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악한 시대의 크리스마스 시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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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에 있었던 일이다. 맨해튼 이스트빌리지의 낡은 아파트에서 한 청년이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대동맥류 파열. 청년은 사망 며칠 전부터 가슴 통증과 현기증, 호흡 곤란으로 두 번이나 병원을 찾았지만 감기나 스트레스라는 오진으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고 서른다섯의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그의 이름은 조너선 라슨. 록 뮤지컬 '렌트'를 만든 천재 작곡가이자 연출가다.
라슨이 세상을 떠난 1월 25일은 '렌트'의 오프브로드웨이 초연을 단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오프브로드웨이를 넘어 브로드웨이의 전설이 되고, 네 개의 토니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이후 전 세계 25개 언어로 공연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식당에서 일하며 7년을 매달려 만들어낸, 그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 '렌트'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뮤지컬 '렌트'는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 속 19세기 파리의 청년들을 20세기 뉴욕으로 소환한 작품이다. '라 보엠'의 초연이 1896년 2월 1일, '렌트'의 초연이 1996년 1월 26일이니 두 작품은 꼭 100년의 시간차를 둔다.
그사이 '그대의 찬 손'을 부르던 시인 로돌포는 록 뮤지션 로저가 되었다.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미미는 클럽 댄서로 바뀌었다. 카페 가수는 행위예술가로, 화가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철학자는 대학 강사로 다시 태어났다. 유려한 오페라 아리아는 재즈, 록큰롤, 힙합 비트로 변주됐다. 변하지 않은 건 차디찬 겨울, 젊은 보헤미안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가난 그리고 밀린 월세다. 여기에서 뮤지컬 제목 렌트(Rent, 집세)가 탄생했다. 집세에 쫓기며 살아가는 대도시 빈민들의 고단함은 물론, 나아가 본질적으로 일시적인, 잠시 빌려온 것일 뿐인 우리의 삶을 은유한다.
뮤지컬의 시작은 크리스마스 전날 밤, 밀린 집세 때문에 전기가 끊긴 낡은 아파트다. 한 세기 전 예술가들의 훈장과도 같던 폐결핵 대신 에이즈라는 공포가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극은 집세 독촉, 재개발 반대 시위, 직장에서의 해고, 에이즈로 죽어가는 친구들, 불안한 미래 속에 갈팡질팡하는 청춘들의 1년을 그렸다. 그 어떤 오페라나 뮤지컬보다 현실적이고 치열하게 당대 젊은이들의 고통과 불안을 추적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크리스마스. 저마다의 아픔과 이해와 성숙의 시간을 보낸 이들이 서로의 온기를 찾아 다시 만난다.
이토록 어둡고 거친 소재를 다룬 뮤지컬이 세계 곳곳,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상징하는 공연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절망 속에서도 빛나는 희망과 연대의 메시지 때문이다. 포스터에 쓰인 뮤지컬의 캐치프레이즈, ‘No Day But Today(오직 오늘이 있을 뿐)'는 과거의 어둠, 혹은 미래의 불안에 갇히지 말고 현재에 당당하게 맞설 것을 주문한다.
조너선 라슨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된 메모가 있다.
“세상의 모든 경계가 다 찢겨나가는 이 험악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매일 죽음을 직면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20세기 말 공포에 숨죽인 우리는 숨어 있지 말고 함께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
‘험악한 시대’라는 문장에서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크리스마스를 맞고 있는 한국 사회를 생각하게 된다. 대립과 갈등, 증오와 저주의 극단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통합과 치유의 길을 찾아야하는 기로에 서 있다.
뮤지컬의 클라이맥스는 대표곡 ’시즌스 오브 러브(Seasons Of Love)‘다. 첫 소절을 '525,600분의 귀한 시간들'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1년 365일을 분으로 환산한 시간이다.
“오십이만 오천육백 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재요? 일 년의 시간. 날짜로, 계절로, 매일 밤 마신 커피로. 만남과 이별의 시간들로”
노래는 “Figure in love, Measure in love, Seasons of love”라는 가사를 반복하며 끝난다.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가 결연히 붙잡아야 할 것은 결국 공동체의 사랑과 연대라는 의미다.
<ifsPOST>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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