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78,끝>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 IV. 진정한 복지는 훈민정음<訓民正音> 이다.<下>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6월30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3년06월16일 11시0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

본문

IV.3 훈민정음<訓民正音> 활성화

 

[<운회(韻會)>의 언문 번역작업]

 

세종 25년 12월 30일 훈민정음 창제를 최초로 공개한 후 곧바로 세종은 훈민정음을 활용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운회(韻會)>라는 자전을 언문으로 편찬하도록 했다(세종 26년 2월 16일). <운회(韻會)>라는 책은 한자의 뜻과 발음기호를 설명한 자전과 같은 것으로 중국에서 발간된 책이다. 세종은 이 자전을 언문으로 번역하는 것이 언문 활성화의 첫 번째 단계로 생각하였다. 그렇게 해야만 모든 한자를 통일된 한글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자를 어떻게 발성하여 읽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정확히 알기 위해 세종은 인재를 수 없이 중국에 보내어 현지 발음을 확인하도록 했다. 여기에는 집현전 학자들이 대거 동원됐다.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가 그들이었다. 이 때 하위지는 언문 반대파에 속해 있었고 성삼문은 성균관 주부로 있었으며 조금 뒤 세종 27년 1월 운서에 대한 질문을 하기 위해 신숙주와 함께 요동으로 가게 되면서 언문작업에 적극 동참한다. 결국 사육신 중 세 명이 <운회> 편찬에 참여한 것이다.

  

이 <운회>의 한글화 작업은 곧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편찬으로 집대성된다. 세종 29년 9월 29일, 그러니까 훈민정음 반포 1주년 되는 날 동국정운이 완성된다. 신숙주가 쓴 <동국정운>서문을 보면 이런 글이 있다 ; “성인의도가 서책에 실려 있으니 성인의 도를 알려면 글의 뜻을 먼저 알아야하고 글의 뜻을 알기위해서는 성운(발음,聲韻)을 알아야 한다(聲韻 乃學道之權輿也). 따라서 성운은 곧 도를 배우는 시작이므로 어찌 쉽게 능통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 성상께서 성운에 마음을 두시고 고금을 참작하시어 지침을 만드셔서 억만 대 모든 후생들의 길을 열어주신 까닭이다.” 신숙주의 서문에도 세종의 한글 창제의 진정한 의도가 엿보인다. 즉, 글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발음(성운)을 알아야하고, 발음을 정확히 하기위해 <운회>나 <동국정운> 같은 운서를 서둘러 편찬해야했던 것이다.    


[형사 고발장의 언문화 몸소 시도]

 

그 다음으로 세종은 일반 서무를 언문으로 옮기는 것을 시도했다. 수백 년 동안 모든 문서가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나 이제 세종은 이를 언문으로 기록하는 것을 시도한 것이다. 그때 마침 대간(사헌부와 사간원을 합하여 부르는 말)이 죄를 지었다. 대간이 세종의 불교 옹호 정책을 비판하며 따졌다. 성명하신 임금이 어찌 미혹하여 불경을 읽고 불사를 거행하는 것이냐고 다그쳤다. 불경에 금박을 입히고 절간은 휘황찬란하게 사치하며 곡식과 재물을 낭비할 수 있냐는 것이 대간(특히 정창손)의 비판이었다. 세종이 대노했다고 <세종실록>은 기록했다. 특히 앞에서는 불사나 불경을 읽는 것이 문제가 없다고 해 놓고서는 뒤에서 불사를 지탄하는 대신과 선비를 심하게 경멸했다.

 

   “내가 명색이 백성과 신하를 사랑하는 임금이 되고자 마음을 다스려 왔  

    으니 당연히 곧고 바른 길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먼저 임금을 속일 생각  

    을하고 저같이 간사하게 아첨하는 못난 사람을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임금과 신하가 의로움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므로 길이 같지 않으면 당  

    연히 떠나는 것이니 나와 뜻이 같지 않아 떠난다고 하면 내가 무슨 말 

    을 하겠느냐. 신하가 임금을 저렇게까지 속이는데 어찌 내가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이냐. 단지 이단의 일로 간하는 신하를 문책했다는 말로 여러  

    사람들이 의심할 수는 있겠으나 그 혐의를 피하기 위해 문책하지 않는  

    것은 현자가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비록 덕은 부족하지만 임금이 되어  

    간사하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을 많이 보았다. 혐의를 벗으려고 죄를 주  

    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을 사랑하고 악을 증오하는 정치를 한다고 하겠  

    는가. (予謂人臣愛君 欲格君心 當以直道行之 而先懷詐諼以欺君 如此憸小  

    不肖之人 吾不能容也 君臣以義合 故道不合則去 若以予爲不合 引身而去  

    則予何言哉 人臣而欺君至此 其可容忍乎 但因異端之事而罪諫臣 衆必疑之  

    然避嫌賢者不爲 予雖不德 旣爲人君 見姦詐不直之人 欲避嫌而不之罪 則  

    其可謂好善惡惡之政乎 : 세종 28년 10월 9일)”

 

세종의 불공을 비판한 신하를 모두 의금부로 보냈는데 사헌부에서는 집의 정창손과 장령 강진, 지평 조욱 유맹부, 그리고 사간원에서는 우사간 변효경, 지사간 정지담, 헌납 원내인, 박윤창, 정언, 윤배, 김통 등 10명이었다. 세종은 이들 죄인의 죄를 직접 일일이 언문으로 써서 의정부와 승정원에 보냈다. 마침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 등이 대간을 풀어주기를 간청해 올리자 직접 언문으로 쓴 죄목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범한 것이 이런데 어떻게 죄가 안 되는가. 

    (所犯如此 其不罪乎 : 세종 28년 10월 10일)”

 

수양대군도 대간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믿지만 언로를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좋겠다고 글을 써서 세종에게 가지고 갔다. 세종은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갇힌 10명 중 강진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곧 풀어주었다. 정창손과 유맹부와 조욱은 좌천되었고 강진은 고신(자격증)을 빼앗겨 관직을 박탈당했다. 강진은 문종 때 와서야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단종 1년에 사육신 유성원과 함께 사헌부 집의로 승진하였다.


[<사서(四書)>(<論語><孟子><大學><中庸>)의 언문 번역] 

 

세종은 세종 30년(1448) 3월 경상도 상주에 가 있는 김구를 불렀다. 김구는 상주목사가 된지 6개월 밖에 안 되었지만 급히 서울로 소환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사서(四書)>를 언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이 일은 원래 김문이 해 오던 일이었는데 김문이 며칠 전 죽었으므로 집현전의 추천을 받아 후임으로 김구를 임명한 것이다. 세종은 중요한 언문 번역 작업을 맡은 김구에게 판종부시사(정삼품)를 제수하였다.

 

<맺음말>

 

백성이 국가의 근본(民維邦本)이므로 인재를 중요시하여(爲政人最) 어진 정치를 펴겠다(施仁發政)던 세종의 취임약속은 재위 31년 6개월 동안 한 치의 착오나 어김없이 지켜졌다. 계속되는 가뭄에 굶어 쓰러지는 백성을 일으켜 세우고 또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외적을 방어하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항상 백성의 고통을 염려하고 억울함이 없도록 관심을 기우렸다.

 

세종의 바른 정치의 근본이 되는 정신은 ‘하늘을 우러러 보는 두려움(畏天)’이다. 가뭄이나 수해와 같은 재해는 세종의 잘못된 정치에 대한 하늘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항상 스스로 신중하며 자신을 돌이켜보아 반성하는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세종은 항상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해서 들었다. 의정신하들에게 물어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국에 퍼져있는 관료들이나 재야선비들에게 수시로 정책을 자문했으며 과거시험에 국정과제를 직접 출제하기도 하였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공무원들이 본받고 자기의 직책과 사무를 남에게 미루지 말고 직접 처리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본인도 중대한 국사를 직접 챙기고 면밀히 주도했다. 1,2차 파저강 전투는 세종이 장수의 선발에서부터 필요한 전투물자의 확보와 작전개시일자와 진군경로와 교량부설과 전공포상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밀한 부분까지 직접 챙기면서 작전을 수행했다. 새로운 땅을 찾는 문제나 북방에 6진과 4군의 설치할 때에도 세부사항을 일일이 확인하고 지시하였다. 공법, 수령육기법, 부민고소금지법, 호패법, 지방행정체계 개편, 토지개혁, 화폐개혁 등 중요 국정과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세종이 직접 주도하여 수립해 나갔다. 중요 국정을 세종이 직접 챙긴 이유는 둘이다. 하나는 백성의 안위가 걸린 국사를 왕이 소홀하게 다룰 수 없다는 책임감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종이 챙기지 않으면 신하들도 마음을 다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백성에 대한 세종의 연민, 특히 환과고독 피륭잔질로 대표되는 소외계층에 대한 세종의 관심과 사랑은 그들에 대한 복지정책이 ‘국가의 의무(王政所當哀矜)’라는 선언에 잘 드러나 있다. 세종은 노인에 대한 우대가 중요하다고 믿었다. 장수를 누리는 자들은 하늘의 가호가 있어 그런 것이므로 그들을 우대하고 경로하는 것은 왕과 국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효제충렬(孝悌忠烈)과 의절효순(義節孝順)은 국가의 근본 기강이요 교육의 핵심이라 확신했다.    

  

세종이 시도한 모든 정책이나 입법이 성공한 것은 아니다. 실패한 것도 많다. 호패법에서 실패했고 또 주화를 도입한 화폐개혁도 실패했다. 새로운 땅(신지,新地)이나 요도(蓼島)도 찾지 못했다. 주군을 병합하여 지방행정 체계를 개편하는 문제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실패한 법이나 제도를 실시하고자 했던 본래 뜻은 백성을 더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 다른 불순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백성을 위한 순수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세종은 실패한 법이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진심,盡心) 성공시키려는 애착과 미련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세종의 바른 정치의 ‘유전자 코드(genetic code)'는 밝혀졌다 : 백성(民), 어짐의 정치(仁), 인재(人才), 하늘에 대한 두려움(畏天)이 그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그런 유전자를 모두 가진 리더를 다시 복제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사방에 숨어있는 진정한 인재를 찾아내어 어진 정치를 펴는 진정한 리더를 다시 복제하는 것이 미래의 선진한국을 창조하는 필수조건이 아니겠는가.

 

9fd6f3a9548dd304c9a8ee99c94653d2_1681965
9fd6f3a9548dd304c9a8ee99c94653d2_1681965
9fd6f3a9548dd304c9a8ee99c94653d2_1681965
9fd6f3a9548dd304c9a8ee99c94653d2_1681965

<참고문헌>

 

김구진-한명기-나종우(2001),세종시대 대외정책, 세종문화사대계 3,

              정치.경제.군사.외교.역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2001)

김영수(2009), 세종대의 법과 정치, 

              정윤재 외(2009),세종 리더십의 형성과 전개, 지식산업사

김종명(2009), 세종의 불교신앙과 훈민정음 창제, 

               정윤재 외(2009), 세종 리더십의 형성과 전개, 지식산업사

김태연(2001), 세종시대의 부세제도 개편, 세종문화사대계 3,

               정치.경제.군사.외교.역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2001)

박병련(2009), 세종조 정치 엘리트 양성과 인사운용의 특성, 

              정윤재 외(2009),세종 리더십의 형성과 전개, 지식산업사

박영규(2008), 한권으로 읽는 세종실록, 웅진지식하우스

박현모(2006), 세종의 수성리더십, 삼성경제연구소

박현모(2008), 세종처럼, 소통과 헌신의 리더십, 미다스북스

박현모(2009), 세종의 사군육진 개척연구,

              정윤재 외(2009), 세종 리더십의 형성과 전개, 지식산업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2001), 세종문화사대계 3, 정치.경제.군사.외교.역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세종장헌대왕실록(1454),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정윤재 외(2009), 세종 리더십의 형성과 전개, 지식산업사               

오종록(2001), 세종시대의 북방영토개척, 

            세종문화사대계 3,정치.경제.군사.외교.역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경식(2001), 세종시대의 토지제도와 농업정책,  세종문화사대계 3,

            정치.경제.군사.외교.역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2001)

이수건(2001), 세종시대의 지방통치체제, 세종문화사대계 3,

            정치.경제.군사.외교.역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재룡(1999), 조선전기 경제구조연구, 숭실대학교

이해철(2001), 세종시대의 대마도 정벌, 세종문화사대계 3,

            정치.경제.군사.외교.역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한우(2006),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해냄

전경일(2006), 창조의 CEO,세종, 휴먼비즈니스

전성호(2009), 세종시대 내부통제 시스템, 

              정윤재 외(2009),세종 리더십의 형성과 전개, 지식산업사

정윤재 외(2010), 세종과 재상 그들의 리더십, 서해문집

정윤재(2009), 세종의 정치 리더십 형성과정, 

              정윤재 외(2009), 세종 리더십의 형성과 전개, 지식산업사

한충희(2008),조선초기 관직과 정치, 계명대학교 출판부

한충희-최승희(2001), 세종시대의 중앙통치체제, 세종문화사대계 3,

              정치.경제.군사.외교.역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끝>

 ​※그동안 '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을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세종 리더십'에 이어 연재할 주제는 '자치통감' 입니다. 앞으로도 그침 없는 성원과 애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자 신세돈 拜>


※참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은 11세기 중국 북송시대의 정치가 사마광이 주도하여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이다. 1065년부터 1084년까지 약 20년간 작업했다.

자치통감》이라는 제목은 다스림(治)에 도움(資)이 되고, 역대를 통하여(通) 거울(鑑)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원 제목은 《통지》(通志)였으나, 송 신종이 광대한 역사를 저술한 사마광을 치하하며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사마광의 작호 온국공(溫國公)을 따서 일명 《온사》(溫史)라고도 한다.

 

 

 

 

3
  • 기사입력 2023년06월30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3년06월16일 11시01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