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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체제 3연임 이후 해양안보와 한국의 인태전략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11월03일 17시08분
  • 최종수정 2023년11월03일 11시17분

작성자

  • 윤대엽
  • 대전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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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진핑 체제 3연임과 해양안보

 

2023년 8월 중국 정부가 신표준지도를 발표하면서 인태지역의 영토분쟁은 또 한 번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신표준지도는 인도, 파키스탄, 러시아와의 영토분쟁 지역은 물론 기존 9단선을 10단선으로 확장하여 해양영토로 표기했다. 이로서 러시아(1,710만 ㎢), 캐나다(998만 ㎢)에 이어 3위(960만㎢)였던 중국영토가 1,045만 ㎢로 확장되면서 세계 2위의 영토대국으로 상향되었다. 중국의 신표준지도는 대만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이 중요성을 재확인한 한미일캠프데이비드 선언 직후, 그리고 자카르타 아세안 정상회담과 뉴델리 G20 회담 직전에 발표되면서 영토주권의 수호에 대한 의지를 명확히 발신한 것이다.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시진핑 체제의 3연임이 결정되면서 강경한 중국문제가 예견되어 왔다. 2012년 시진핑 체제 출범 이후 부상 이후 중국문제가 본격화되었다. 이전까지 사회주의 시장경쟁, 삼개대표론(三个代表轮, 과학적 발전관 등 국내 문제에 대한 통치이념과 달리 시진핑 체제는 중국의 꿈, 신형대국관계, 일대일로 등 주변 문제와 대외관계를 통치이념화했다.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격대지정의 관행을 파기하고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으면서 연임이 예견되었고,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시진핑 사상)과 2021년 ‘역사결의(历史决议’를 통해 이념적 권위를 강화했다. 중국공산당의 창당(1921)과 신중국의 건국(1949) 등 두 개의 100년을 준비하는 ‘중국의 꿈’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굴욕을 극복하고 중화민족의 부흥을 완성하는 국가이념이다.

 

무엇보다 시진핑 체제의 3연임이 위기를 이념화한 결과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시진핑 사상은개혁개방 이후 성취보다 부상에 수반된 위기를 이념화함으로서 3연임을 역사적 필연이자 정치적결단으로 정당화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부상은 사회경제적인 과제를 수반해 왔다. 비교우위 전략에 따른 대외의존 발전은 도농 간, 산업 간, 지역 간 격차를 심화시켰다. 절대적 빈곤을 해소하는 소강사회를 성취했지만 사회구조적 불균형과 갈등은 심화되었다. 사회적 격차는 중국공산당이영도하는 중국특색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중진국의 함정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중국의 부상은 필연적으로 주변관계를 국제화시켰다. 상호의존 관계에 편입되고 양자, 다자 등의 다자협력에 구속되면서 대외의존 성장만큼 취약성, 민감성도 증가했다.

 

 시진핑 사상과 역사결의는 개혁개방의 성취보다 이에 수반된 과제를 위기로 치환함으로서 시진핑 체제의 3연임을 정당화했다. 시진핑 3연임 이후의 중국체제의 문제를 비관할 필요는 없다. 중국 특색의 정치체제와 동일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한국, 대만, 그리고 55년 체제 이후 자민당의 장기집권은 동아시아의 기적을 이루는 정치적 기반이었다. 부상의 위기에 더해 포스트 코로나 이후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중국에게 시진핑 체제는 권위주의적 효율성을 발휘할 수도있다. 문제는 주변분쟁과 대외관계에 있다. 시진핑 3연임 체제는 중국의 핵심이익으로 강조해온대만, 동중국해, 남중국해 분쟁에 공세적 수사(assertive rhetoric)를 넘어 강압적, 군사적 수단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근대 질서의 모순과 해양안보

 

국가주권과 영토는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근대질서를 구축하는 핵심 요소였다. ‘국가는 전쟁을 하고, 전쟁은 국가를 만든다’는 찰스 틸리(Charles Tilly)의 명제는 곧 ‘국가는 주권과 영토를 위해 전쟁하고, 전쟁의 결과 주권과 영토가 확정된다’로 환언된다. 영토주권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갈등은 영토와 주권을 확정하지 못한 근대전쟁의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서구는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근대적인 국가주권과 영토를 획정했다. 근대 서구에서 형성된 영토분쟁의 국제법적 해결은 승전국이 영토와 주권의 전후질서를 재편했던 협상과 조약에서 기원한다. 

 

동아시아의 근대질서는 서구의 과정과 다르다. 수 천년 동안 지속된 위계적인 중화질서는 동아시아에서 영토, 주권을 위한 전쟁을 억지했다. 아편전쟁 이후 중화질서가 붕괴되고 이어진 중일전쟁, 러일전쟁,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배,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은 근대적인 주권과 영토질서를 재편하는 기회가 되지 못했다. 영토와 주권을 확정하는 전후 질서가 동아시아의 당사국이 아닌 외세의 개입과 중재, 타협에 의해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역내 국가가 동의하지 않은 근대질서는 전통적 주권과 근대적 질서의 모순에서 비롯된 해양안보 분쟁의 기원이다.

 

서구의 침략과 중화질서의 붕괴를 치욕의 역사로 기억하는 중국에게 근대는 역사적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신해혁명 이후 장개석이 제작한 중화국치지도(中华国耻地图는 1947년 국민당 정부가 중국영해를 주장하는 11단선의 기원이다. 1951년 남북은 물론 중국과 대만이 참여하지 않은 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전통질서와는 다른 영토주권이 구획되었다. 1953년 중국공산당은 베트남 연안의 2개선을 제외한 9단선을 그어 중국영토를 주장했다. 안전보장을 우선해야 했던 냉전시기 영토주권의 갈등은 냉전적 타협에 따라 관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69년 미일공동성명이 한국조항, 대만조항을 포함하면서 중국의 반발을 초래했지만, 1972년 미중 데탕트와 일중수교에서 하나의 중국을 인정(acknowledge)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협력을 우선하되 갈등적인 현안에 대해서는 지혜로운 후세대의 해결을 기대하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실용적인 타협이 가능했다.

 

그러나, 미소냉전의 종식과 탈냉전의 평화는 역설적으로 동아시아의 냉전적 타협을 갈등으로 전환시켰다. 분단체제와 영토주권에 대한 중국의 타협도 폐기되었다. 1992년 중국은 ‘영해 및 접속수역법(영해법)’을 발표하고 영토주권에 대한 제도적 현상변경의 ‘의지’를 발신했다. 1992년 제7차 전인대에서 통과된 영해법은 1958년 영해선언, 1983년 해상교통안전법과 달리 대만은 물론 조어도, 동중국해의 9단선을 중국영토로 명시했다. 영해법은 장쩌민 체제로의 권력변동과 함께 30년의 협상을 거쳐 1982년 199개국이 가입하여 1994년발효를 앞둔 유엔해양법(UNCLOS)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중국의 최초 총통선거를 앞둔 1996년에는 군사적 현상변경 ‘능력’을 과시했다. 1954년, 1958년의 제3차 양안위기와 달리 중국은 핵실험을 포함하여 중거리탄도미사일, 공해전투,상륙전투 훈련을 감행했다. 

 

2000년 첸수이벤 총통 집권이후 대만화의 정치가 확대되는 가운데 중국은 2005년 ‘반분열국가법’(반분열법)을 제정했다. 반분열법은 하나의 중국, 일국양제에 대한중국공산당의 선언적 목표가 처음 법제화되었다는 의미와 함께, 비평화적 수단이 통일수단이 될 수 있음이 명시되었다는 점에서 전환적이다. 시진핑 체제 출범 이후 남중국해에 12개의 군사기지를 건설한 데 이어 육상과 해양을 포괄하는 일대일로(一带一路)전략을 통해 세력권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더구나, 시진핑 3연임을 결정하는 20차 당 대회 직전 펠로시 하원의장의 방문으로 촉발된 중국의 공세는 앞선 양안위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양안 중간수역, 대만 근해는 물론, 대만영공을 통과하는 탄도미사일이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을 침범하는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감행했다. 중국의 강경한 의지와 능력과시에 미국은 과거와 달리 항공모함이나 군사력을 전개하여 개입하지 못했다.

 

일본과 미일동맹의 해양안보전략

 

탈냉전 이후 역사적 영토주권에 대한 중국의 공세적인 해양전략은 일본의 안보전략과 미일동맹을 재편하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냉전시기 평화헌법에 구속된 일본의 안보전략은 전적으로 미일동맹에 의존했다. 전후 최초로 발표된 76년 방위대강은 전수방위 전략을 정립했지만, 일본본토에 대한 침략사태에 대응하는 최소한의 방위력을 구축하되 미국의 증원전력에 의존하는 한 방위전략이었다. 1995년 ‘76년 방위대강’을 대체한 ‘95년 방위대강’은 양안 갈등, 북핵 위협 등 일본의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주변사태를 안보화하고 이에 대응하는 안보전략을 정립했다. ‘95년 방위대강’을 근거로 1997년 개정된 미일 방위협력지침은 미일동맹의 임무를 일본에 대한 침략사태에서 주변사태로 확장했다. 전후 최초로 미일동맹의 임무가 일본본토에서 주변사태로 확장된 것이다. 그리고 95년 방위대강과 97년 방위지침의 원칙은 1999년 주변사태법으로 법제화되었다. 주변사태법은 양안분쟁과 북핵문제를 일본의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영역으로 포함하되, 대만과 북한을 명시하지 않은 ‘상황적 주변’으로 규정했다. 자위권의 범위도 미군의 무력과 일체화하지 않은 후방지원으로 제한했다. 

 

해양안보의 안보화와 평화헌법의 제약이 공존하는 모순은 2003년 무력사태법이 제정되면서 해소되었다. 무력사태법은 무력공격사태와 무력공격이 예측되는 사태로 구분하고, 무력공격 발생 및 임박사태의 경우 자위를 위한 무력행사의 권한을 명시함으로서 무력사용의 제약을 해소했다. 그리고, ‘04년 방위대강’을 근거로 무력공격이 예측되는 사태에 대비하여 정보능력, 거부능력 등의 방위능력 강화가 추진되었다. 2005년 SCC공동성명은 97년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사실상 재편했다. 무력공격은 물론 무력공격이 예측되는사태를 포함하여 주변사태에 일본이 스스로 방어하고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구축하고, 미일안보체제는 주변사태를 억지하는 병력을 유지한다는 탈전후 방위전략의 목표와 능력이 명시되었다. 아베 시기 일본의 안보개혁은 털냉전 이후 주변사태, 침략사태를 안보화, 군사화한 탈전후 안보이념과 전략을 계승한 것이다. 아베내각은 본토방어 중심의 전수방위 원칙을 동적방위력, 다차원통합방위력으로 변경하고, 정책기구, 정보전략, 방위전략은 물론 2015년 미일 방위협력 지침을 개편했다. 

 

그리고 아베구상에서 시작되어 아베-트럼프 시기 인태지역의 4자 협력체제로 구체화된 인태전략은 바이든 행정부에서 쿼드 플러스(Quad Plus)로 계승되어 미국 주도의 동맹 네트워크로 재편되고 있다. 아베 개혁을 계승한 기시다 내각의 안보전략 목표와 능력은 더욱 명확해졌다. 2021년 미일 정상회담에서 1969년 사토-닉슨 선언 이후 처음으로 대만조항이 포함된 데 이어, 이후 능동적 사이버안보전략(2021), 적기지 공격능력 보유한 명시한 국가안전보장전략(2022), 우주안전보장구상(2023)은 잠재적, 명시적으로 주변분쟁, 해양안보에 대응하는 일본의 안보전략 목표가 명시되었다.

 

한국의 인태전략과 해양안보질서

 

시진핑 체제 3연임 이후 해양영토 주권에 대한 발신과 현상 변경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는 가운데 윤석열 정부가 한국의 인태전략을 발표했다. 한국의 인태전략은 1990년대 일본, 2000년대 미일동맹의 해양안보협력이 한미일 협력으로 재편되게 되었다. 더구나 2023년 8월 캠프데이비드 원칙에 ‘대만조항’이 포함되면서 한국도 인태지역 해양안보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stakeholder)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탄소배출, 불법어업, 재생에너지 등의 워킹그룹에 참여하는 범위에서 인태전략에 협력했다. 반면,윤석열 정부의 인태전략의 목표는 명확하다. 자유, 평화, 번영의 인태지역 비전하에 규범과 규칙에 기반 한 인태지역 질서구축 목표가 제시되었다. 2022년 캠프데이비드 원칙에는 인태국가로서국제법, 공동의 규범, 그리고 공동의 가치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자유롭고 열린 인태지역의 증진을 위해 한미일의 협력 원칙이 명시되었다. 한미일 3국은 ‘힘의 의한 또는 강압에 의한 어떠한 일방적 현상 변경시도에 강력이 반대하며 양안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필요하다는 전략적 이해가 명시되었다.

 

명시적, 암묵적으로 중국, 인태지역의 해양안보를 목표로 추진되고 인태전략에 한국이 참여하게 되면서 한중은 물론 남북 간의 전략적 갈등이 심화될 것이다. 미중 관계, 그리고 영토, 주권 등의 지역현안에 끼인 중간국(in-between powers)인 한국이 인태지역의 해양안보에 기여할 수 있는 전략구상은 무엇인가?

 

첫째, 북핵문제가 한미일 안보협력의 목표임을 명시하되, 양안 문제의 경우 평화적 해결이라는 전략적 발신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 한일 및 한미일 안보협력은 중국에게 가장 불편한 전략적 불균형이다. 한미일 안보협력으로 동맹의 비대칭이 심화되면 고립된 권위주의 체제인 북중러 3국의 협력을 압박하여 북중러-한미일의 삼각동맹의 구조화를 촉발시킬 수 있다. 중국을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과 관계개선의 건설적 관여자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한일, 한미일의 협력이 북핵 위협 대응에 국한된 협력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둘째, 포괄적, 초국가적 해양안보 현안에 대한 다자협력에 있어 한국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 영토주권이라는 동아시아 해양안보 현안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해양안보는 해상교통로 안전, 해적퇴치, 해양오염, 불법어업, 기후변화 등의 포괄적 이해가 결부되어 있다. 중국을 안보화하는 안보협력 우선하여 초국적, 포괄적 해양안보 현안에 대한 소다자, 다자협력의 제도화를 적극 주도할 필요가 있다. 

 

셋째, 중국의 일방주의를 억지하고 해양안보의 다자협력을 증진하는데 있어 한일협력을 모색하는 일이다. 미국이 주도하고 한국, 일본, 인도, 호주는 물론 유럽 각국이 각각의 전략적 목적에 따라 추진하고 있는 다원적인 인태전략은 부상 이후 중국의 일방적 현상변경을 억지하기 위해서다. 한일은 해양안보는 물론 가치, 제제, 제도, 인권, 규범 등 다원적인 인태전략의 목표를 공유하는 구심점이자 조력자이다. 한일이 아세안,인태지역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하면 한일협력은 인태전략의 기러기 효과를 강화할 수 있다. 공적안보지원(OSA)는 물론 경제협력, 인권증진, 비전통안보 등의 지역협력에서 경쟁적 관여가 아닌 협력적, 상보적 관여를 위한 정책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포괄적 세력권을 둘러싼 미중경쟁에서 지정학, 체제적 이해를 공유하는 한일협력은 미중 갈등을 중재하고 포괄적 해양안보를 위한 중간국(in-between powers)의 협력을 주도하는 구심점이 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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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세종연구소가 발간한 [정세와 정책 2023년 11월호 제57호(통권 368호)]에 실린 것으로 연구소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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