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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50>시를 어떻게 쓰고, 읽을 것인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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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8월12일 16시40분
  • 최종수정 2023년07월13일 11시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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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어느 시 잡지사에서 40여 명의 시인들에게 <시는 무엇입니까>하는 물음을 주고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 시에 대한 생각을 쓰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에 대한 논리적 답변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시인들이 체험을 통해 도달한 각자의 생각을 말해달라는 것이었지요. 그 자리에서 내가 한 답변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국어사전엔 ‘의미’로 단순화된 말들이 그득히 갇혀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원래 말이 지닌 자율적 영역을 극도로 제한해서 쓰고 있다. 국어사전이 ‘말들의 감옥’인 이유이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 시란 어떻게 하면 국어사전과 다르게 ‘말’들을 운용하느냐의 문제이다. 시란, 때 묻은 ‘의미’를 떨쳐낸 ‘최초의 눈’이 되어 ‘눈 시린 최초의 사물’을 ‘보는 일’이며, 그렇게 ‘본 것’을 ‘언어’의 ‘틀’로 옮겨내는 일이다. 아, 최초의 눈이 되어 최초의 사물을 만나는 설레임. 거기서 쪼개지고 부서지면서 일렁이는 감각과 직관의 세계, 혹은 광막한 우주의 무한천공에 펼쳐진 비교록(秘敎錄)의 내용을 가능하면 더 많이 훔쳐내는 일이다.

 

시는 결국 ‘말’을 사용하는 방법이고, 시적인 대상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말’을 국어사전 식으로 우둔하고 몽매하게 쓰려고 하는 습관적 타성과, 그런 타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 시를 쓰게 하는 본바탕이라는 것입니다. ‘말’을 국어사전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의미와 느낌으로 다가서면 거기 ‘쪼개지고 부서지면서 일렁이는 감각과 직관의 세계’가 있습니다. 결국, ‘시어’는 언어와 지시 대상과의 관계를 최초의 자리로 되돌리려 한다는 말입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얘기를 단순화시키면 요즘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일상의 언어’를 ‘의미전달의 언어’로 그리고 제가 지금 강조해서 ‘시의 언어’라고 지칭하는 언어를 ‘감각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일상의 언어’를 ‘생활의 언어’로 사용하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뜻을 합의해 통용합니다. 국어사전에 규정된 내용대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국어사전의 용법대로 사용하니까 말을 주고받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습니다. 반면, ‘시의 언어’는 ‘발생기의 언어’, ‘신화적 언어’, ‘주술적 언어’등으로 바꿔 부를 수도 있는 것으로서 그 말이 포용하는 범위가 크고 너른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시의 언어’는 그 용법이 확정되지 않은 것이어서 다양한 감각과 의미를 담고 있게 마련이고 발화자의 문맥을 수신자(독자)가 스스로의 감각과 상상력을 동원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전달이 지연되는 대신 아름다움과 감동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게 굳어져 버려서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의 타성’ 속에 구속되어 살고 있습니다. ‘말의 폭력’이요 ‘말의 억압’인 셈이지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최근에 저는 남쪽 지방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저물녘이었고 실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막 피어나기 시작한 연초록 신록의 산 하나를 품어 안고 있는 호수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모처럼 삶의 곤곤함으로부터 떠나서 가슴 한켠이 촉촉이 적셔져 오는 아련한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풍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국어사전은 그런 ‘호수’를 ‘사면이 육지로 싸이고 물이 괸 곳’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은 제가 여행 중에 만났던 ‘아련한 그리움의 감각’과는 전혀 관계없이 ‘사면이 육지로 싸이고 물이 괸 곳’이라는 무뚝뚝한 의미 규정을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때 내가 그곳에서 느꼈던 것은 ‘호수’란 말의 사전적 의미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내 개인적 판단으로 말씀드린다면 그날 그때의 안개-저물녘에 연초록 산비탈의 그림자를 드리운 옅은 안개의 물결- 그것은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본 ‘아름답고 예쁜 이모’의 얼굴 모습이었습니다. 늘 웃는 모습으로 때 묻은 저를 씻겨주고, 업어주곤 하시던 ‘인선이 이모-실제 그분은 지난 2월 작고하셨습니다만-의 청초하던 처녀 적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었습니다. 

 

가령 제가 그때 거기서 본 ‘저물녘에 연초록 산비탈의 그림자를 드리운 옅은 안개의 물결’을 무뚝뚝하고 퉁명스런 ‘호수’란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인선이 이모’라고 부른다면 그때 거기서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며 아름다움과 그리움이 살아 움직이는 ‘감각의 언어’가 태동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인선이 이모의 저문 물결 위로 열일곱 열 여덟 적 연초록 산비탈이 드리워진다>고 노래할 수도 있게 되겠습니다. 이런 ‘말하기’는 사전적, 의미지향적 언어 용법으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새롭고 참신한 감각과 상상력의 신천지를 열어주는 놀라움의 언어 용법입니다. 

 

이런 놀라움의 언어 용법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저물녘에 연초록 산비탈의 그림자를 드리운 옅은 안개의 물결’을 <호수>라는 관념어와 연관지어 생각하게 하는 끈질긴 언어 관습입니다. 그러니까 시의 말(언어)은 ‘말’과 그 ‘말’이 지시하는 대상을 고착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말’과 그 ‘말’의 ‘지시대상’을 분리하는 일, 그 ‘지시대상’이 지니는 감각을 새로운 ‘말’(예를 든다면 ‘인선이 이모’)로 불러내는 것, 그것이 시의 본질인 것입니다.

 

시는 상상력과 감수성을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매우 섬세하고 비밀스러우며 신비하기까지 한 세계를 노래합니다. 세상 만물이 나와 이어져 있고, 언제나 내가 소통의 문을 열면 나와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하늘에 뜬 흰 구름, 고추잠자리 한 마리, 상수리나무 한그루, 바윗돌 한 개, 갈매기 한 마리, 도심의 횡단보도 ... 이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해서 친교의 손을 내밀고 대화를 나누길 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저 사람을 위해서 소용되는 수단이나 도구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나 애인으로 ‘거기 그렇게’ 있는 것들입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누가 와서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다음으로 시는 그렇게 ‘발견한 새로운 세계’를 형태로 바꾸어 나타내려 한다는 점이 퍽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 아주 고독한 사람, 처절해서 견딜 수 없게 고독한 사람이 있어서 그런 심회를 시로 써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는 어느 시인은 그런 심회를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고 노래합니다. 그는 그가 느끼는 ‘처절한 고독’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고향에 돌아와서도 어쩌지 못하는 고독을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고 노래하고 있고 그 방이 문으로 가리워지지도 못한 채, 우주로 열려져 있고 바람이 불어와 그 ‘백골’을 깎고 간다고(풍화작용) 합니다. 말하자면 고독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고독의 형태’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여실한 상상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지요. 시의 이론에서는 이런 표현을 ‘형상화’라고도 한답니다.

 

다음으로 시의 감상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시를 감상하는 일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일과 같을 수는 없지요. 한 곡의 팝송을 듣는 일과도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시를 감상하는 데는 그 시를 옳게 받아들일 옳은 수신 코오드가 필요한 것이며, 능동적으로 접근해가는 조심스런 열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 편의 시를 불과 1분 이내의 짧은 시간에 읽고 충분히 감상했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 편의 좋은 시가 지니고 있는 내재적 함축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편의 시에 담긴 단절과 비약, 생략의 효과를 이해하며 운율과 음성 요소들의 고향 효과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내재되고 은폐된 이 모든 장치들을 주의 깊게 밝혀 가며 시의 표현 의도들을 감상해가는 시의 독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이 시가 어떤 주제를 노래하고 있는가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이 시가 쓰여진 시대적 배경과 시대를 살펴서 이 시를 감상하려 할 것입니다. 시가 현실의 어떤 부분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가 독자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고 있는가를 감상하려는 사람은 이 시가 독자들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을 살피면서 이 시의 가치를 평가하려 할 것입니다. 이 시가 시인의 어떤 내면을 표현한 것인가를 알려는 사람들은 그 시를 쓴 시인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시는 시인의 전 인격이 표현된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 시에는 그 시를 쓴 시인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인의 출생으로부터 성장 과정, 독서 내용, 교우관계까지 알아보려 합니다. 그리고 시의 짜임새나 구조를 살펴보려는 사람들은 시를 하나의 언어 구조물로 객관화시켜 정밀하게 분석하려 할 것입니다. 한 편의 시는 그 시를 이루는 언어만이 실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 편의 시에 도달하기 위해 접근해 갈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 편의 시를 바로 읽는 것은 미개지를 찾아가는 신비한 탐험과도 같습니다. 발견의 환희는 힘든 탐험을 마치고 목적지에 도달한 사람의 차지입니다. 그리고 이 탐험가에게 있어서,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의 온갖 신비한 체험은 무엇보다도 한 편의 시를 읽는 보람 그 자체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 편의 시를 옳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한 편의 시속에 담아내혀하는  창작 의도를 이해해야하며 그런 창작의도를 구체화하기 위한 표현 전략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시인은 시 속에 담아내려는 표현의도를 생짜 말로 나타내고 있지 않습니다. 시인이 시 속에 은폐 시키고 함축시켜놓은 진짜 표현의도를 찾아가는 시어의 탐색과정이야 말로 시를 즐길 수 있는 그 자체입니다. 자세히 보고 깊게 볼 때 진짜 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시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접근해 가는 친화의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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