 갑자기 이렇게 오를 수가 있습니까?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아나?
그래도 절반씩이나 오른 건 너무 심합니다.
Y가 나름대로 조리 있게 설명한다고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탁탁 쳤다.
어디 이런 경우가 있노! 어른 앞에 버릇이 이게 뭐꼬?
아, 예. 방바닥 친 것은 잘못 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은 뭐시 하지만이야….
거기서 Y는 아니 우리는 역습을 당하고 말았다. 동방예의지국과 인정주의가 뿌리 깊은 우리 사회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하숙비가 비싸다면 다른 집으로 하숙을 옮기면 될 일이고, 그렇게 오른 것이 그 집만의 예외가 아니었고 남편 없이 남 집 빌러 하숙이나 쳐먹고 산다고 너거들한테까지 없신여김을 당한다며 오히려 아주머니가 방바닥을 치며 신세타령을 하는 데야 전세는 완전히 뒤바뀌어버렸다.
우리는 그때까지도 묵묵히 뒷자리에 앉아서 지켜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상황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실 당시 석유파동으로 물가가 크게 올라 하숙비인들 온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Y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주머니에게 무례한 행동을 거듭 사과하고 아주머니를 위로한 다음 분위기가 많이 수그러들자 차근차근 자기의 주장을 다시 폈다.
아무리 아주머니 말씀이 일리가 있다 해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올랐으므로 단계적으로 인상할 수도 있지 않느냐 해서 결국 그 달만 만 사천 원으로 천 원 깎는 데 합의했다. 또한 아침 반찬에 달걀후라이가 추가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날 무언가 해냈다는 뿌듯함을 가질 수 있었고 Y는 선배의 건전함을 보여줬다 할 수 있었다.
오른 하숙비에 걱정만 하는 나에 비하면 그는 가난해도 기가 팔팔 살아 있었다. 현실 문제에 피하려는 나에 비해 그는 항상 직구를 날렸다. 그날의 직구는 한가운데 꽉 찬 스트라이크였다.
<ifsPOST>
- 기사입력 2025년02월22일 17시01분
- 최종수정 2025년02월21일 12시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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