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파월(Colin Powell 1937~2021.)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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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타계한 콜린 파월(Colin Powell 1937~2021. 10. 18)은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합참의장을 지내면서 걸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아들 부시 행정부에선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국무장관을 물러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대대장을 주한 미군에서 지내서 우리와도 인연이 있다. 자마이카 이민자의 아들로 할렘에서 태어난 파월은 뉴욕 시립대를 평균 C학점으로 졸업하고 ROTC로 임관한 후 베트남에서 월남군 자문장교와 사단 참모로 두 차례 근무했다. 웨스트포인트 출신도 아니고 베트남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우지도 못한 파월이 나중에 합참의장과 국무장관을 지내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 그것은 파월이 소령 시절에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MBA를 하고 백악관 펠로우로 백악관 예산실에서 일했던 ‘행운’ 덕분이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파월 소령은 대학원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됐는데, 당시 그런 기회를 갖게 되는 장교들은 주로 국제관계를 공부했다. 하지만 파월은 경영학석사(MBA)를 하고자 했다. 육군의 교육 담당자는 파월에게 MBA는 수학도 해야 한다면서 그의 대학 시절 성적이 좋지 않음을 들어가면서 남들처럼 국제관계학을 하라고 권했지만 파월은 MBA를 고집했다. 이렇게 해서 파월은 1969년 8월부터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워싱턴 경영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게 됐다.
1968~71년은 미국 내 베트남 전쟁 반대 기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다. 대학에선 ROTC 지망자가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군복을 입은 장교가 거리에서 욕지거리를 들었다. 파월은 부유하고 배경이 있는 집안의 자식들이 주 방위군 근무 등으로 베트남을 회피하는 세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존슨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은 주 방위군을 현역으로 소집하지 않아서 주 방위군은 베트남 회피 목적으로 이용됐다.) 1970년 5월, 오하이오 주 켄트 스테이트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난 반전(反戰) 시위를 오하이오 주 방위군이 진압하던 중 발포해서 학생 4명이 죽고 9명이 부상당한 일이 발생했다. 파월은 파트타임 군인인 주 방위군이 월맹군과 싸우지 않고 미국 학생들을 살상했다고 생각했다.
워싱턴 DC 시내에 위치한 조지워싱턴 대학은 담벼락에 베트남 전쟁 반대 슬로건이 스프레이로 여기저기 그려져 있었다. 파월은 워싱턴 DC에서 벌어지는 반전 시위를 직접 보았다. 1971년 4월, 베트남 전쟁에 해군장교로 참전해서 무공훈장을 탄 존 케리(John Kerry 1943~ )가 상원 청문회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진술을 하고, 다른 무공훈장 수여자들과 함께 훈장을 던져 버려서 언론에 크게 보도 되는 등 심각한 상황을 파월은 착잡하게 지켜보았다. (존 케리는 나중에 상원의원을 지냈고 2004년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파월은 미군 지휘부가 폐쇄된 조직 문화를 갖고 있어서 전쟁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파월은 열심히 공부해서 디지털 컴퓨팅 과목에서 B 학점을 받은 외에는 전부 A 학점을 받고 데이터 프로세싱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MBA 과정에서 컴퓨팅과 조직관리를 공부한 것이 자신의 일생을 좌우할 줄은 파월은 몰랐을 것이다. 파월은 그 때 버지니아 근교 중산층 지역에 집을 사서 정착했다.
중령으로 진급한 파월은 졸업 후 합동참모본부에 근무하게 됐다. 그러던 중 파월은 ‘백악관 펠로우’(White House Fellowship)에 지망해 보라는 권고를 받게 된다. 1964년에 시작된 백악관 펠로우십은 매년 23세~35세 사이의 10여명을 선발해서 워싱턴 정부 부처에서 근무해서 경험을 쌓도록 하는 프로그램인데, 공무원은 지망할 수 없었지만 군인은 지원할 수 있었다. 합참에서 일하던 콜린 파월의 상사는 파월이 베트남에 다녀왔고 MBA 학위를 하고 특히 흑인이기 때문에 선출될 확률이 크다고 보고 지망하도록 권했고, 파월은 펠로우로 선발됐다. MBA 학위 덕분에 파월은 백악관 예산실(OMB)로 배정이 되어 1973년 2월부터 근무하게 됐다. 그 때 닉슨의 정치 참모이던 프레드 맬릭(Fred Malek 1936~2019)이 예산실 부실장으로 부임해서 파월은 맬릭의 보좌관으로 일하게 됐다. 맬릭은 닉슨과 가까워서 파월은 닉슨 대통령과 만날 기회도 가졌고, 많은 정계 인사를 만났다. 파월은 펠로우 해외 시찰 프로그램으로 모스코바와 베이징을 방문하는 드문 기회도 가졌다.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를 보았고, 워싱턴 중앙 정치를 경험한 파월은 주한 미군 대대장 근무를 마치고 국립전쟁대학원(The National War College)에서 공부한 후 준장으로 진급해서 101공수사단 여단장을 지내는 등 순탄한 코스를 밟았다.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자 소장으로 진급한 파월은 캐스파 와인버거 국방장관의 보좌관을 지내고 잠시 독일 주둔 미군 사령부에서 근무했다. 프랭크 칼루치가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되자 파월은 그 아래에서 부보좌관이 되는 등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캐스파 와인버거(Caspar Weinberger 1917~2006)는 닉슨 행정부에서 예산실 실장과 보건교육복지장관을, 그리고 레이건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다. 프랭크 칼루치(Frank Carlucci 1930~2018)는 닉슨 행정부에서 와인버거 아래에서 예산실 부실장과 보건교육후생부 차관을, 그리고 레이건 행정부에서 안보보좌관을 지내고 와인버거의 후임으로 국방장관을 지냈다. 콜린 파월을 백악관 예산실에서 펠로우로 일하도록 선발한 사람이 당시 예산실 부실장이던 칼루치였다. 레이건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이던 칼루치가 와인버거의 후임으로 국방장관이 되자 부보좌관이던 파월은 안보보좌관이 됐다. 레이건에 이어서 대통령이 된 조지 H. W. 부시는 파월을 합참의장으로 임명했다.
52세 나이로 합참의장이 된 파월은 역사상 가장 젊은 합참의장, 최초의 유색인종 합참의장, 그리고 최초의 ROTC 출신 합참의장이란 세 가지 기록을 갖게 됐다.
합참의장으로서 콜린 파월은 걸프 전쟁을 신속하게 승리로 이끌어서 명성을 얻었다. 초급 장교로서 베트남에서 부상을 당한 경험, 그리고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실제로 목격했던 반전(反戰) 시위는 파월로 하여금 전쟁은 단기간에 우세한 전력을 동원해서 집중적으로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고, 걸프 전쟁은 그런 방식으로 치러졌다.
돌이켜 보면, 백악관 펠로우로서 프레드 맬릭, 프랭크 칼루치 같은 거물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콜린 파월이 그 후 승승장구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파월은 대학원 진학, 주 방위군 근무 등으로 베트남 전쟁을 피해나간 부유층을 평소에 매우 비판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의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지만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서 결국 장관직을 그만두고 말았다. 조지 W. 부시는 주 방위군 근무로, 딕 체니는 대학원 공부와 부양할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베트남 전쟁을 피해나갔다.
사진 (1) 1988년 레이건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시절의 콜린 파월, 파월은 현역 중장이었다.
사진 (2) 걸프 전쟁을 앞두고 조지 H. W. 부시 대통령 기자회견에 배석한 합참의장 콜린 파월 대장. 두 사람의 표정이 심각하다. 파월은 아버지 부시가 남의 말을 경청하는 훌륭한 리더였다고 회고했다.
사진 (3) 1973년 백악관 펠로우 시절에 닉슨 대통령을 만난 콜린 파월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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