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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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등장과 퇴장이 이름처럼 극적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장형’이라고 불렀지만 우리끼리 말할 때는 그냥 ‘장발장’으로 통했다. 유달리 긴 장발에다 성씨가 ‘장’이니 손쉬운 별명이 되었지만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장발과 또 다른 장(場)인 특별한 공간 때문이었다.
공간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당시 나는 시내에서 좀 떨어진 변두리 산 아래 아주 어두운 골방에서 세월을 축내고 있었다. ‘苦海山房'(고해산방)이라고 누군가 사인펜으로 벽에 낙서처럼 갈겨놓았다. 그 방은 이름처럼 세상에 모든 고민을 다 안고 가는 듯한 내 젊이 고스란히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매일 벽에다 사인펜으로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는데, 뒤에 방을 찾아오는 친구 녀석들이 재미있다며 마구 낙서하는 바람에 벽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벽을 꽉 채운 낙서 가운데 단연코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고해산방’이었다.
결과적으로 그와 고해산방에서 잠시 같이 생활했지만 그를 만난 것은 엉뚱한 장소였다. 경범죄를 판결하는 즉결재판소였다. 주머니에 돈 한 푼도 없이 장발단속에 잡혀 유치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즉결재판으로 넘겨진 것이었다.
장발단속이 심할 때라 숫자가 너무 많았다. 즉결 재판도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신문과 판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을 한꺼번에 불러 놓고 뒤로 돌아서게 한 다음 두발 길이에 따라 벌금을 부과하는 식이었다. 나는 1,500원 벌금형을 받았지만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00원이 없어 며칠 구류를 산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급한 김에 어디 아는 사람 없는가 여기저기를 살펴도 아는 얼굴은 없었다. 그때 내 눈에 경계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얼굴 하나가 다가왔다. 그는 나보다 머리카락이 훨씬 길었다. 커다란 눈과 두툼한 입술의 사내는 내보다 대여섯 살은 많아 보였다. 분명 어디 시골에서 올라와 운수 나쁘게 걸린 것 같았다. 남에 대한 경계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순진하다는 것이고, 내 사정을 들어줄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거의 죽는 표정으로 벌금을 꿔달라고 했다. 아, 그 멍한 표정, 상대로 하여금 완전히 경계를 풀어버리게 하는, 아니 그 어떤 기대도 할 수 없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서 바로 돌아서지 않은 것은 멍한 표정에서 실낱같은 가능성이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간절한 눈빛만 보낸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뜻밖에 돈을 내밀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는 결정장애가 있었다. 늘 ‘그래서 어떻게...’ 하는 질문을 달고 다녔다. 내 눈살미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상황의 절심함이 그런 표정 속에서도 빈틈을 찾아낸 것 같았다.
그는 자신에게 일이 닥치면 습관적으로 그런 표정을 지었다. 상대로 하여금 아무런 기대감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생존방식인지 모른다. 아무튼 그 일로 일정한 주거지가 없었던 그는 고해산방에 한 달 정도 머물렀다. 시골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올라왔다지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의 마지막 장면은 처음 봤을 때처럼 그 멍한 표정으로 끝나고 말았다.
우리는 늘 가던 대로 시내 술집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셨다. 줄잡아 열 명은 넘어 보였다. 모두 긴 머리의 장발이었고, 순경들의 단속을 피해 술집에 모인 것이었다. 한창 술을 마시다보니 하나 둘 자리를 뜨고 그와 나 둘만 남았다. 둘 다 무일푼이었다. 더구나 열 사람이 없는 인원이 마신 술값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면 주인이 계산을 요구했다. 나는 그 때 그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특유의 그 경계 없는 멍한 표정, 주인이 기가 막혀 했다. 불과 십여 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화가 나서 펄펄 뛰던 주인의 태도가 갑자기 온건해지면서 얼굴엔 웃음기마저 보이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주인도 그 표정에서 약간의 기대감을 찾은 것 같았다. 그가 나보고 먼저 가라는 눈짓을 했다. 나는 그의 기술을 믿기로 했다. 그를 남기고 술집을 도망치듯 나왔다. 그것이 그와 마지막 장면이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그가 그날 유치장에 끌려가 장발장처럼 지내다 나왔다고도 했고, 주인과 친구가 되었다고도 했다. (완)
- 기사입력 2025년03월22일 17시01분
- 최종수정 2025년03월22일 11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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