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록펠러 <2> 진보성향의 공화당 출신 뉴욕 주지사, 그리고 이혼과 결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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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록펠러는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매리 클라크와 결혼하고 록펠러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체이스 맨해튼 은행에서 일했고, 록펠러 센터에서 이사와 대표를 지냈다. 이처럼 그는 록펠러 가족이 운영하는 조직에 본거지를 두고 지냈으나, 도중에 정부 공직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40년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중남미 정책 조정관으로 임명됐고, 1944년에는 중남미 담당 국무부차관보로 임명되어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했다. 제2차 대전 때 참전할 나이임에도 이처럼 공직에서 일한 덕분에 1964년 대선을 앞두고 2차 대전 중 해군 경비정 정장으로 참전했던 존 F. 케네디, 그리고 항공장교로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던 배리 골드워터 측에 의해서 비난을 받았다.
넬슨 록펠러는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인 1953~54년 동안 보건교육후생부 차관을 지냈다. 루스벨트의 민주당 행정부와 아이젠하워의 공화당 행정부가 넬슨 록펠러를 기용한 데는 록펠러 가문이 갖고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여하튼 주로 복지 후생 분야에서 정부 일을 경험한 넬슨 록펠러는 보건과 복지, 그리고 개도국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다른 재벌가 후손과는 달리 록폘러는 스스로 서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부가 돌보아야 하며 개도국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이런 이유로 그는 ‘진보적(liberal)’이라고 불리게 됐다.
넬슨 록펠러는 1958년에 뉴욕 주지사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나가서 현직 지사인 민주당의 거물 애버럴 해리먼(W. Averell Harriman 1891~1986)을 압도적 표 차이로 누르고 승리해서 전국적 주목을 샀다.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선 출마를 저울질 해보기도 했으나 자신에 붙여진 ‘진보’라는 명칭이 뉴욕 외에서는 인기가 없음을 깨닫고 곧 포기했다. 그 후 록펠러는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면서 ‘진보’ 이미지를 벗어나려고 했다.
주지사로서 록펠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서 첫 임기 동안 주 예산은 16억 달러에서 29억 달러로 대폭 증가했다. 주지사로서 록펠러는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소외 지역에 문화시설을 설치하고 공공임대 아파트 임대료에 대한 보조를 늘렸으며, 주 정부 차원의 최저임금법을 최초로 시행했다. 록펠러는 주거지역에서의 차별을 없애기 위한 입법도 추진했으나 주 의회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뉴욕 주 수도 올바니의 슬럼을 철거하고 장대한 주 정부 청사를 건립했고, 주립대학을 확충해서 보다 많은 뉴욕 주 학생들이 주립대학에서 학비 부담이 없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괄목할 만한 성과는 다른 주와 연방정부에 모범이 됐다. 이렇게 해서 록펠러는 “공화당의 머리와 민주당의 마음”("Democrat heart with a Republican head')를 가진 정치인이란 말을 듣게 됐다.
넬슨 록펠러는 부인 매리 여사와의 사이에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다. 막내아들 마이클 록펠러는 하버드를 나왔는데 1961년 11월 원시 부족 탐험 중 뉴기니(오늘날 파푸아 뉴기니)에서 실종됐다. 이 사건은 넬슨 록펠러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마이클 록펠러는 식인 부족에게 잡아 먹혔을 것으로 추정됐다.
록펠러는 젊은 시절부터 여자관계가 많았고, 부인과는 사실상 별거 상태로 지내면서 각자 생활을 했다. 부부 관계가 사실상 무너진 상황에서 록펠러의 마음을 파고 든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여비서였다.
1926년에 태어난 마그리타 필터는 미모인데다가 명랑한 성격이어서 ‘해피’라고 불렸다. 그녀는 22살 때 프린스턴 의대를 나온 로빈 머피와 결혼했다. 로빈 머피는 넬슨 록펠러의 동생 데이비드 록펠러와 어린 시절 친구였다. 록펠러 가족은 그들의 저택에 붙어 있는 땅을 머피 가족에 팔았고, 머피 가족은 그 땅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 무렵 부인이 죽은 후 혼자 살던 나이 든 록펠러 2세는 해피를 마치 자기 딸처럼 예뻐했고 노년의 록펠러 2세가 산책을 나갈 때면 해피가 말동무로 동행하곤 했다. 1958년 들어서 넬슨 록펠러가 뉴욕 주지사 선거에 뛰어 들자 해피는 선거 운동을 도왔고, 주지사로 취임한 록펠러는 해피를 자신의 비서로 기용했다.
1961년부터 넬슨 록펠러는 부인 매리 여사와 공식적인 별거에 들어갔다. 록펠러 지사와 여비서 해피와의 관계는 소문이 파다했고, 결국 해피는 남편에게 네 아이의 양육권을 양보하고 이혼을 했다. (해피가 전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막내아들은 넬슨 록펠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1963년 5월 4일, 두 사람은 뉴욕 외곽에 있는 록펠러의 대저택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대통령 출마가 예상되는 현직 뉴욕 주지사의 이혼과 결혼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만해도 정치인이 이혼과 재혼을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이었는데, 해피는 록펠러보다 20년이나 젊은 여비서이자 아이가 넷이나 있는 유부녀였다. 언론은 이 재혼이 두 가정을 파괴했다고 대서특필했다.
1964년 대선에서 록펠러와 대결할 것으로 생각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록펠러의 이혼과 재혼 소식을 듣고 “록펠러가 대선에 나올 생각이 있는가”하고 의아해 했다. 록펠러와 해피는 1964년 공화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은 록펠러의 여성 편력과 이혼 재혼 문제를 다시 상기시켜서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배리 골드워터에게 패배하는데 기여했다. (계속)
- 사진은 넬슨 록펠러와 두 번째 부인 해피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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