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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포퓰리즘을 경계한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12월03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3년12월02일 23시11분

작성자

  • 조장옥
  • 서강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前 한국경제학회 회장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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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존재의 근거가 법과 대중의 신뢰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법정화폐(fiat money)는 현대 경제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지폐는 금이나 은과 같은 그 어떤 귀금속과도 교환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불환지폐(不換紙幣)라고 불리기도 한다.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 혹은 그것들을 기초로 한 화폐를 교환의 매개수단으로 사용하기를 포기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금본위제도를 사용하던 많은 나라들이 그것을 포기한 계기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다. 그러나 세계 여러 나라들은 금본위제도를 유지하던 미국 달러와의 환율을 고정시킴으로써 일종의 금본위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금본위제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무역적자에 따라 금의 유출이 심각하자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1971년 달러의 금태환을 정지시키면서부터이다. 금에 기초한 달러를 기축통화로 사용하던 세계경제가 큰 충격에 빠진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변동환율제도를 기초로 한 새로운 국제금융질서가 태어났으며 여러 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세계 경제를 그런 데로 잘 지탱하고 있다. 

 

아무런 내재적인 가치가 없는 지폐를 주고받으면서 현대 세계의 주민들은 거래를 한다. 사용하고 있는 거래의 매개수단이 그 자체로는 거의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대다수는 인식하지도 못한다. 20kg 쌀 한 가마니를 내어주고 받은 5만 원 짜리 한 장이 한낱 종이 쪽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농부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마치 그 안에 5만 원의 가치가 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내재적인 가치가 없는 지폐가 통용되는 것은 다음 거래에서 같은 가치의 재화를 구매하는데 상대방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신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신뢰는 오로지 법과 관행 그리고 재화와 화폐의 상대적인 수량에 의해 유지되는 교환비율(물가)의 안정성 때문에 가능하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깨어지면 금융과 거래질서가 무너지고 큰 위기가 닥친다. 그만큼 현대 경제의 금융 및 거래질서는 취약하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어느 고위 공직자가 금융인을 가리켜 ‘도둑놈들’이라고 하여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절대 틀린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금융의 원리는 자금이 남아도는 주체로부터 필요로 하는 주체로의 중개이다. 우리가 금융기관에 자금을 맡기는 것은 그와 같은 기능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금융기관은 본연의 기능과 역할에 충실하기보다 사익의 추구에 골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금융인이라고 모두가 신뢰와 신용을 철칙으로 삼지는 않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반화의 오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는 금융 사고를 보자면 ‘도둑놈들’이 적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금융인에 대한 그와 같은 인식은 근래에 생겨난 것이 아니며 유구하다.    

 

이자금지법 

 

이자금지법(usury doctrine)은 금융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의 표현이었다. 고대 로마나 그리스에서도 이자를 금지하는 전통이 있었으나 기독교가 정신과 생활의 근본이던 중세 유럽에서 이자금지법은 더욱 엄격하였다. 자금을 빌려줌에 있어서 어떤 유형의 이자나 부담금도 금지하였다. 중세의 이자금지법은 모세 오경을 비롯한 구약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 

 

“너희가 나의 백성에게, 너희 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탈출기 22장: 24-25)

 

“너희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너희 곁에서 허덕이면, 너희는 그를 거들어 주어야 한다. 그도 이방이나 거류민처럼 너희 곁에서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에게서 이자나 이익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너희 형제가 너희 곁에서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자를 받으려고 그에게 돈을 꾸어 주어도 안 되고, 이득을 보려고 그에게 양식을 꾸어 주어도 안 된다.”(레위기 25장: 35-37)   

 

“너희는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돈에 대한 이자든 곡식에 대한 이자든, 그밖에 이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도 되지만, 너희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 손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신명기 23장: 20-21)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놓지 않으며 무죄한 이에게 해되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네. 이를 실행하는 이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리라.”(시편 15장: 5) 

 

“변리를 받으려고 돈을 내놓지 않으며, 이자를 받지 않고 불의에서 손을 떼며,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한 판결을 내리면서,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리라. 주 하느님의 말이다.”(에제키엘서 18장: 8-9) 

 

신약성경에도 예수의 입을 빌어 이자를 금지하는 구절이 있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루카 복음서 6장: 34-35) 

 

이자금지법이 공식화되기 시작한 것은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 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the Council of Nicaea)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사제들이 이자금지법을 지킬 것을 명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자금지법이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확대된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샤를마뉴(Charlemagne)때라고 한다. 물론 기독교를 믿지 않는 비신자에게까지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유태인의 이자거래는 허용되었으며 유태인이 특별히 금융에 밝았던 것은 그런 사정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자금지법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유럽의 경제, 사회, 정치를 크게 제약하였으며 금융제도와 기관의 발달에 심대한 장애였다. 

 

그렇다면 자금을 빌려주면서 이자를 받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중세의 교부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자를 받으면 안 되었다. 먼저 빌려준 자금은 이미 대부자의 소유가 아니라 차입자의 소유이다. 따라서 빌린 자금으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은 차입자의 것이고, 대부자가 그것을 취하면 절도라고 보았다. 다음으로 돈은 거래의 매개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그 자체로 생산적이지 않다. 돈에서 싹이 나는 것도 아니고 열매가 열리는 것도 아니다. 자금과 함께 발생하는 수익은 돈 때문이 아니라 그와 결합되는 노동과 사업 때문이기에 이자를 요구하는 것은 절도라고 보았다. 조금은 황당한 이유이지만 이자금지법을 정당화한 가톨릭 교부들의 논리이다. 실제로 지분투자(equity capital)나 토지에 대한 투자는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수익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자금을 빌려줄 때 이자를 받을 수 없으니 자금이 꼭 필요한 사람이 빌릴 수 없는 경우가 많았을 것은 당연하다. 편법이 등장한 것 또한 당연하다. 예를 들어 80파운드를 빌려주고 계약서에는 100파운드를 빌려준 것으로 명시하는 방법이 있었다. 국제거래에서는 환율을 높게 쳐주어 이자를 보상하는 편법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중세에도 자금을 기한 안에 되갚지 않으면 벌금을 물게 되어 있었다. 이를 포에나(poena) 또는 모라(mora)라고 하였다. 때로는 그와 같은 규칙을 악용하여 자금을 일부러 늦게 되갚으면서 벌금을 숨겨진 이자의 형태로 지급하였다. 그러나 이 모두 다툼의 소지가 있었다. 따라서 이자금지법은 적어도 거래비용을 크게 증가시키는 제도임에는 틀림없었다. 

 

이자가 붙은 자금거래가 공식적으로 처음 허용된 것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던 네덜란드에서였다. 1540년 당시의 황제 샤를 5세가 12%까지 이자를 허용하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이제 이자금지법은 12%보다 높은 경우에만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 때이다.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기 19년 전인 1545년 영국 의회는 10%까지 이자를 허용하고 그 이상은 고리대금업으로 정의하는 고리대금법을 제정하였다. 영국의 이자율 상한은 1624년 8%, 1651년 6%, 1713년 5%까지 계속 하락하였다. 그리고 일종의 이자제한법으로 남아 있던 고리대금법은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854년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가톨릭 국가에서 고리대금에 대한 엄격한 규제는 1789년 일어난 프랑스혁명 때까지 지속되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중세인가?

 

이자에 대한 반감은 21세기에도 대단하다. 이자를 수탈이고 불로소득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직도 이 나라에는 이자를 그런 시각에서 보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현대 경제에서 이자가 지급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많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금융은 저축된 자본을 효율적으로 생산적인 용처에 배분하는 기능을 한다. 이때 이자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격기능을 갖는다. 이자율이 왜곡되면 자본은 엉뚱한 곳에 쓰이게 된다. 그때 경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 망가진다. 소련을 위시한 공산국가가 망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한 마디로 자원배분을 효율적으로 하는 가격기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이자율, 보다 넓은 의미에서 금융에 정치가 개입함으로써 자원배분의 기능을 왜곡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아무도 모르게 망국을 초래한다. 

 

지금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야당이 은행을 포함한 금융회사가 일정 기준 이상의 이자 수익을 냈을 경우 초과 이익의 40%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부담금을 징수하는 ‘횡재세’법을 지난 11월 14일 발의했다고 한다. 해당 법안은 금융회사가 직전 5년 평균 대비 120%를 초과하는 순 이자수익을 얻을 경우 초과 수익의 40% 범위 안에서 상생금융기여금을 내도록 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도 따져 보면 이자금지법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대선에서는 야당 대통령후보가 ‘최고금리 10% 제한’을 주장하더니 한 발 더 나아가 ‘기본대출권’이라는 것을 들고 나왔다. 신용이 낮은 사람을 포함해 누구나 저금리로 대출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자는 얘기였다. 금융이 가지고 있는 자원배분 기능을 무시함은 물론이고 금융에 내재하는 역선택과 도덕적 해이를 어쩌자는 것인지? 그런 논리를 이해는 하고 있는지? 의아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포퓰리즘의 천국이 되어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도 야도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금융 포퓰리즘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포퓰리즘은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끝에는 절망밖에 남지 않는 정치적 패륜이다. 베네수엘라나 아르헨티나와 같은 남미의 국가들이 그 끝에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 타산지석도 삼지 못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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