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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의 날’과 1997년 환란(換亂)의 진실(5)” 관련 정정보도문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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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2월03일 12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2월03일 11시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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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국가미래연구원은 2019. 1. 23. 인터넷 신문인 “국가미래연구원”의 “‘국가부도의 날’과 1997년 환란(換亂)의 진실(5)”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① 정부는 1997. 11. 16. IMF와 사이에 “IMF와 자금지원에 관한 약속”을 하였는데, 원고 임창열이 1997. 11. 19. 기자회견에서 ‘IMF에 자금지원 요청 계획이 없다.’라고 발언함으로써 IMF와 합의가 파기되었고, ② 원고가 1997. 11. 19. IMF 구제금융 신청 발표 계획을 전달받는 등으로 알고 있었는데도 ‘IMF에 가는 줄도 몰랐고 보고받은 바도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③ 원고는 1999년 부인과 함께 외환위기 당시 경기은행퇴출 저지를 위한 로비 대가로 수억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어 2003년 형이 확정되었다는 취지로 보도하였습니다.

그러나, ① 정부가 1997. 11. 16. IMF로부터 자금지원을 약속받은 사실, ② 원고가 1997. 11. 19.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 때문에 IMF와의 합의가 파기된 사실, ③ 원고가 1997. 11. 19. IMF 구제금융 신청 발표 계획을 전달받거나 보고받아 알고 있었던 사실, ④ 원고가 1999년 부인과 함께 외환위기 당시 경기은행퇴출 저지를 위한 로비 대가로 수억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어 2003년 형이 확정되었던 사실은 확인되지 아니하기에 해당 보도를 바로잡습니다.

 

이 보도는 법원의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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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 보도 원문<2019년1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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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으로 끝난 IMF와의 첫 번째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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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강경식 부총리는 11월 14일 곧바로 미셀 캉드쉬 IMF 총재(사진 왼쪽 두 번째)와 접촉을 시도했다. 강 부총리는 태국에 있는 김기환 대외경제협력 대사(사진 왼쪽 첫 번째)에게 캉드쉬 총재를 만나 서울방문을 주선할 것을 지시했다. 김 대사는 수소문 끝에 마침 캉드쉬 총재가 방콕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접촉에 나섰다. 김 대사는 캉드쉬 총재를 태국 중앙은행 총재가 주최하는 만찬장으로 찾아가 별도로 만나 한국 사정을 설명하고 강 부총리가 서울에서 만나기를 희망한다는 뜻과 함께 극비로 방문해 줄 것을 설득했다. 

 

  캉드쉬 총재는 강 부총리의 초청을 수락하고 극비리에 11월 16일 새벽 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도착했다. 캉드쉬 총재의 방한은 극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언론에 잘 안 알려져 있거나 아니면 그 사실 자체가 마치 없었던 일로 치부되고 있다. 영화 국부날에도 이 만남은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 비밀협상의 존재를 알아야만 이후 전개된 IMF와의 협상 과정에서 왜 IMF를 비롯한 미국, 일본 등으로부터 왜 우리가 불신을 받게 되었는지, 왜 협상력을 상실하고 협상의 칼자루를 IMF에게 내어주고 칼끝을 붙잡고 피를 흘리며 협상에 끌려 다니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비밀협상은 우리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IMF와의 첫 번째 만남이고 우리가 처음으로 IMF에게 긴급자금지원을 요청한 협상의 첫 단추였기 때문이다. IMF 협상을 둘러싼 모든 드라마의 시작은 이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강 부총리는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김 대사와 만나 대책회의를 가지고 IMF로부터 돈을 얼마나 빌릴 것인지를 논의했고, 이 자리에서 이 총재는 300억 달라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강 부총리는 이 총재, 김 대사와 같이 캉드쉬 총재를 만났고 이 자리에서 강 부총리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금융개혁 등을 설명하고 300억 달러 지원을 요청했다. 강 부총리는 정부가 금융개혁법 개정을 계기로 추진할 금융권 구조조정 등을 IMF가 지원하는 형식으로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캉드쉬 총재는 한국경제의 기초가 튼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외환보유고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많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금융개혁법 개정과 금융산업 구조조정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이는 IMF가 바라는 바라며 금융지원을 약속하고 이번 협상 결과를 미국과 일본에도 알리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미국과 일본은 IMF의 2대 주주이기 때문에 자금인출을 위해서는 이 두 나라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그도 미국, 일본과 협의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낸 것이다. 캉드쉬 총재는 협상 결과 발표 시기는 우리가 정하되 한국 정부가 발표하면 IMF는 지원 성명을 발표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고 곧바로 실무진을 파견 구체적인 협상하겠다고 했다. IMF와의 첫 협상은 그렇게 성공적으로 끝났다. 당시 미국 CIA도 캉드쉬 총재의 한국 극비방문 사실을 포착했고 한국 정부가 마침내 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한다고 파악했다고 KBS(‘IMF와 트로이목마’)는 전하고 있다.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 제코는 IMF가 한국에 400억∼600억 달러를 긴급 지원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으나 한국 정부는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나라를 뒤흔드는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졌다 

 

   강 부총리는 김인호 경제수석과 협의, 11월 18일 금융개혁법에 대한 국회 처리가 끝나면 ‘외환위기 극복 종합대책’과 함께 11월 19일 IMF에 자금지원요청을 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김인호 수석은 강 부총리의 캉드쉬 총재와의 협상 결과 등을 17일 오전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강 부총리는 금융개혁법 국회 처리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은 잘되고 있었고 강 부총리와 김 수석은 그때 이제 외환위기는 잠재울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들의 편도 우리나라의 편도 아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8일 국회에서의 금융개혁법 처리와 IMF로부터 자금지원 발표 시점인 19일을 그동안 생각해온 경제팀 교체의 적절한 타이밍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기아 사태수습, 외환 유동성 부족에 대한 대응 미흡 등등 그동안 일 처리에 불만을 가져온 경제팀을 교체하고 분위기를 쇄신하여 새로운 경제팀이 IMF 협상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특히 11월 12일 윤진식 비서관의 건의에 따라 앞으로 있을 IMF와 협상을 위해서는 경제기획라인이 아니라 재무라인의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정책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강경식 부총리 후임으로 과거 IMF와 세계은행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재무라인의 임창렬 당시 통상산업부장관을 적격자로 보았던 것 같다. 김영삼 대통령은 11월 17일 오전 임창렬 장관을 비밀리에 청와대 집무실로 불러 단둘이 만난 자리에서 11월 19일 자로 부총리에 임명할 계획임을 통보하고 IMF행에 따른 만반의 준비를 지시했다고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인사가 치명적인 패착이 될 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돌이켜보면 김영삼 대통령은 이번 인사는 여느 인사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인사 검증을 담당하는 민정수석, 비서실장도 그랬던 것 같다. 이미 강 부총리가 캉드쉬 총재를 만나 자금지원요청을 했고 IMF와 나라의 명운이 걸린 협상을 시작한 직후여서 강 부총리를 이 시점에서 교체하면 자칫 여러 가지 외교적 억측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IMF가 대통령이 비밀협상에 대해 불만족하고 자금지원요청을 하지 않겠다는 것으로도 의심하게 할 수 있는 인사였다. 

중요한 외교적 협상이 진행되는 도중에 협상 대표를 바꾸는 것은 협상 상대방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협상을 그르칠 수도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그러한 인사를 생각한 것이다. 만일 그날 그 인사가 없었다면 강경식 부총리의 IMF행이 예정대로 발표되었을 것이고 우리의 역사는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날 그 인사는 결국 외환위기를 환란으로 판을 바꾸는 역사적 전기를 만든 인사가 되었다는 점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그 무거운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날 역사의 진로를 바꾸는 운명의 주사위가 그렇게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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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18일 국회는 대선을 앞두고 조기 폐회를 결정했다. 그러나 11월 12일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외환위기 수습 등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한국은행법 개정과 금융감독기구 설치 등 13개 금융개혁법안의 회기 내 처리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결국에는 신한국당도 이에 동조하면서 법안처리를 무산시켰다. 대선을 한 달여 남긴 시점에서 김대중과 이회창 후보는 나라보다는 금융노조 등 이해 관계자들의 반발을 의식하고 표를 생각하며 법안처리를 대선 이후로 연기했다. 그러나 국회의 이러한 결정은 강 부총리가 캉드쉬 총재에게 설명한 한국 정부의 금융개혁 추진에 정치적 제동이 걸렸음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IMF가 한국 정부와 정치지도자들의 금융개혁 의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강 부총리는 나라의 명운이 걸린 IMF 자금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융개혁법안 국회  통과가 절실했다. 그렇다면 그는 법안 통과를 위해 김대중, 이회창 후보를 만나 외환 사정의 긴박성과 함께 IMF 자금지원요청의 불가피성, 더 나아가 캉드쉬 총재와의 비밀협상 추진 사실 등을 알리고 법안처리를 설득하는 등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어야 한다. 이미 12일 야당이 반대성명을 발표한 상황에서 그들을 설득시키기 위한 특별한 노력이 필요했고 그럴 수 있는 시간은 아직도 있었다. 그러나 강 부총리는 14일에서야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IMF행을 결정지었고 16일에야 캉드쉬를 만났다는 점에서 사실상 금융개혁법의 국회 처리에 혼신 했는지에 의문이 든다. 그렇다고 외환위기의 위중한 상황에서 국가보다 자신들의 선거와 표를 의식해 중요한 금융개혁법안을 정략적으로 처리한 김대중, 이회창 후보의 책임도 작지만은 않다. 그렇게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또 하나의 주사위가 던져졌다.

 

 신임 임창렬 부총리의 ‘역대급 거짓말’

 

  18일 밤 금융개혁법 국회 통과가 무산된 후 강 부총리는 김 수석과 대책회의를 하고 금융개혁법 불발로 추진이 어려워진 정책들을 수정하여 ‘금융시장안정 및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정리 확정했다. 다음 날 아침 8시경 강 부총리와 김 수석은 대통령에게 준비한 종합대책을 보고하고 IMF에 가는 문제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발표문에 포함 시키지 않고 기자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공식 발표하겠다고 보고했다. 강 부총리는 캉드쉬 총재의 자문대로 IMF 지원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18일 일본 대장성 장관과 통화하고 미국 재무장관과는 19일 통화하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강 부총리와 미 재무장관의 통화 약속은 KBS 보도에서도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18일 강 부총리의 연락을 받고 한국이 IMF에 자금신청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국 정부와의 협상 준비를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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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강 부총리와 김 수석은 대통령 보고를 마치고 나온 뒤 곧바로 경질되었다. 보고 중 분위기를 감지한 두 사람은 김용태 비서실장에게 사표를 전달했고 대통령은 사표를 수리했다. 그리고 11시경 대통령은 임창렬 신임 부총리와 김영섭 신임 경제수석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청와대는 금융개혁법의 국회통과가 무산되고 외환위기가 발생한 데 대한 책임을 물어 경질한다고 했으나 사실은 금융개혁법 처리 무산과는 관계없이 내부적으로 준비되어 온 인사였다. 

  

  11월 17일 김영삼 대통령을 비밀리에 만나 경제 부총리 후임 통보를 받은 임창렬은 그 길로 김용태 비서실장을 만나 ‘대통령으로부터 IMF행 준비에 만전(萬全)을 다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말까지도 김영삼 대통령은 회고록에 남겨놓았다. 19일 부총리 임명식 직후 김영삼 대통령은 고건 국무총리와 김용태 비서실장 등 이 배석한 자리에서도 차를 마시면서도 “IMF 금융 지원요청을 포함하여 강경식 부총리가 추진해온 사항을 승계 받아 발표하라”라고 당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사(萬事)가 아닌 ‘망사(亡事)’가 된 인사

 

  이날 인사에 대해 재경원 간부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로 평가한다. 이날 오후 5시경 부총리의 대책발표가 예고되어있었기 때문에 임 부총리는 윤증현 금융정책실장으로부터 강 부총리가 준비해 놓은 대책에 대해 보고받았고 예정대로 기자회견을 했다. 모든 것은 준비된 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IMF 자금지원 요청’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임 부총리는 ‘요청 계획이 없다’라고 매우 강한 어조로 힘주어 잘라 말했다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재무관리는 증언한다. 그것은 강 부총리와 캉드쉬 총재와의 약속을 정부가 뒤집는 폭탄 발언이었다. 일부 언론은 이를 두고 ‘IMF 구제금융안 실종사건’이라고 하지만 이는 명백한 ‘IMF 구제금융요청 부정, 혹은 거부사건’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 부총리의 ‘예상치 못한 발언에 놀랐다. 있을 수 없는 중대한 실수를 했다. IMF에 대한 우리의 신뢰도에 먹칠한 것’이라고 회고록에 당시 소회를 적었다. 대통령도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 준 임명장을 받고 나간 부총리가 당신이 당부한 말을 뒤집고 거짓말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 인사가 불과 몇 시간 후에 나라를 환란의 패닉으로 빠뜨리는 대형 참사를 가져오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날 인사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만사가 아니라 ‘환란의 십자가’를 지게 하는 ‘회한(悔恨)의 망사’가 되었다.

 이 인사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김영삼 대통령이 어리석어서, 무능해서 그 시점에 그런 인사를 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인사를 어리석게 만든 것은 결국은 임창렬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 아닌가? 그날 임창렬은 이미 ‘배신의 마음’을 품고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 참으로 궁금한 질문이다.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임 부총리의 IMF행 거부 발언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다음날(20일) 오후 역시 한국 정부의 발표를 듣고 놀라 방문한 IMF 스탠리 피셔 수석부총재, 티모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부 차관보의 방문을 받고 ‘신임 부총리가 IMF에 자금지원요청을 부정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 강 전 부총리와 합의한 것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이 총재는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IMF 자금지원이 절실하다’라며 그들을 설득했다고 당시를 증언한다. 

 

  임 부총리의 IMF 자금요청거부 발언은 IMF로부터 외화 차입에 유일한 희망을 걸고 있었던 외환 금융시장의 생명줄을 스스로 잘라버리는 순간이었다. 임 부총리는 외환위기의 대한민국이 IMF 긴급구제금융이라는 외줄을 타고 천 길 낭떠러지 위를 건너는 마지막 순간 그 외줄을 잘랐고 대한민국을 낭떠러지 밑으로 추락시켰다. 증시는 폭락하고 환율이 폭등하며 시중은 패닉 상태가 되었다. 예상되는 민간부문의 대외채무액 대비 가용 외환보유고 부족으로 IMF로부터 차입이 안 되면 꼼짝없이 국가 부도로 갈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이 현실로 나타났다. 임 부총리의 IMF행 거부 발언은 국가신인도를 추락시키고, IMF와 미국, 일본의 불신을 자초하고, 우리의 협상력을 잃게 하고, 외환위기를 환란으로 전환 시키고 판을 바꾸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더욱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을 앞두고 외환 금융시장은 혼란에 빠졌고 한국 사회는 불안 속에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이날 이후 대선정국은 12월 18일 투표일까지 한 달 동안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한 IMF와의 피 말리는 협상과 경제 파탄에 대한 대선 후보들 간의 책임 공방 속에서 진행되었고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끝이 났다. 임창렬의 당시 행보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정치적 저의’가 의심되는 행동이란 억측을 낳을 수도 있게 하며, 결과적으로 그를 김대중 후보 대선 승리의 ‘일등공신(?)’이라고 평가하게 할 수도 있게 한다. 더욱이 당시 김대중 후보가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불과 50여만 표의 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임창렬의 행보는 보기에 따라서는 김대중 후보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정치적 사건이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임창렬의 행보는 끊임 없은 정치적 논쟁거리가 되었다. 임창렬이 11월 17일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부총리 기용을 통보받고 19일 임명되기까지 2일간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생각으로 그와 같은 거짓말을 하게 되었는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의 일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영화 국부날은 1997년에 11월 대한민국의 외환위기를 국가 부도 위기의 환란으로 몰아넣는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이 영화가 자신들의 주장대로 역사적 사건에 바탕을 두었다면 이 사건을 누락시킬 수는 없다. 그런데도 누락시킨 것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도에 도움이 안 되는 사건은 제외하고 자신들의 입맛대로 역사적 사건들을 취사선택하여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 국부날은 왜 강 부총리와 캉드쉬 총재 간의 비밀협상, 뒤이은 임창렬 부총리의 IMF행 거부 발언을 영화에서 제외하였을까? 영화만이 아니다. 우리 언론들은 대체로 이 대목을 거의 다루지 않거나, 이 사건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역사적 의미부여를 생략하고 대수롭지 않은 ‘한 줄 사건’으로 처리하고 넘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심지어 KBS의 탐사보도마저도 그렇다. 왜들 그럴까?

 

거듭된 임창렬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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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3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환란 주범 찾기’가 시작되면서 임창렬이 당시 IMF행에 대한 사실을 알고서도 거짓말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러나 임창렬은 전임자로부터 “인계를 받지 못해 내용을 몰랐다”라고 거짓말로 변명했다.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았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IMF행과 그에 따른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을 지시받았고 그래서 부총리로 임명한다는 말까지 들었다. 김 대통령이 회고록에 그렇게 적어 놓았다. 김 대통령이 역사에 남기는 당신의 회고록에 거짓말을 적어 놓았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필자가 1993년 12월에 처음 만나 퇴임 시까지 4년여 간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보아온 김영삼 대통령은 항상 나라와 국민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통령은 정치인의 거짓말을 너무나 싫어하셨던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는 수석비서관들과 가진 사적인 자리에서 포도주를 드시고 기분이 풀리시면 당신과 함께했던 정치인들의 ‘거짓말 열전(列傳)’을 재미 삼아 들려주곤 했다. 그는 ‘거짓으로 세상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서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겠다’라는 말도 했다. 임창렬에게도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세상이 아니라고 해도 그는 거짓말을 했고, 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도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역사적인 역대급 거짓말을! 

 

   그러나 당시 감사원은 외환특감결과를 발표하면서 “강 전 부총리가 IMF 구제금융 결정 사실을 후임 부총리인 임창렬에게 제대로 인계하지 않아 임창렬이 11월 19일 기자회견에서 IMF행을 부인했고, 이것이 우리나라 대외신인도를 급락시키며 외환보유고가 고갈된 상태에서 IMF와 조건 협상을 진행하게 하는 사태를 초래했다”라며 “IMF 자금지원 건에 대해 인수-인계가 미비했던 탓에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혐의가 없다”라고 발표했다. 김대중 정부의 감사원과 검찰은 김영삼 대통령의 진술을 무시하고 명백한 임창렬의 거짓말을 진실인 양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회고록과 검찰에 제출한 서면 답변서 등을 종합하면 임창렬은 고의적으로 그와 같은 발언을 작심하고 했다고밖에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당시 언론은 ‘노골적인 임창렬 봐주기 수사’라고 검찰을 비난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임창렬은 뜻밖에도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는 ‘임창렬 감싸기’를 넘어 적극적으로 ‘임창렬 키우기’에 나섰다.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임창렬을 불러 ‘앞으로 정치를 하라’며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시켰고 1998년 6.14 지방 선거 때 경기도 지사 공천을 주고 출마시켜 당선까지 시켰다. 김대중 정부가 진정한 ‘환란유발자’인 임창렬을 그토록 감싸야 할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유추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것이 무엇이었을지는 임창렬과 김대중 대통령,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관계자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임창렬의 정치 입문으로 ‘임창렬 거짓말에 대한 정치적 의혹’과 ‘환란 책임론’이 더욱 거세졌다. 1999년 1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경제청문회에서는 ‘임창렬 전 부총리의 증언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검찰 답변이 서로 엇갈리는 이유’를 캐물었다. 그에 대한 정치적 공세가 이루어지면서 임창렬은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부담되기 당시 언론들은 임창렬보 시작했다.다도 오히려 부인에게 주목하며 “부인 주혜란이 정·관·재계와 폭넓은 관계를 맺으며 각종 특혜의혹을 불러일으켜 남편과 새정치국민회의를 곤경에 빠뜨렸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여야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주혜란은 특히 새정치국민회의의 중진 정치인들과 친밀한 관계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임창렬은 1999년 부인과 함께 외환위기 당시 경기은행퇴출 저지를 위한 로비 대가로 수억 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어 2003년 형이 확정되면서 그의 정치 생명은 끝이 났고 부인과도 이혼했다.

 

  21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여전히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들이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감사원과 검찰은 왜 사실상 ‘환란의 주범’인 임창렬 감싸기에 앞장섰을까? 감싸기를 넘어 그를 정치에 입문시키고 정치인으로 키우려 했던 김대중 대통령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임창렬은 그때 외환위기극복을 위해 IMF와 협상을 잘해달라고 당부하며 그만 믿고 그를 부총리에 임명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간절한 마음을 배신하고 나라 경제를 뒤흔드는 역사적 거짓말을 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인수인계를 못 받았다’라는 거짓말로 변명을 이어갈 생각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차고 넘친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임창렬은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나라를 환란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 책임에 대해 역사 앞에 참회하는 마음으로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 받게 된 많은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을 어리석은 대통령으로 만들고, 역사의 죄인으로 만든 자신의 배신행위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의 영전에 참회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임창렬의 ‘IMF행 거부론’으로 인한 환란은 뒤이어 발생한 (IMF위기는 ) 김대중 후보의 ‘IMF 재협상론’이 일으킨 살을 여미는 북풍한설(北風寒雪)의 칼바람에 비하면 아직도 시작에 불과했다. <계속>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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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2월03일 12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2월03일 11시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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