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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88> 시인을 만나다/ 이건청 시인…포엠포엠 2018년 봄호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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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5년01월25일 16시40분
  • 최종수정 2024년12월09일 13시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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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 포엠포엠편집부 최진엽(인터뷰어). 주석희 

 

창 밖에 눈이 내리는 월요일 오후, 시인의 집 근처에 있는 도자기 전시장과 카페와 레스토랑이 작은 마을처럼 아기자기한 곳 서이천 ‘더이진’으로 이건청 시인을 만나러 갔다. 가끔 아내인 서대선 시인과 데이트 겸 식사를 하는 곳이라 한다.

 

앞에 계신 그분의 목소리와 눈빛은 먼 옛날 반구대 암각화를 그리고 있는 소년처럼 아득하다. 눈에 보이는 동물과 곤충들과 풀 한 포기의 사소한 모습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섬세한 감성으로 한국 서정시의 큰 줄기를 이어가고 계시는 분. 또한 생태. 환경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시세계를 넓혀가고 있는 분, 그리고,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실체를 확연히 보여준 반구대암각화를 테마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테마로 시집을 간행한 노시인 한 분을 만났다. 그리고, 지난 가을에는 김달진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이건청 시인이 그분이다. 이분의 낮고, 멀고, 넓고 순정한 발차취를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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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생님의 연못의 달은 안녕하시겠지요. 오늘 아침도 모가헌의 문을 열고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가셔서 커피를 내고 토마토를 갈아 아내이신 서대선 시인과 함께 차를 마시며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시는지요.

 

2000년에 시골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해왔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을 겪으면서 태어난 고향 이천을 떠난 지 50년 만에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양촌리 마을에 새로 집을 짓고 이사를 온 지도 어느새 24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시골에 집을 지으면서 본채 옆에 20 평쯤 되는 서재를 하나를 더 지었습니다. 나는 주로 그 서재에서 생활을합니다. 거기서 잠자고 책 읽고 차도 마시고 글도 씁니다. 나이 드니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아내가 있는 본채로 건너가지요. 말씀하신대로 커피를 내리고 토마토를 주서에 갈기도 하지요.

 

아내도 신구대학에서 정년을 했고, 시집도 두 권을 냈습니다. 하루 일정에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얘기하고, 마음 내키면 훌쩍 어딘가로 떠나기도 하지요. 그리고 사소한 일상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눕니다. 가령, 둔덕에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내렸다든가 뽕나무에 오디가 여물었다든가 첫 귀뚜라미를 봤다든가 하는- 시골에서 살아보니 일상사 속에 이미지나 상징이나 삶의 본질들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은 걸 알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이 드니 요즘엔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지 말자고 생각합니다. 여생의 시간을 귀히 여기고, 아껴 쓰자는 게 요즘 나의 생각입니다.

 

2- 선생님의 시 <아내라는 여자>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오장육부를

깊이 썩혀

비옥한 거름을 만들어 내는 여자,

그 거름으로 남자의 발등을 덮어

매일 아침 남편의 자리에

다시 세워주는 여자,

 

자기 몸속에 남편을 심어

또 다른 물과 하늘과 땅으로 된

따뜻한 우주를

출산해내는 여자

 

환한 광배 속의 여자,

아내.

 

아내와 50여 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가난했고 편벽된 고집쟁이였던 남편, 시만을 지고의 가치로 떠받들고 살았던 남편이 시인의 자리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다독이고 감싸 안아준 것이 ‘아내’라는 자각이 온 것은 요근래의 일입니다. 젊었던 때는 하릴없이 외로움을 고독을 떠안겨주기도 했겠지요. 그런데, 아내들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비옥한 거름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그것이지요. 세상의 아내들은 “자신의 오장육부를 /깊이 썩혀 /비옥한 거름을 만들어내는 여자”이면서, “그 거름으로 남자의 발등을 덮어/매일 아침 남편의 자리에/다시 세워주는 여자”인 것이지요. 남편들이 매일 아침 의젓한 남편의 자리에 다시 설 수 있는 것도 아내가 만들어낸 비옥한 거름이 발등을 덮어주고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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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생님의 글방 모가헌’(慕嘉軒) 그 곳은 선생님께 어떤 곳인지요.

 

‘모가헌’은 일상 현실 속에 지친 사람이 돌아와 은거하기 위해 마련한 쉼터 같은 곳입니다. 사람의 품성을 이루는 핵심 성분이 있다면 나는 자연 속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70년대 중반 시골에 터전을 마련해보자고 뜻을 모았던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분들이 도시생활의 편의성을 떨쳐버릴 수 없어 선택을 미룰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 혼자서 시골행을 택하게 되었지요. 모가헌은 숲과 대지, 그리고 채마밭입니다. 거의 대부분이 임야로 되어 있습니다. 산 중턱에 살림집과 서재가 들어서 있고요.

나는 모가헌에 내려와 살면서 자연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큰 소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디언의 오감의 언어 같은 걸 얼마쯤 터득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굴참나무의, 밤나무의, 칡넝쿨이나 으름덩굴의 생각을 얼마쯤 헤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청설모나 직박구리나 물까치들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있는 감각의 촉수를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4- 선생님의 개인 시집이 11권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수록된 시가 어림잡아도 800편의 시가 발표되었고 아직 묶지 않은 시는 그 이상 몇 배가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시와 선생님의 시 정신, 시 세계에 대하여 듣고 싶습니다.

 

“내 시세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따로 기억해 두었으면 하는 시집은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

 

나는 그동안 11권의 개인 창작 시집을 냈습니다. (1989년에 시집 『로댕- 청동시대를 위하여』(문학과 비평사)를 냈습니다만 로댕의 조각 작품만을 모티프로 한 창작 시집으로 출판사의 기획 청탁으로 집필한 시편들을 모았습니다.) 11권의 시집 중에서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2007. 서정시학),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2009. 동학사) 『굴참나무 숲에서』(2012. 서정시학). 『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 (2017. 서정시학)같은 시집들에서 시적 대상과 자아와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고, 어느 정도는 구조에 닿아 있기도 한 시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애정을 가지는 시편들입니다.

 

2017년 김달진 문학상 수상식장에서 내가 말했던 수상 소감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 봅니다. 요즘의 내가 생각하는 시의 본질을 대변할 수 있는 내용이 수상 소감 속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는 풍경의 세부를 애정 어린 눈으로 깊이 보는 일이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시인은 우리의 일상, 우리가 사는 난세 속에서 명징한 풍경들을 발견해내는 일에 신명을 다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세하고 명징한 풍경들이 구체적 세부를 이룬 시들이 좋은 시라고 믿습니다".

 

내 시 세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따로 기억해 두었으면 하는 시집이 한 권 있습니다. 시집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 2000. 시와 시학)이 그것인데요, 이 시집에는 1980년 사북사태 이후, 폐광된 사북, 고한, 장성 탄광 마을의 엄혹한 현실을 카메라 앵글에 담듯 땀 흘린 노고가 담겨 있습니다. 3년여의 세월 동안 탄광촌을 헤매다녔으며 지하 3200m 막장을 찾아 들어가 석탄 앞에서 무릎을 꿇기도 했었습니다. 노동 운동권 사람들도 다 떠나버린 탄광 마을을 혼자 헤매다니며 엄혹한 탄광 현실을 오직 시인의 오감으로 담아 내려한 시집이었습니다. 시단에서 이 시집에 주목한 논자는 별로 없었지만 내가 엄혹하고 스산하며 소름끼치는 1980년대 탄광 현장에서 얻어낸 시편들이어서 애정이 갑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탄광들이 폐광되어 광부들도 운동권 사람들도 떠나버린 폐허 속을 헤매며 시를 탐색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5- 2010년에 간행된 시집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는 ‘반구대 암각화’라는 특이한 대상을 만나게 되면서 살아 있는 감각으로 고래들과 선사인들을 포옹하면서 ‘감각’을 회복할 수 있었고, 시적인 ‘시력’과 ‘청력’까지도 회복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셨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울산시 울주군 대곡천 일원의 암각화는 선사 이전부터 만들어지면서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위대한 문화유산입니다. 반구대암각화가 구체적 형상을 새긴 바위그림들인데 비하여 천전리암각화는 기하학적 도형과 그림 글씨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반구대암각화가 약 6천여 년 전부터 새겨졌다면 천전리암각화는 약 3천여 년 전부터 새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1998년부터 오랫동안 이곳을 오르내리며 암각화 제작 당시의 풍경을 복원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암각화를 찾아다니면서 6천여 년 전 울산 일원에 살았던 이 땅의 선사인들의 숨결과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대곡천 암각화의 창작자들은 그들의 삶의 모습을 바위에 새겨 놓았으며 조선술과 농경술과 사냥술 등을 세세한 그림으로 남겨 놓았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6천여 년 전 선사인들이 고래잡이 배를 만들어 타고 고래사냥을 했다는 점입니다. 반구대암각화에는 모두 58마리의 고래 도형들이 있는데 이런 고래 그림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단군신화 훨씬 전부터 바위 면에 지상인의 꿈을 새긴 사람들이 있었고, 바위 면에 새겨진 선사인들의 그 꿈은 누 천년 풍우를 헤치고 면면히 살아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는 시인의 영감과 직관과 상상력으로 암각화에 생명을 불어넣고자 했습니다. 국보 285호인 반구대암각화와, 국보 147호인 천전리암각화를 대상으로 쓴 시편들이 시집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로 엮여져 나온 것이 2009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집이 울산시 울주군 대곡천의 암각화를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집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암각화에 대한 홍보도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있는 셈입니다. 나의 시집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가 세계적인 이 문화재가 처해있는 실상을 알리고 보존 필요성을 알리는데 얼마쯤 기여한 점도 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끼기도 하는 것입니다.

 

6- 부부 시인으로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옆에 계신 서대선 시인에 관한 이아기도 해주십시오. (웃음)

 

“- 부부가 독립적 시인으로 개성적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매우 엄격한 자기 관리와 통제가 필요해.-“

 

부부가 함께 시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시를 쓰는 일이 사람의 생각과 느낌과 상상의 영역을 바탕으로 하는 일이고, 그런 영역의 지극히 개인적이 부분들과 상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함께 생활을 영위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자칫 상대방의 독자성을 훼손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독립적 시인으로 개성적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매우 엄격한 자기 관리와 통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자신의 시에 대해 엄격한 금도의 테두리를 지켜가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시단에 부부가 함께 시를 쓰는 부부 시인들이 더러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의 시작 취향이나 경향이 아내 서대선의 그것과 다른 것이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50여 년을 부부로 살면서 집에 배달되어오는 시집들을 나보다도 먼저 공들여 읽는 것이 아내입니다. 좋은 시집을 읽게 되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요. 소리 내어 읽기도 하고요. 사물을 어떻게 보는가, 언어는 어떻게 선택하는가, 시의 구조란 어떤 것인가를 얘기하기도 하지요. 이런 과정을 오래 거쳐 오면서 아내는 시적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온 것 같습니다. 다행스런 일입니다. 바라기는 아내가 개성적인 문체를 지닌 시인으로 성장해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시집 『천년 후에 읽고 싶은 편지』를 낸 것이 2009년이었습니다. 마침, 그때가 아내 갑년이기도 해서 기념으로 자비출판을 했었지요. 그런데, 그 시집을 받아본 시인들의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그 후 김남조 선생의 특별 추천으로『시와 시학』 신인상으로 등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시집 『레이스 짜는 여자』(2013 서정시학)가 간행되면서 본격적인 시단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매주 1편씩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인터넷 매체 『문화저널21』에 ‘이 아침의 시’라는 칼럼을 올리는 일도 3년째 하고 있습니다.

 

7-선생님께서 추구해 오신 서정이 한국시문학사에서 찾이하는 맥락은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시고, 또 선생님께서 평생을 두고 추구해오신 생태ㆍ환경시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지요

 

한국의 서정시는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의 전개 과정은 퍽 다양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 경우, 정지용 시인으로부터, 박목월 시인으로 이어져 오는 서정시의 정신과 언어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나는 박목월 선생에게서 10 여 년 시작 수업을 해오기도 했습니다. 한국서정시 중에서도 견고한 구조를 지향하면서 상상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을 해온 셈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관심 가져온 중요 영역으로 생태ㆍ환경시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장시 「눈 먼 자를 위하여」나 시집 『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같은 시편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장시 「눈 먼 자를 위하여」는 1984년 12월 인도 보팔 시에서 있었던 유니온카바이트사의 독가스 누출 사고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환경사고였지요. 3천 500여 명이 죽고 50 여만 명이 실명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장시 「눈 먼 자를 위하여」는 환경 사고의 엄청난 피해를 고발한 환경시였습니다. 시집 『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은 탄광촌을 대상으로 진폐, 규폐 피해 등을 다룬 환경시였습니다.

 

8- 선생님께서는 박목월 선생님과 깊은 인연을 갖고 계시지요.

 

내가 박목월 선생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59년 고등학교 2학년 학생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문예작품 발표회를 하게 되었는데 박목월 선생과 조지훈 선생 두 분을 초청 연사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두 분 선생님을 댁으로 찾아뵙고 초청의 말씀을 드리는 역할을 제가 맡았던 것이지요. 박목월 선생을 댁으로 찾아뵙게 된 날은 9월 말경 휘영청 밝은 달이 뜬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17세 까까머리 소년이 40대 초반의 선생을 뵙게 된 것인데 더듬더듬 초청 말씀을 드리고 나니 불현듯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선생의 시 구절이 귓전에 맴돌고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내 가슴에 ‘시인’이란 단어가 숙명처럼 들어와 박혔던 것 같습니다.

정신없이 습작에 매달리는 열병을 앓게 된 것도 그 무렵 때 부터였습니다. 선생께서 강의하시는 대학 강의실을 찾아 입학을 하였고, 거의 매주 글을 써들고 선생을 찾아뵈었습니다. 꿈속에서도 시에 매달렸었습니다. 시만을 생각하다 보니 목숨이 경각에 달릴 만큼 공황장애에 시달린 적도 있었습니다. 먹을 수도 잠 잘 수도 없었고, 몸무게는 50kg을 넘나들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내가 읽었던 독서목록들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F.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R. M. 릴케의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에게』, 『로댕』, 『말테의 수기』 쿠라다하쿠조(倉田百三)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 F. 카프카의 『성』 -이런 독서목록들은 문학에 임하는 준엄한 정신적 태도를 강조하고 있는 책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박목월 선생을 만나 시 때문에 노심초사 하고 있을 때 나는 엄격한 정신적 가치와 시의 절대성에 관한 책에 매달려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 무렵 박목월 선생은 부드럽고 유연하며 찬연한 상상력의 시편들을 요구하고 계셨던 것이니 나의 시가 선생의 안목에 합당한 것일 수가 없었겠지요. 나는 그동안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쌓아온 엄정한 정신, 준엄한 시적 위의의 문제를 덜어내고 감각과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힘들고 어수선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시단에 입문할 수 있었습니다. 박목월 선생 문하에서 10 여 년 내공을 쌓고 나서야 시인의 반열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박목월 선생 밑에서 습작 과정을 거친 10년 내공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 평생 문학적 정체성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라 믿습니다. 덕분에 시단의 관심 속에 등단을 하게 되었고 내적인 문학적 자양을 어느 정도 축적하면서 시인으로 설 수도 있었습니다. 1969년에 창간된 월간시지 『현대시학』의 전봉건 선생은 막 등장한 신인인 내게 1970년부터 시단 월평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때 시단을 대표하던 『현대시학』의 월평란이 가지는 권위는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박목월 선생은 선생께서 필생의 업적으로 시작한 월간 시지 『심상』의 편집을 맡겨주셨습니다. 생각하면 박목월 선생께 너무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10년여일 시 지도를 해주셨고, 필생의 업적으로 시작한 잡지의 편집이라는 막중한 책임까지 맡겨주셨습니다. 대학원 시절엔 박목월 선생의 하나뿐인 제자였습니다. 선생께서 작고하신 후 내가 한양대학교 강단에 설 수 있었던 것도 선생께서 베풀어주신 사랑과 음덕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느껍기 이를 데 없는 일이지요.

 

9- 50여 년간 시를 써 오시면서 함께하신 많은 시인들이 계실 텐데요 선생님만 간직하고 계시는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시인에게 친구란 단순히 우정으로 교류하는 벗,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친밀한 관계망을 이루는 상대자라는 사전적 규정을 벗어납니다. 시인은 직관과 영감과 상상력을 통해 소통하는 아주 특별한 언어 사용자입니다. 직관과 영감과 상상력은 아주 비밀스런 영역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입니다. 이런 비밀스런 개인적 영역에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를 곁에 둘 수 있는 것은 행운이지요. 특히 문청 시절 도움을 공유할 수 있는 어드바이저를 곁에 둘 수 있다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내 경우 스승으로 박목월 선생과 김상억 선생, 문청시절의 오세영, 권명옥같은 친구, 그리고, 후배로 조정권 같은 시인들을 들 수 있겠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내 문학의 평생 스승인 박목월 선생, 그리고 김상억 선생을 들 수 있겠는데요, 김상억 선생은 내 고등학교 시절 국어교사였습니다. 시인이 지켜야 할 정신의 준열성과 시의 위의를 강조해서 일러주신 분입니다. 오세영이나 권명옥 같은 친구들은 대학 재학시절 만난 친구, 평생 지친으로 지근거리에서 도움을 준 친구이지요. 그런데, 지난 11월 타계한 조정권은 이제 세상을 떠나고 없으니 그와 나 사이의 관계를 이 자리에 기록으로 남겨 두었으면 합니다.

조정권은 1949년 생, 내가 1942년생이니 7년 쯤 후배가 됩니다. 양정고등학교 1학년 학생 조정권이 1960년대 중반쯤 내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었습니다. 시를 쓰고 싶어 시의 길을 가고 싶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때 나는 대학 졸업반, 시단 등단을 앞에 두고 좌절과 번민만을 혼자서 새기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나는 이제 막 서울시로 편입된 영등포 끝 오류동이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에 몇 번 와 닿는 시내버스를 바꿔 타고는 내 집을 찾아오곤 했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 독서목록들을, 독서목록들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었던 문학론들을, 시창작 과정들을 얘기해주곤 했었습니다. 가난했던 시절, 신혼 초의 몇 년 중곡동 소재 내 집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었습니다. 조정권은 혈육의 아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조정권은 매우 감성적이면서도 이지적인 사람이어서 천품이 시인 재질을 타고난 사람이기도 했었습니다. 그와의 만남 속에서 특히 강조해서 이야기하곤 하던 것이 시인이 지녀야 할 정신적 가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현대시학』이 배출한 첫 번째 시인이 되었고 한국 정신주의 시의 선구로 값진 시편들을 써냈습니다. 종합예술 잡지 『공간』에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미술, 음악 평론을 써내기도 했습니다. 조정권 시인과 떨어져 살았어도, 몇 달씩 소식 없이 살았어도 그는 늘 곁에 있었고 대화를 나누며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적 유태가 늘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내가 고등학교 몇 년 선배였지만, 그는 쉼 없이 얘기를 걸어오고 물음을 던지곤 했었습니다.

 

 나는 그를 향해 이야기를 건네면서 내 생각의 갈피를 세우곤 했었습니다. 선후배라기보다는 동료였고 친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진한 감각과 정신을 나눠 가진. 2017년 11월 8일 그가 떠났습니다. 그의 육신은 한 줌 재가 되어 용인공원에 잠들어 있지만 그가 남기고 간 시편들은 오랜 생명으로 우리 곁에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0-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목선들의 뱃머리가」 등단으로 오랫동안 시를 써 오시면서 시가 무엇인지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 시가 터져 나오는 불만을, 혹은 갈망을 모두 뱉어내는 토사물의 집하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시는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언어 형태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생각이나 느낌’을 쓴 글은 시가 아니며, ‘형태’로 표현된 ‘생각과 느낌’만이 시일 수 있는 것이지요. 시인의 생각과 느낌은 ‘언어 형태’를 획득할 때에만 영속하는 가치가 될 수 있습니다. "형태"를 획득하지 못한 생각과 느낌은 그냥 진술적 언술로 소멸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지요, 가령, 어떤 사람이 처절한 고독 속에 떨어져 자신의 처지를 시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지니게 되었다고 할 때, 윤동주 시인의 예를 들면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이렇게 표현해 냅니다. 처절한 고독을 ‘백골’이라는 형태로 치환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윤동주식 고독의 형태는 고독의 상황에 대한 어떤 ‘설명의 말’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습니다. 형태로 발견된 시어만이 가지는 절대성입니다.

 

문학작품의 구조는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의 총합입니다. 따라서 의미가 깊은 작품의 구조는 구조를 이루는 요소들의 조작 상태도 세밀하고 복잡하게 마련이지요. 지금, 한국 시는 감각, 상상력, 영감, 문체, 리듬, 이런 것들에 대한 가치를 보다 소중하게 일깨워 가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시에 있어서 부수적인 것이고, 시가 지니는 의미가 핵심적인 요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요즘에 발표되는 상당수의 시를 나는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시를 존재 자체가 겪는 욕구불만의 배설체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 시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시가 욕구불만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욕구불만을 노래할 경우에도 정제된 형식과 구조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시가 터져 나오는 불만을, 혹은 갈망을 모두 뱉어내는 토사물의 집하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발표되는 시들 중엔 작품의 길이가 긴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동원되는 말들이 많고 수사가 현란하지요. 한 편의 시가 20행, 30행을 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꼭 필요한 경우 30행, 40행도 넘길 수 있겠지만 시의 행수가 이처럼 길어진 것은 비정상적이지요. 지리한 설명과 부연은 작품이 지녀야 할 시적 긴장을 이완시킵니다. 가급적이면 짧게 쓰는 것이 시의 정도라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습니다.

 

“- 시는 가급적이면 짧게 쓰는 것이 시의 정도라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습니다.-”

 

11- 평소에 맑은 눈과 밝은 귀를 강조하시는 선생님의 작품에서 세상의 상처와 연민을 감싸 안는 애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시를 쓰며 명징한 풍경들을 발견해내려면 어떠한 마음가짐이 중요할까요.

 

‘맑은 눈’, ’밝은 귀‘라는 캐치프레스에는 감각의 회복을 염원하고자 하는 저의 바람이 담겨져 있고, 궁극적으로는 시정신의 회복이라는 목표설정 의지도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사회는 구체적 체험이 휘발되어버린 지식과 관념과 타성의 시대입니다. 이런 타성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오감이라는 본능과 직관의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언어가 사물’이었던 시대가 ‘언어가 관념’인 시대로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사물’은 만지고 맛보고, 두드려볼 수 있지만 관념은 만지거나 맛보거나 두드려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물의 언어’가 생명을 살려내는 발생기적 힘의 언어인데 반하여 ‘관념의 언어’는 단지 의미를 매개하는 교환가치로서의 언어일 뿐이지요. 실상이 없는 허상의 언어라고 할까요.

 관념에 노출되면서 상해버리기 쉬운 관념을 덜어내기 위해서 시인들이 쉼 없이 노력하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이지요. 이미지나 비유의 언어가 관념을 덜어내고 본질을 구현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지요. ‘맑은 눈’, ’밝은 귀‘는 대상을 감각으로, 직관으로, 영감으로 만나기 위해 지녀야 하는 필수 요건인 셈입니다.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고정관념들을 과감히 깨뜰고 들어갈 때 사람의 ’눈‘과 ’귀‘는 순정한 감각들을 불러내 만나게 해주는 인식의 앵글이 될 것입니다.

 

12- 선생님은 예술가족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개도 해주십시오.

 

 먼저 아내 서대선 시인은 신구대학 교수로 정년하였고 한국현대시를 널리 알리는 시평론을 계속하고 있고요, 아들 딸모두 예술영역에서 재능을 들어내고 있답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예술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면서 예술 쪽으로 개성을 들어내게 된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예리한 비평자이면서 도움을 주고받는 어드바이저이기도 하지요.

 

아들은 현대무용 전공의 현대무용가 이해준입니디. 현대시를 현대무용으로 무대화하는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한국현대무용협회 이사장을 맡았었고 현재 전문무용수 지원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고요, 한양대학교 무용예술학과 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딸 이수정은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현재 광주과학기술원(GIST) 교수로 과학 영재들에게 문학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2001년『현대시학』신인상으로 등단했지요. 며느리 김지영도 발레리나로 대학에서 무용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가족 모두 각자 영역에서 튼실한 개성으로 역할을 다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바램이지요.

 

13- 특히 최근 작품들에서 청춘의 회상과 노년의 앞날에 대한 주제들을 형상화해서 감동을 주십니다. 노년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시는 체험이다’라는 말은 릴케가 말하는 시의 정의입니다. 릴케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많은 체험을 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제 경우 가장 신선한 감각으로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나는 이미지들은 유년체험을 토대로 한 체험 인자들인 것 같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유년 체험은 어머니의 태반 근처에 있는 것이고 어떤 세상사의 질곡에도 오염되지 않은 천의무봉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천의무봉의 체험들은 노년의 시인에게도 퍽 유용한 회상인자로 쓸 만한 것이 되는 것 같습니다.

‘노년의 아름다움’을 물어보셨는데, 욕심을 줄이고, 세상사를 조금쯤 깊게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망무제(一望無際)란 말이 있습니다. “한 눈에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멀고 넓어서 끝이 없음”을 뜻한다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습니다. 언제 한번 쯤 그런 ‘일망무제’를 접할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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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오랜 시간 선생님의 귀한 말씀과 함께 자리해 주신 서대선 선생님도 감사합니다.

 

오늘 춥고 눈도 날리는데 포엠포엠 가족들이 이천까지 탐방을 와주니 반갑고 즐거웠어요.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눈비가 쏟아져 길이 질퍽거렸다. 잠시 미사리에 차를 세우고 일행은 따끈한 커피를 마셨다. 이건청 시인의 모습처럼 곡마단 뒷마당 말 한 마리 이야기와 쓸쓸한 눈빛과 고요한 목소리와힘없이 차에 오르시는 모습이....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처럼 눈에 아른거린다.]

 

●이건청의 경력

1942 경기도 이천군 모가면 신갈리에서 출생

1966 한양대학교 문리대 국문학과 졸업

1967 한국일보 신춘문예 「목선들의 뱃머리가」 로 등단

1978 한양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1986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2002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학장

2008 환경운동연합 고문(이천)

2009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총동창회장

2010 한국시인협회 회장

 

●수상

녹원문학상 1986/ 1989 현대문학상 1996/ 한국시협상 1996/ 한국예술발전상(문학부문)2006 /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문학부문) 2007/ 목월문학상 2010/ 현대불교문학상 2010/ 고산문학대상 2010/ 2011 자랑스런 양정인상/ 김달진문학상 2017/ 편운문학상


●시집: 

<실라캔스를 찾아서>/<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 2017/ <굴참나무 숲에서서>2012/ <반구대암각화 앞에서>2009/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2007/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2002/ <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2000/ <코뿔소를 찾아서> 1995/ <하이에나>1989/ <망초꽃 하나>1983/ <목마른 자는 잠들고>1975/ <이건청 시집>1970

기획시집: <로댕- 청동시대를 위하여> (문학과 비평 1989)

 

시선집, 전집: <해지는 날의 짐승에게> (미래사. 1991)/ <무당벌레가 되고 싶은 시인> (2003 시인생각)/ 문학선집(전4권): <이건청 문학선집> (2007 국학자료원)/ 이건청 문학전집(2023. 국학자료원)

 

<※ 지나온 세월을 회고하면서 새롭게 느껴지는 인생 여정의 한 토막이기에 여기에 소개해 본다.>

[출처] (포엠포엠 2018.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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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5년01월25일 16시40분
  • 최종수정 2024년12월09일 13시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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