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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20 : 북제 창업자 고환의 업적을 다 까먹은 아들 고담과 손자 고위 <C>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3월31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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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군주로써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8> 이주영의 칭제 고민(AD528)

 

호태후와 정엄 서흘 일당을 제거 태원왕 이주영은 원자유를 황제자리에 세워놓고 원자유의 형 원소와 동생 원자정은 죽여 버렸다. 그런 뒤 태원왕 이주영은 황제자리를 양위 받을지 고민했다. 측근 고환은 빨리 자리를 차지하라고 재촉했다. 하발악은 이렇게 말렸다.

 

  ” 장군이 먼저 군사를 일으킨 것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간사 역적무리를 제거하려고 것입니다. 

    큰 공훈이 별로 없는데 벌써 이러시면 재앙을 빨리 부를 수가 있습니다.

    복이 올 때까지 잠시 기다리시지요.“

 

이주영은 미신을 좇아서 자신의 얼굴을 금으로 주조하라고 했으나 네 번씩이나 틀이 깨어지고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점을 잘 본다는 유령조도 천시와 인사가 아직은 맞지 않다고 점을 쳤다. 이주영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확실 징조로 믿었다. 이주영은 자신 대신에 자기와 친 병주자사 원천목을 세울까 생각했지만 유령조가 병주자사 원천목은 길하지 않으며 원자유가 천명을 가지고 있다고 권하자 그를 세우기로 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인 까닭에 민심이 흉흉 것을 꺼려서 죽은 황족에게 후하게 추증하는 편 도망간 관료들에게도 원래 직책과 품계를 올려주어 재등용시켰다. 점차 숨었던 선비들이 조정으로 나왔고 어느 정도 조정의 틀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주영은 본거지인 태원으로 돌아가면서 절친 원천목을 시중 및 영군장군으로 임명하면서 낙양조정의 모든 정사를 위탁하였다.

 

 

<19> 반란군 갈영을 제압 이주영(AD528)

 

당시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가장 큰 무리는 갈영 세력이었다. 갈영은 AD525년 정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선우수례의 밑에 있다가 AD526년 원홍업이 선우수례를 죽이고 북위에 항복하려하자 갈영이 원홍업의 목을 베고 주도권을 잡았던 사람이다. 이들의 활약무대는 정주에서 업에 이르는 하북성의 중심지역이다. 태원에 있던 이주영은 조카 이주천광에게 태원을 맡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없을 때 믿을 사람은 너 밖에 없다.“

      

이주영은 기병 7천을 가지고 후경을 선봉으로 삼아 기습 남하했다. 거의 백만 대군이라고 자랑하던 갈영은 이번 전쟁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반면에 이주영은 칼 대신 몽둥이가 훨씬 효과적인 무기라고 판단하고 매복작전으로 갈영군을 격파했다. 이주영은 사로잡은 갈영을 함거에 실어 낙양으로 보냈다. 갈영은 저자에서 참수되었으며 이로써 기주,정주,창주,영주 은주의 다섯 주가 평정되었다. 선우수례를 따라 반란에 참여했다가 전사 우문굉의 아들 우문태를 눈여겨 본 이주영은 통군으로 임명하여 곁에 두었다. 우문태는 북주의 창업자 우문각의 아버지이다.

 

 

<20> 북해왕 원호의 칭제와 낙양 점령(AD529)

 

북해왕 원호는 원상의 아들이다. AD524년 호침이 북서쪽에서 침략하자 북위 조정에서는 북해왕 원호를 보내 막도록 했다. 북위 조정은 AD528년 큰 성과도 없는 원호를 상주자사로 삼고 상주(하북성 업지역)를 방어하도록 했다. 낙양을 출발하여 업으로 가던 원호는 북쪽에서 갈영의 무리가 날뛰고 또 이주영 또 태원에서 웅거하고 있으므로 불안하여 나아가지 않고서 상주를 장인 은주(하북성 융요)자사 범준에게 맡기고 전상주자사 이신에게 업을 지키게 하였다. 양나라 행대 진밀이 원호의 (귀환)생각을 알아차리고 군대를 보내 원호를 맞아들였다. 양나라는 원호를 위왕으로 삼고 진경지와 군대를 보내 북침하도록 허락했다. (AD528)

 

북위의 원천목이 산동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형고를 공격하려고 하다가 남쪽에서 원호가 북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느 쪽부터 먼저 칠 것인지를 의논했다. 일부는 형고가 강성하니 형고를 먼저 치자고 했고 다른 무리들은 형고가 오합지중에 불과하니 먼저 원호를 맞아서 격퇴시키자고 했다. 원천목은 형고를 먼저 치기로 하고 군사를 북동쪽으로 몰아갔다. 원호는 그 때 빈틈을 치고 올라와 질성(안휘성 숙주시), 형성(하남성 우현) 및 양국(하남성 상구)까지 점령했다. 원호는 단을 세우고 횃불을 들고 올라가 제사를 지낸 다음에 수양성(하남성 상구)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AD529) 

 

북위에서는 동남대도독 양욱에게 형양(하남성 형양)을 지키게 하고 이주세륭은 호뢰(하남성 비수진)를, 이주세승은 악판(하남성 언사)를 방어하도록 했다. 원호의 부장 진경지는 적은 군대지만 죽기살기로 공격하여 형양을 지키고 있던 양욱의 대군을 격파하고 성을 차지했다.형고를 치려고 동쪽으로 가던 원천목은 남부전선에서 원호에게 연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돌려 남쪽으로 내려왔지만 진경지가 깨뜨렸고 원천목과 이주토몰아는 도주하였다. 진경지는 여세를 몰아 차례로 호뢰를 공략하니 이주세륭도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갔다. 낙양에 있던 북위의 주군 원자유는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망서렸는데 다들 서쪽 장안으로 가자고 했지만 고도목은 이주영과 원천목과 가까운 북쪽으로 가서 반격의 실마리를 찾아야다고 주장하므로 그의 의견을 좇아서 북쪽 하내(하남성 심양)방면으로 들어갔다. 낙양에 입성 원호는 연호를 건무로 고치고 진경지를 시중 거기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21> 원호의 착각(AD529)

 

원호를 피해 도망갔던 원천목은 4만 군사를 이끌고 원호의 배후, 즉 대량(하남성 개봉)을 빼앗은 다음 다시 군대를 몰아서 호뢰관을 공략했다. 원호 또 진경지를 호뢰관으로 파견하여 방어에 나서자 원천목은 계속 공격할 것인지 아니면 후퇴할 것인지를 의논했다. 행대낭중 온자승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 주상께서 호뢰를 지키지 못하여 이런 낭패가 벌어진 것입니다. 

    원호의 군대는 아직 정렬이 갖추어지지 못했습니다.

    이때를 틈타 공격하면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먼저 낙양을 수복하시고 대가를 맞이하시면 

    이는 제의 환공이나 진의 문공(춘추시대 영웅)과 같은 

    업적으로 올리는 일입니다.

    이런 좋은 호기를 버리는 것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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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원천목은 채택할 수가 없었다. 원천목이 군사를 가지고 황하를 건너 북으로 도망가자 그의 참모 비목은 진경지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는 낙양으로 온 뒤 원호에게 피살되었다. 지금까지 진경지는 47번 싸워서 47번 이겼고 북위의 성을 32개 빼앗았다. 낙양 아래의 많은 주와 성들은 원호에게 투항했다. 원호는 북위황제 원자유에게 편지를 보내 군사를 일으킨 이유가 이주영의 국정농단을 제거하기 위 것이므로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권유했다. 황제 원자유와 같이 낙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고자유라는 사람이 황제에게 말했다.

 

  ” 원호가 패배하는 것은 조석 간에 있을 것입니다.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원자유는 원호의 권유를 묵살했다. 황제가 말 필만 가지고 떠난 낙양을 접수 원호의 무리들은 시장에서 약탈과 살인을 감해하면서 민심을 크게 이반시켰다. 게다가 원호 스스로도 근신하지 못하고 교만하고 사치하면서 측근들이 정사와 인사를 어지럽혔다. 

 

태원에 있던 이주영은 곧바로 군사를 몰고 남으로 내려왔다. 도중에 장자(산서성 장치 남쪽)에서 원자유를 만나 같이 남하했다.

 

낙양을 함락시킨 원호는 자신을 도와준 양나라를 배반할 생각을 품었다. 양나라의 장군 진경지도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진경지는 이주영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더 큰 병력이 필요하다고 양나라 조정에 요청하자고 했다. 사실은 그 병력으로 원호를 견제하기 위 전략이었다. 원호는 진경지의 병력이 커질수록 양나라에 대해 반란하는 것이 어려우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진경지의 측근은 원호를 죽이자고 했으나 진경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경지는 대신 원호에게 서주자사로 내 보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 또 거부당했다. 

 

이주영의 대군와 원호의 방어군은 황하대교를 가운데 두고 대치했다. 원호 쪽에서는 원욱, 원영명, 양망영과 진경지가 다리를 방어했고 이주영 군사 쪽에서는 양간과 고도목이 공격을 주도했다. 원호의 부하들이 이주영과 내통하여 전략을 짜서 제시했지만 이주영이 들어주지 않아서 내통 사람들이 모두 주륙되었다. 이주영이 공격할 방도를 찾지 못하여 군대를 물리려 하자 황문랑 양간과 고도목이 강력하게 막아서며 말했다.

 

  ” 지금 돌아서시면 실망 백성들은 기댈 곳이 없어집니다.

    대나무 뗏목을 만들어 배를 실어서

    야밤에 강 연안에 늘어놓으면 

    언제라도 강을 건너 적군을 섬멸할 수 있습니다.“ 

  

 고도목도 이렇게 말했다.

 

  ” 지금 군대를 돌리시는 것은 

    원호에게 시간을 주어서

    뱀을 살모사가 되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이주영은 이주조와 하발승에게 지시하여 배를 만들어 군대를 강 건너로 보내 적장 원관수를 사로잡았다. 이주영의 군대가 황하를 건너 습격했다는 소문에 원연명의 군사가 모두 도망갔고 원호 또 거점을 잃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낙양이 다시 북위의 손아귀에 들어오자 원호에 부응했던 주변의 여러 성들은 다시 이주영에게로 투항했다. 진경지의 군사는 전멸했고 겨우 혼자 몸을 숨겨 승려로 변장 다음 가까스로 건강으로 돌아왔다. 도망가던 원호는 허창 남쪽 임영에서 따르던 임영의 사졸 강풍에게 붙잡혀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황제 원자유는 다시 낙양으로 돌아와서 이주영에게는 천주대장군, 이주조는 거기대장군, 원천목은 태재, 원휘를 대사마 겸 태위로 삼았다. 

 

 

<22> 이주영 피살사건(AD530)

 

누가 봐도 이주영은 북위의 실세였다. 황제 원자유는 이주영이 세운 사람이므로 이주영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원자유 또 스물 두 살의 능력이 있고 자각이 있는 군주였으므로 이주영에 대 반감이 없을 수가 없었다. 원자유의 처가 이주영의 딸이었지만 장인과 사위관계라 하더라도 나라의 군주로써는 사직을 지키는 일만큼 중요 것이 없었다. 게다가 부인 이주씨는 남편이 아버지의 덕으로 황제가 되었다는 생각에 남편에 대해 오만하고 거칠게 대하였으므로 부인에 대 사랑이나 연민이 있을 리 없었다.    

 

황제 원자유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측근에는 성양왕 원휘와 시중 이욱이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 인척지간이었다. 먼저 원휘의 처는 원자유의 외사촌 누이였고 이욱은 원자유의 누이동생 남편이었다. 원휘와 이욱은 자신들이 정권을 오로지하기 위해서는 이주영을 제거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원자유 또 이주영이 지난 번 호태후를 죽인 것(하교의 학살)을 생각하며 불안했다. 원자유와 이욱과 원휘는 이주영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시중 양간과 상서우복야 원라를 동참시켰다.

 

때마침 이주영의 딸이자 원자유의 처인 이주황후가 만삭이었으므로 이주영이 딸의 해산을 보러오는 기회를 틈타서 암살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주세륭은 황제 쪽에서 이주영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것을 이주영에게 알렸으나 이주영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크게 개의치 않았다. 4, 5천명의 기병을 이끌고 이주영은 태원을 출발해 낙양으로 내려왔다. 어떤 사람이 이주영에게 암살의 모의가 있음을 알려오자 이주영은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그런 사살에 대해 물었다. 황제가 대답했다.

 

  ” 나도 들었소만 바깥에는 공이 나를 죽이려다는 또 다른 소문도 있소,

    어찌 그런 것들을 믿을 수가 있겠소, 다 지어낸 것이라 생각하오.“     

 

이주영은 황제의 본심을 의심하지 않고 경비 병력을 최소으로 거느린 채 황궁을 드나들었다. 성양왕 원휘가 황제에게 재촉했다.

 

  ” 끝까지 그가(이주영) 반역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꼴을 보지 못 할 것인데

    하물며 그런 보장도 없음에야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AD530년 9월 15일 병주(태원)를 지키고 있던 원천목도 낙양으로 내려왔다. 9월 18일 황제는 중서사인 온자승을 불러 이주영 암살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병사 10여 명을 동광전 뒤에다 숨겼다. 그러나 이주영과 원천목이 식사 도중에 자리를 뜨는 바람에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다음날과 그 다음날은 제삿날이었으므로 아무 일이 없었는데 이미 거사계획이 새어나갔으므로 이주영 또 며칠 동안 움직이지 않고 집에 머물러 있었다.  

 

9월 25일 황제는 군사를 명광전 뒤에 숨겨놓고는 황후가 아들을 낳았다고 이주영에게 알려왔다. 이주영은 외손자를 낳았다는 소식에 일어나 춤을 추며 좋아했고 이어서 다른 백관들도 이주영에게 황제의 득남 소식을 알려오자 즉시 의관을 차려입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원휘가 황궁으로 올라오는 이주영에게 절을 하는 것을 신호로 광록소경 노안과 전어 이간희가 칼을 뽑고 이주영에게 달려들었다. 이주영이 급히 황제 원자유에게로 피했는데 그 때 원자유가 품고 있던 칼로 이주영을 찔러 살해했다. 원천목과 이주영의 아들 이주보제와 이주양도 등 30여명의 호위병들도 모두 죽었다. 이 때 이주영의 나이는 38세였다.     

 

<23> 이주조의 반격과 효장제 원자유의 피납(AD530)

 

이주영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주세륭과 하발승과 전이 등 이주영 세력들은 일단 북쪽으로 피신하기로 했다. 원자유의 처이자 이주영의 딸인 북향장공주도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도망갔다. 하발승은 곧 이주세륭과 작별하고 주서는 중도에서 낙양으로 돌아왔다. 이주세륭이 북쪽으로 가려는 것을 사마자여가 막아서며 말했다.   

 

  ” 전쟁터에서는 약함을 보이는 것만큼 나쁜 것이 없습니다. 

    도망가실 것이 아니라

    무리를 되돌려 황하다리를 공격하고 

    그들이 예상치 못하는 곳으로 치고 들어가면

    큰 공을 이룰 수도 없지 않습니다.

    또 설령 일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아직 힘이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것 또 

    다른 사람들이 배반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주세륭이 옳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곧바로 군대를 돌려 황하다리 하교를 공격하여 점거 다음 낙양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이주영을 살해하고 잔뜩 들떠있던 북위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주세륭은 기병 1천명에게 흰 옷을 입혀 궁궐로 보내 이주영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는 사면을 약속하면서 이주세륭에게 항복을 회유하였다. 이주세륭은 단호히 거절했다. 원자유는 이숙인을 대도독으로 삼고 이주세륭을 토벌하도록 했다. 

 

이주세륭은 군사를 물려서 건주(산서성 장치 남쪽 진성부근)로 올라갔다. 당시 분주(산서성 습현)를 지키던 이주조가 태원을 장악 뒤 장자에서 이주세륭과 만났다. 장광왕 원엽을 추대하여 황제로 옹립하고 이주조를 대장군, 이주세륭을 상서령으로 삼았다. 원엽은 탁발황(추존 경목황제)의 11번째 아들 탁발정의 손자다. 새로운 황제를 세운 이주조와 이주세륭이 결탁하여 군대를 몰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 때 경주(감숙성 경천)에 있던 이주천광과 하발악도 군대를 몰아 낙양으로 합류했고 서주방면에 있던 이주중원도 낙양으로 내려왔다. 평주자사 후연도 낙양토벌 대열에 합류했다.    

 

경종 효장제 원자유는 대사마 녹상서사 원휘에게 모든 것을 맡겼으나 용렬하고 시기심 많은 원휘는 모든 신하들의 건전 건의를 묵살하고 오로지 황제의 비위만 살펴가면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거짓 확신만 심어주었다. 경종은 하발승과 정선호를 보내 동쪽의 이주중원을 막으려했으나 하발승은 정선호가 자신을 자꾸 의심하므로 이주중원에게 투항해버렸다. 나중에 정선호는 양나라로 망명했다.  

 

이주영의 조카 이주조는 힘 안들이고 황궁까지 들어왔다. 원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으며 황제 원자유는 이주조의 군사에게 붙잡혀 영녕사 누각에 매여졌다. 군사들은 황궁을 약탈하고 궁녀들을 폭행했으며 황제의 아들을 모두 죽였다. 이주세륭이 장치에서 낙양으로 들어오자 이주조는 당숙 이주세륭을 꾸짖었다. 

 

 ” 숙부께서는 어찌 천주장군(이주영)에게 

   재앙을 받도록 하셨습니까! “ 

 

이주세륭은 매우 언짢았지만 겉으로 겸손 말과 언색으로 사과하고 돌아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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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3월31일 16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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