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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동의 예술시평 <47> 예술과 혁명, 정치와의 상관관계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5년01월06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5년01월08일 10시36분

작성자

  • 김찬동
  • 전시기획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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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하고 우울한 한 해를 보내고 을사년 새해를 맞이했지만, 정국의 소란은 여전하다. 마치 혁명 전야 같은 긴박감이 감돌고 정쟁으로 혼란한 상황이다.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정치적 주장들과 비방이 난무하고 있다. 과거엔 심각하고 무거운 단어로 금기시되기까지 했던 ‘계엄’과 ‘내란’, ‘탄핵’이란 용어가 마치 일상어처럼 가볍게 매일매일 매스컴을 오르내리고 있다. 사회적 평화가 깨어지고 혼미로 가득한 세상이 된 것 같다.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맑은 아침을 고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예술이 논의될 자리가 좁은 것은 사실이지만, 혁명기나 정치적 격변기에 예술은 어떤 상황에 놓이는 것일까? 18세기 이후 유럽의 정치적 격변기엔 예술은 어떤 정황이었을까? 대개는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는 비극을 맞고 몰락하거나 그 와중에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곤 했다. 

 

프랑스 혁명기와 나폴레옹 시대를 살았던 화가 다비드는 신고전주의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잘 알려진 그의 그림으로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이 있다. 이 그림은 60년대 초등학생의 가죽 책가방에 사용될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이다. 그는 프랑스의 왕립 아카데미 공부하며 로마 대상을 수상하여 로마에서 유학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고전적 화풍인 신고전주의를 개척하였다. 그는 후일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어 앵그르 등 많은 제자들을 키웠으며 정치적 격동 속에서 예술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그린 작품 중에는 <마라의 죽음>이란 작품이 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의 주요 인물로 1793년 암살당한 장폴 마라(Jean-Paul Marat)의 죽음을 기리는 작품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 당시 급진적 혁명가이자 『인민의 벗(L'Ami du Peuple)』이라는 신문의 편집자로서 혁명 정신을 선동하고 민중 편에 서서 왕권과 귀족층을 비판했던 인물이다. 이 그림은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목욕 중 암살당한 상태로 묘사된다. 그는 피부 질환으로 인해 늘 목욕을 해야 했던 연고로, 그림에서는 욕조 안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의 오른손에는 그를 암살한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가 보낸 편지가 들려 있다. 그녀는 지롱드파를 지지하던 여성으로 마라가 폭력 혁명을 부축인다고 판단하여 그를 찾아가 암살하였다. 물론 그녀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책상처럼 사용된 욕조 위의 나무 판자 위에는 깃펜과 잉크병이 놓여 있다. 화면은 어둡고 단조로운 배경을 사용하여 마라의 죽음에 관객의 시야를 집중하게 한다. 그의 자세는 르네상스 시대의 피에타(Pietà) 조각(죽은 예수를 품에 안은 마리아)을 연상시키며, 혁명의 순교자 이미지를 이상화하여 당시 혁명 정부(쟈코뱅당)의 선전 도구로 사용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 세력은 급진파인 자코뱅파와 온건파인 지롱드파로 나뉘었는데, 마라가 활동했던 자코뱅파에는 로베스피에르와 당통과 같은 인물들이 주도하며 급진적 개혁과 평등을 주장했다. 그들은 군주제 폐지 및 공화정 수립, 그리고 사회적 평등과 부의 재분배를 위한 과감한 조치 요구했다. 또한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특권 철폐 및 반혁명 세력에 대한 엄격한 처벌, 폭력적 혁명 방법을 택하며 혁명의 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단두대의 처형 등 공포정치(Terreur) 실행했다. 이에 반해 지롱드파는 부르주아 계층의 이익을 보호하며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는데, 법과 질서를 유지하며 비폭력적인 방식을 추구하였고 쟈코뱅파와는 달리 지방의 자율성을 보장하며 권한을 분산시키길 원했다. 혁명은 자코뱅파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으나 로베스피에르의 지나친 공포정치와 경제 정책의 실패 등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며, 혁명의 공식 화가가 되었고 국민공회의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특히 로베스피에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공포정치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실각과 함께 몰락하여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한동안 정치적 활동에서 물러나 있다가 나폴레옹의 부상을 지지하며 그의 궁정 화가로 활동했다. 그 당시 그가 남긴 대표작으로는 <나폴레옹의 대관식>(1807)이 있다.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을 웅장하게 묘사하며 그의 권력을 정당화했고 나폴레옹의 영웅적 이미지를 강조했다. 나폴레옹에 대한 헌신으로 그의 예술은 정치적 선전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동시에 뛰어난 역사화로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몰락(1815년)과 부르봉 왕정복고 후 그는 프랑스를 떠나 벨기에로 망명하였다가 1825년 브뤼셀에서 사망하였다. 다비드는 정치와 밀착된 예술을 병행했던 인물로, 격변의 시대를 살며 혁명적 열정과 나폴레옹의 영광, 그리고 망명자의 고독을 모두 경험했다. 그의 삶과 예술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미술사에 있어 혁명기와 같은 격변기에 예술가들이 혁명에 가담하거나 이용당했다가 몰락한 사례들은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 혁명기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이나 히틀러 시대의 작가들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을 전후한 러시아에서는 새로운 예술 실험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서유럽의 다양한 미술 언어들이 러시아로 흘러 들어왔다. 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되면서, 많은 예술가들의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러시아의 젊은 예술가들은 인상파로부터 입체파, 미래파 등 다양한 사조의 경향을 수용했는데, 이 시기의 미술을 '러시아 아방가르드'라 지칭한다. 러시아 혁명기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혁명 정신에 동참했고 정치가들은 이들을 이용하였다. 러시아 구축주의 예술가들이 그들인데 대표적인 작가는 말레비치, 타틀린, 로드첸코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이 제작한 사회적 포스터나 퍼블릭 디자인, 건축이나 공공조형물 등은 혁명 정신을 구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조각가 타틀린이 파리의 에펠탑보다도 큰 규모로 제작하고자 했던 <제3 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탑>(1919)은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탈린 시대가 되면서 구축주의 작가들은 정부의 선전 선동에 동원되었으나, 종국엔 이들의 작품 세계가 프로레타리아의 정서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축출되기 시작했다. 

 

또한 히틀러 시대의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는 히틀러가 집착한 아리안 인종의 우월성을 표현하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히틀러의 지원을 받은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는 베를린의 게르마니아 프로젝트(베를린 시내를 완전히 재건축해 세계 수도를 건설하려고 한 히틀러의 계획)를 포함해 여러 상징적인 건축물을 만들어 냈다. 히틀러는 개인 취향에 맞지 않는 예술은 철저히 탄압했는데, 모더니즘 예술을 유대인에 의해 확산됐다고 보고 통제 대상으로 삼았다. 입체파, 다다이즘, 표현주의 등을 이른바 '타락한 예술'로 간주하고, 바실리 칸딘스키나 파울 클레,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와 같은 화가들을 배격했다. 결국 많은 예술가들이 독일을 떠나 망명했고, 독일 예술계의 문화적 다양성과 창의성은 급격하게 쇠퇴했다.

 

러시아의 구축주의 작가들이나 독일의 모더니즘 작가들은 정치적 탄압을 피해 미국 등 해외로 이주하였다. 혁명기에 봉사하는 예술은 하나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고 예술가들이 정치에 이용되는 일은 너무도 많다. 하지만 그 마지막 모습은 늘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은 것이 일반적 사례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주를 통해 새로운 역사의 꽃을 피운 경우도 적지 않다. 예술과 정치의 관계가 전적으로 무관할 순 없지만 양자의 관계는 늘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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