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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70>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 Ⅰ.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은 국가의 책무이다.<上>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5월05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3년04월20일 20시4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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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I.1 진제의 원칙 : 국가의 책무

 

세종은 즉위한 그해(1418) 11월 내외의 신료들에게 8대 국정 목표를 제시했는데 그 중 네 번째 국정 목표가 사회적 소외계층은 당연히 국가가 보살필 책무가 있다는 선언이었다. 혼자 살거나 병들어 불쌍한 백성들(鰥寡孤獨 疲癃殘疾)은 국가가 상세히 조사하여 살펴야 하며 특히 흉년에는 더 각별히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 교지의 내용이다.   

 

   “환과고독과 병약자들은 당연히 국가가 보살펴야 할 사람이다. 안으로는 한성부와 오부(五部)가, 밖으로는 감사수령이 상세히 조사하여 환상 진제해야 할 것이니 그들을 우선 지급하되 절대로 빠뜨림이 없어야 한다. 또 이번 흉년으로 생업을 잃은 사람이 많아 굶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된다. 각관 수령이 만약 진제를 제대로 못하여 한 사람이라도 굶어 죽어 도랑에 버려진다면 반드시 그 행동을 책망하고 벌을 줄 것이다. 가난하여 혼기를 놓친 여자나 장례를 치를 기간이 지났어도 매장하지 못하는 자는 진실로 가여우니 감사수령이 국고를 지원해서 비용을 보태어 때를 놓침없도록 하라. 혹 부모가 동시에 사망하여 친척이 재산노비를 탐내고 혼인을 못하게 하는 자는 통렬히 죄를 주라.   

    (鰥寡孤獨 疲癃殘疾 王政所當哀矜 內而漢城府五部 外而監司守令 詳加審   

    問還上賑濟 爲先分給 毋致失所 且今適値凶歉 慮恐失業之民 或値飢饉 各  

    官守令 如有失於賑濟 匹夫匹婦 餓莩溝壑 定行責罰 貧乏之家 有嫁年己過   

    以不能婚嫁者 有葬期盡 以不能埋葬者 誠可哀悶 監司守令官給資糧 以助  

    支費毋致失時 或父母歿而同産一族 利於全執奴婢財産 不肯婚嫁者 痛行科  

   罪 : 세종 즉위년 11월 3일)”

 

세종은 소외계층에 대한 돌보기를 국정의 기본 원칙과 목표의 하나로 삼아 깊은 인과 넓은 덕으로 정치를 펴서 백성들의 마음에 흡족하게 하고 싶다고 했다. 이 정책 목표를 들여다 보면 거기에는 몇 가지 원칙을 읽을 수 있다. 

 

   첫째로, 진제 혹은 구제의 대상이 되는 백성은 홀아비(鰥),과부(寡),고아(孤), 독거노인(獨)과 같은 신분적약자와 피(疲),융(癃),잔(殘),질(疾)과 같은 병약자와 장애인, 그리고 나아가 실업자와 혼기를 놓친 여자와 장례를 못 치르는 사람과 같은 경제적 약자를 국가의 지원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피(疲)란 고달픈 사람을 말하고 , 융(癃)이란 곱사와 같은 신체장애자를 말하며, 잔(殘)이란 병약한 사람이고, 질(疾)이란 환자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국가의 구제 대상이 되는 사람은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모든 신분 신체 및 정신장애자를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둘째로, 이들 구제 대상자는 당연히 국가(왕과 의정부)가 불쌍히 여기고(왕정소당애긍,王政所當哀矜) 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무를 담당하는 한성부나 감사수령은 물론 중앙의 왕과 정부가 모두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셋째로, 구제 정책 당국, 즉 서울은 한성부와 오부, 지방은 각관 수령과 감사가 상세히 조사하여 우선적으로 이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혹은 경제적 약자가 적극적으로 신청해서 구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구제를 하는 쪽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상세하게 조사하여(상가심문,詳加審問) 구제 곡식을 우선 지급하고 절대로 빠뜨림이 없어야 한다고 지시하고 있다. 특히 가뭄이 심하므로 굶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유념해야 하며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면 반드시 책임을 묻고 벌을 주겠다(정행책벌,定行 責罰)고 했다.

      

I.2 기아의 실태와 백성에 대한 연민

 

[끔찍한 기아]

 

세종이 임금으로 있는 동안 가뭄과 자연재해는 유난히 심했다. 많은 사람이 굶고 병들고 죽어갔다. 가뭄이 유난히 심했던 세종 18년과 세종 26년 사이의 9년 동안에 특히 많은 사람이 죽거나 병들어 희생되었다. 세종 18년 대가뭄으로 서울 시내 모든 우물이 말랐다고 했고 경상도 지역은 총 66개 행정단위 중 절반인 32개 마을 농사가 완전히 실패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경기도는 40개 행전단위 중 9개 마을, 충청도는 54개 중 18개, 전라도는 55개 중 11개, 강원도는 26개 중 8개 행정단위의 농사가 완전히 실패했다. 먹을 것이 없어 기르던 소와 말을 잡고 소나무 껍질과 보리 뿌리를 먹었으며 처자식을 먹이지 못해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속출하였으며 따라오는 아이는 나무에 묶어두고 도망갔다고 했다(세종 19년 2월 9일). 

 

곳곳에서 굶어 죽었다는 정보가 올라왔다. 함길도 지역에서는 굶어 죽어 길이나 산에 버려진 사람이 눈으로 확인한 것만도 4백 명에 이른다 하기도 하고 수령이 굶는 사람을 데려와 음식을 먹이는 중에 죽는 자도 있고 병으로 죽었다고 하는 자들도 대부분 사실은 굶어서 죽은 것이라 했다(세종 25년 9월 22일). 세종이 함길도 관찰사 정갑손을 호되게 꾸짖으며 물었다.

 

   “이번에 누군가가 보고하기를 굶어 죽어 도랑에 뒹구는 함길도 사람이

    4-5백여 명이 된다고 하는데 구중궁궐 깊은 곳에 있는 내가 그 소식을

    들었는데 그 도 감사인 경은 각 고을을 순행하면서도 어찌 못 들었는가.  

    들었는데도 방법을 몰라 저 지경이 된 것인가. 아니면 고하는 사람이 없 

    어 못 들은 것인가. 각 관 수령은 어찌 돕지 않고 굶어 죽는 것을 가만  

   히 앉아서 좌시만 하는 것인가. (今有人啓 本道人民飢餓轉死者溝壑者 至 

    四五百餘人 予深居九重之內 尙且聞此 卿以本道監司 巡行各官 豈不得聞  

    乎 聞之而不知施爲之策 以至於此乎 抑無告之者 未得聞之歟 各官守令 何  

    坐視其死而不之恤也 : 세종 25년 9월 22일)”

 

사실 정갑손은 비축해 둔 곡식이 모자랄 것 같아서 진행되고 있던 함경도 지역 축성을 잠시 중지하자고 세종에게 요청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축성이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대신들과 의논한 끝에 일단 황보인을 현지에 파견하여 상황을 확인한 후 결정하기로 했는데 현지에 간 황보인이 축성을 강행했던 것이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축성을 강행한 황보인도 책임이 있지만 황보인을 보낸 세종도 책임이 없지 않았다.

 

   “이번 아사자는 혹시 축성하는 사람이 있는 양식을 모두 가져감으로    

    그 집 노인과 이이들이 걸식하다가 굶어 죽은 것이냐. 만약 그것이 사실 

    이라면 그것은 나의 책임이다. 그러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경이 한 도의  

    최고 책임자로써 제대로 진제를 못해 아사자가 발생한 것에 대한 책임  

    이 어찌 없다고 하겠는가. 

    (今此飢死者 無乃築城之人盡齎家蓄以往 其家老少絶食丐乞 而餓死乎 若是  

    則實是予之咎也 然卿以一道之主 不能賑濟 以致於死 卿亦豈無其責乎 

    : 세종 25년 9월 22일)”    

 

[정확한 현상 파악]

 

세종은 굶는 사람의 숫자와 함께 진제현장의 실제 상황을 사실대로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정확한 상황통계 없이는 올바른 대책이 절대로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경기감사에게 말했다.

 

   “최근에 듣기를 어떤 남자가 양식을 구걸하러 집을 나섰다 병이 들어

    광주 진제장에 들렀더니 감고나 색리 등이 받아주질 않았고 용인 

    진제장에는 감고, 색리가 아예 없었으며 그 집 주인 처도 받아주지 

    않아 결국 허기져서 걷지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단 이 뿐 아니다.

    또 듣기로 도내 각 관에 기근에 빠져 얼굴색이 파랗게 된 자가 많다는

    데 혹시 수령, 이정, 감고 등이 은닉하고 보고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어찌하여 내가 듣지를 못하는가. 한 번의 보고도 없는가. 내가 심히 

    안타깝게 생각한다. 다시 진심으로 구휼하라. 위 진제장에 지적한 감고

    색리를 조사하여 책임을 추궁하고 기타 진제장도 수사하라. 굶는 사람  

    의 상태를 면밀히 조사하여 보고하라.          

    (近聞 有一男子離家乞糧 中路得病 到廣州賑濟場 監考色等 不納

    又到龍仁 賑濟場 則無監考色吏 而院主之妻 易不納 使飢困不得行步

    不但此也 連聞道內各官多有饑饉菜色之人 無乃守令里正監考等

    隱匿不告 故無由得聞歟 何一不啓達乎 予甚懼焉 其更盡心救恤 

    上項賑濟場監考色吏 推覈科罪 其他賑濟場 亦可檢察 飢民餓饉之形 

    備細啓達 : 세종 19년 1월 7일)”

 

세종은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으로 현상을 파악하고 싶었다. 충청도 감사에게 보낸 지시문을 보아도 그런 세종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하물며 흉년 뒤라서 특히 더욱 마음을 써야 할 것이다. 관청의 비축된 곡식과 종자와 백성들의 형세로 볼 때 각관 주민들은 농사에 힘쓸 자가 혹시 반은 되는가. 삼분의 일은 되는가. 아니면 사분의 일은 되는가. 육칠분의 일은 되는가. 그것도 아니면 경내 모든 사람이 쇠약하여 힘도 없고 농사 의향도 없는 것인가. 열심히 진제 활동 하는 중이라도 생각해보고 도순문사와 함께 깊이 생각하고 두루 물어봐서 핵심내용을 보고하라.

    (矧今凶荒之後 尤宜盡心 以堂官倉所儲 農糧穀種及民間形勢料之 各官居民  庶幾力農者居半乎 居三分之一乎 否則居四分之一乎 六七分之一乎 否則闔  境凋瘁 無力及圖農業乎 奔馳賑活之餘 兼加致慮 與都巡問使詳思廣問 酌  中以啓 : 세종 19년 1월 19일)”

 

아사하는 사람은 물론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버려진 가옥의 숫자와 농사의 피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지방 수령들은 될 수 있으면 정확한 현실을 숨기려 한다는 것을 세종은 알고 있었다. 굶어 죽은 사람의 수를 속이고 구제 곡식을 얼마나 주었는지를 속이고 창고에 얼마의 곡식이 남아 있는지를 상부에 제대로 알리지 않으면 정확한 대책을 세울 수도 없고 따라서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관들을 다그치지 않으면 절대로 기아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구휼방법을 잘 몰라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 경이 어떻게든 대처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반드시 깊이 생각하여 좋은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굶어 죽은 자와 사망자와 곡식의 결실 정도와 각 관 창고에 저장된 쌀 및 콩의 양을 조사하고 구황 방법을 마련하여 속히 보고하라.  

    (予未知賑恤之如何 切切于懷 卿當何以處之 必有熟計而善處之策矣 

    其餓死之狀及死亡之數 流亡戶數 禾穀結實之狀 各官留庫米豆之數 

    救荒方略 磨勘速啓 : 세종 25년 9월 22일)”   

 

[조사관의 현장 파견]

 

현장 상황을 정확히 알기 위해 감사나 지방관의 보고가 오기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감사나 지방관들은 보고가 올라가봐야 칭찬을 받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보고를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늑장을 부리거나 미적거리면서 보고를 미루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다고 보고를 지연했다는 사실만으로 지방관을 경질하거나 문책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세종은 필요할 때마다 조사관을 현지에 급파하기로 하고 의정부와 육조에게 물었다.  

 

    “내가 진제 검찰관을 각 도에 보내고자 하는데 조정의 관리와 내관 중 

     에 누구를 보내야 능숙하게 일을 잘 처리할까. 그리고 언제 보낼까.

     (欲遣賑濟檢察官又各道 朝士與內官 熟爲可遣 且何時遣乎 : 

     세종 10년 1월 25일)”

 

조관(朝官)을 보내는 것에는 모두 동의했지만 보내는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일 갈렸다. 빨리 보내는 게 좋겠다는 맹사성 안순과 천천히 4월에 보내자는 의견 중에서 세종은 맹사성의 의견을 따랐다. 좌의정 이원이 굶어 죽는 사람이 많다는 보고를 올리자 세종이 탄식하며 말했다.

 

   “진제 경차관들이 모두 말하기를 비록 굶고는 있지만 죽기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더니 어찌 지금과 같은 일이 발생했는가. 당연히 곧고

    바른 사람을 보내 진심으로 순찰하고 진휼하면 어찌 구휼을 못하겠는가.

    굶어 죽게까지 한다면 통렬하게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다.     

    (賑濟敬差官皆曰 今雖飢不至死亡 今何若是乎 是欺我也  當遣正直之人 盡   

   心巡察賑濟 如有不能救恤 以致餓死者 痛懲以法 : 세종 4년 10월 3일)”

  

세종은 기아 현장의 상태를 파악하기위해 매우 신임하던 의정부 사인 권맹손을 강원도로, 그리고 한성부 소윤 이국치를 평안도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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