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특집 (단편소설)> 어머니와 화투패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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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고 있었다. 방석을 깔고 그 위에 화투장을 펼쳤다. 일요일 오후처럼 한가한 날 비가 오면 화투장을 들고 오늘의 운세를 보는 것이 요즈음 내 습관이다. 오늘의 패는 국화와 노루가 떨어졌다. 국화는 술을 노루는 근심을 뜻한다. 저녁에 술자리 약속이 있기는 하지만 근심이라 은근히 호기심이 발동했다. 화투패를 보면 늘 어머니 생각이 앞선다. 어머니는 심심하면 화투패를 봤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데는 화투 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가 없어졌다.
갓 배운 서툰 운전으로 퇴근길에 거의 녹초가 되어 집으로 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울상이 된 아내는 발을 동동 굴렀다. 시장에 잠시 다녀온 사이에 어머니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파트 부근 산책이나 하시겠지.
나는 그래도 느긋했다. 아내는 내 태도가 어이없음인지 자신의 가슴을 쿵쿵 쳤다. 내 생각만 한 것이다. 사태가 심각해 보였다.
앗차 싶었다. 평생을 시골에서 사신 어머니에게는 도시 생활이 감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선지 어머니는 혼자가 되신 뒤에도 자식이 있는 도시를 거부하고 고향에 남으셨다. 하지만 고향 마을이 수몰되면서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왔다. 도시 생활, 특히 아파트 생활에 어울리지 못했다. 바깥출입도 동행자가 없으면 바로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그제야 서둘러 집을 나와 여기저기 찾아 나섰다.
큰길 한가운데 지팡이를 든 노인이 서 있었다. 신호등도 횡단보도도 아닌 큰길의 차들은 무단횡단하는 무례한 노인을 꾸짖듯이 쌩쌩 지나쳤다. 그 바람에 노인의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금방이라도 꺼꾸러질 것 같은 노인은 길을 건너가지도 돌아갈 수도 없었다.
며칠 전 사무실로 날아든 비둘기가 생각났다. 오후 나른한 시간에 갑자기 사무실이 소란해졌다. 비둘기 한 마리가 사무실 열린 창으로 날아든 것이었다. 비둘기는 밖으로 나가려고 유리창만 여러 번 들이박았다. 사무실 직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안타까워했지만 비둘기는 유리창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을 구별하지 못했다. 몇 차례 더 유리창에 부딪치자 기진한 비둘기는 사무실 구석 캐비넷 위에 앉아 있었다. 사무실 직원들이 재빨리 모든 창들을 활짝 열고 그쪽으로 유도했지만 이미 지친 비둘기는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멍한 비둘기 시선에 어머니가 겹쳐졌다.
도대체 어머니는 어디에서 헤매고 있을까.
어머니가 일단 아파트 밖을 벗어났다면 집을 찾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머니에게는 길을 물을 궁리도 없었다. 물론 아내는 이미 어머니가 갈 만한 곳을 다 찾아봤고 연락을 취할 곳을 다 취해두고 있었다. 분명 갑갑해서 밖을 나가셨다가 집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좁은 우리 아파트에 한정되었다. 아파트에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텔레비전을 보거나 혼자 화투패를 돌리는 것뿐이었다. 텔레비전 역시 어머니가 볼 수 있는 프로는 없다. 어머니는 그 흔해빠진 옛날 가요도 아는 노래가 없다. 어머니는 이 도시 사회에서는 완전히 제외된 인간이었다.
어머니도 길 가운데 서 있을까. 나는 잠시 숨을 돌리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때 오토바이가 휑하니 내 앞을 질러갔다. 윗도리를 다 벗은 젊은 놈이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다들 놀라 뒤로 물러섰다. 한동안 정신이 멍멍했다.
“앗따, 내싸마 도무지 정신이 없대이. 여기가 여기 같고 저기가 저기 같은 기, 어지러버서 이런데 우째 사노.”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예, 어무이 맞심더. 이런 곳이 어찌 인간 세상입니꺼.”
한 번씩 어머니와 같이 바깥나들이 하면 늘 불안해 하셨다. 그런 어머니가 혼자 도시 길거리를 헤맨다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 왔다.
“소나무에 학(鶴)이 없구나...”
그래도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는 화투패로 운세를 점치는 놀이다. 네 장씩 바닥에 깔아놓고 나머지는 손에 든 화투장으로 패를 붙여보는 것이다. 비오는 날 바깥 산책이 어려우면 화투판을 폈다. 살짝살짝 내리치는 화투장 소리는 빗소리보다 더 정겨웠다.
언젠가 어머니는 그 화투패를 보다가 그렇게 혼잣말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아,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소나무에 학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학에게 앉을 소나무가 없는 것이다.
어머니의 공간이 없다...(완)
*(참고) 작가의 다른 작품들
장편. ‘또야, 안뇨옹’ ‘가롯의 창세기’
단편. ‘우리집에 왜 왔니’ ‘어떤 우화에 대한 몇 가지 우울한 추측’ 등
기행문집. ‘만주일기’ 등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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