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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47> 절대적 양심 앞에 선 수난자의 초상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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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7월01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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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윤동주는 그가 지향하고자 하는 절대적 양심과 실제적 자아가 처해 있는 현격한 편차를 지속적으로 노래해 보여준 시인이다. 그는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 도달점으로 ‘절대적 양심’(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을 설정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평생을(‘죽는 날까지’)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삶의 목표’를 철저히 지켜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도 윤동주는 그렇게 설정한 삶의 절대적 목표를 적당히 버리거나 적절한 높이의 것으로 낮추거나 조절하지 않았다. 이점이 윤동주의 시를 옳게 이해하기 위해 숙지해야 할 키 포인트일 것이다.

 

  사람이 평생토록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윤동주 시인은 쉼 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불가능의 삶의 목표에 닿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한다. 그곳에 도달할 수 없는 현실 속의 자기를 쉬임없이 번민하면서 ‘불가능’ 속으로 자신을 몰아가고 있다. 윤동주의 시가 ‘그리움’의 시이며 ‘슬픔의 시’이고 ‘죄스러움’ ‘죽음의 시’인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절대적 양심과 실제적 자아 사이에 존재하는 이 ‘현격한 괴리’는 그러나 그가 절대적 양심을 상대적 양심으로 재조정하거나 그런 절대치에 도달하려는 신념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적당히 타협하려 했으면 쉽게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윤동주는 강한 정신으로 번민 속으로 접근해갔으며,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선명한 인식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는 강한 신념으로 양심을 지켜 살려는 의욕을 시로 실천하려고 노력한 시인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강한 신념은 확고한 가치를 토대로 하는 것이고 양심은 그것을 수호하기 위한 자아의 판단 기준인 셈이다. 그런데, 정제된 사회, 가치가 확고하게 정립된 사회에서 양심과 신념을 지켜 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치가 혼란된 사회의 내부에서 양심과 신념을 지켜 살려는 자아는 엄청난 좌절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시인이 감내해야 할 가치혼란의 주체가 부정한 지배 권력이고 그 속에서 자기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면, 시인은 형극의 길을 걸어갈 각오가 필요하게 된다. 윤동주는 그런 경우였던 것이라고 판단된다.

 

 하늘 앞에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간구하는 이 시의 화자는 스스로 형극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늘’이라는 절대 가치 앞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골라 딛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더구나, ‘죽는 날’까지 평생을 절대적 양심의 구현자로 살아가기를 천명하고 있는 그의 선택은 모진 시련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모진 시련의 길에서 신념을 구현하고자 하는 이 시의 화자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 했다’고 술회하는 감성적이며 서정적인 인물이다. 이 서정적 화자가 스스로 형극의 길을 선택한 것은 절대적 양심에 도달하려는 신념 때문이다.

 

‘하늘’은 어떤 파멸에도 침윤되지 않은 온전한 모랄리티를 상징한다. 즉 이 시인이 바라마지  않는 부끄럽지 않은 삶의 전범이 되어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간절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고있다. 바람에 스치우는 별은 수난자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즉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켜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양심의 수난자’의 모습인 것이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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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7월01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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