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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45> 유리병 속의 시(詩)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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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6월10일 16시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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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절해고도 무인도에 혼자 남겨져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사람이 있고, 이 위기의 사람이 자기를 구해줄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다고 하자. 그는 그 편지를 유리병 안에 넣고 단단히 막은 다음 썰물 때에 어딘가로 띄워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띄워 보낸 유리병 편지가 오대양 육대주의 곳곳을 떠돌다가 누군가에게 수습이 되고, 편지에 쓰인 주소지를 찾아 원 수취인에게 전해진 희귀한 예도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어느 ‘유리병 편지’는 45년을 바다에 떠돌다가 편지의 실제 수취인에게 전달된 예도 있다. (국민일보 2023. 5. 16. “유리병에 넣어 바다에 띄운 편지, 45년 만에 주인에게”) 

 

최근, 나는 오래 전에 국내에서 번역 소개된 바 있는 얄팍한 번역 시집 한 권을 읽었다. 『유리병 속의 편지- 뿌리 뽑힌 유대인의 큰 노래(Grober gesang vom ausgerotteten jüdischen volk』 / 이작 카체넬존( Katzenelson, Jizhak 1886~1944) 지음, 전영애 옮김. 한마당.1999-

 

이 시집은 가스실에서 죽은 한 유대인이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의 처지와 심경과 세상에 남기기 위해 쓴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쓴 서정시집이다. 

 

 시인이 시시각각 닥쳐오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쓴 이 시의 원고는, 그가 가스실에서 죽은 뒤 아우슈비츠에 갇힌 나머지 사람들의 노력으로 어렵게 보존되어 1945년 파리에서 간행되었다.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Ghetto)에서 봉기를 일으켰던 유대인들은 머지않아 자신들이 직면하게 될 죽음의 위기를 직감하고 자신들이 죽고 난 뒤 그들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후세에 전해 주기를 원했다. 그들은 시인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들이 겪는 수난을 시로 써줄 것을 당부한다. 

 

 이작 카체넬존(1886~1944)은 죽음에 직면한 위기의 순간들을 깨알같이 베껴 시집 여섯 부를 만들었다. 1943년 10월부터 1944년 정월까지 그는 시를 썼고, 그러다 그가 소지하고 있던 위조 여권이 발각되어 1944년 5월 1일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었다. 죽은 시인이 남긴 원고는 남은 사람들에 의해 유리병에 넣어 수용소 마당의 전나무 뿌리 밑에 묻혔고, 얇은 종이에 6부를 베껴서 여행가방 가죽 손잡이 안에 넣어 꿰맸다. 

 

이 원고 중 일부가 바깥 세상에 전해져 1945년 파리에서 출간되었다. 그런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쓴 이작 카제넬존의 시편들은 잘 다듬어져 아름답고 고운 리듬까지 지닌 시편들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서정 시편들이 참혹한 죽음의 현장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작  카체넬존은 비탄에 빠져 감정의 폭풍 속으로 침잠해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시가 지니는 오묘한 율조와 이미지를 추구해 아름다운 서정의 언어로 절망을 형상화해 보여주었다. 

 

이작 카체넬존은 시의 언어가 가장 본질적인 언어이고 존재를 참으로 구현해 보여줄 수 있는 희망과 구원의 양식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죽음의 목전에서도 시가 인간 영혼에 본질적 감응을 주는 장르라는 점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시인에게 깊은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죽음의 위기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순간 시인은 그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를 아름다운 시의 언어로 적어 후세에 남겼던 것이다. 시의 위대성이 빛을 발하고 있음을 알겠다.

 

“너 노래하라! 저미어진 하프를, 네 벌거숭이 하프를 잡아라, 노래하거라

 

어지러운 현(絃)들 속으로 네 손가락을 넣으라 하나의 노래를 위하여

 

고통으로 부서진 가슴들을 노래하라. 이 유럽에게 아직 노래 들려주라

 

그 맨 마지막 유대인의 위대한 노래를 들려주라”

 

-「첫 번째 노래-1」

 

  

말들은 아무 예감도 없다. 휘어지는 노볼립키 골목을 돌아 착하게 제 갈 길을 간다

 

울타리 쳐진 하역장으로, 거기는 이미 텅텅 비워진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 차량들, 차량들은 우리를 멀리, 멀리 실어간다

 

그리고 내일이면 다시 텅텅 비어서 돌아온다. 더는 말을 못하겠다. 할 수가 없다

 

-「열세 번째 노래-15」 

 

  시인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이 비인간적인 인간 살육의 현장을 증언하는 시편들을 썼다. 그런데, 그가 쓴 시편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쓴 것으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형시로 다듬어져 있고 아름다운 이미저리로 표현되어 있다. 이작 카체넬존은 비탄에 빠져 감정의 폭풍 속으로 침잠해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시가 지니는 오묘한 율조와 이미지를 추구해 아름다운 서정의 언어로 절망의 상황을 형상화해 보여주었다. 이작 카체넬존은 시의 언어가 가장 본질적인 언어이고 존재를 참으로 구현해 보여줄 수 있는 희망과 구원의 양식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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