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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8 : 작은 아버지의 유업을 못지킨 남연의 모용초(F)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6월03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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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27) 모용수 옹립의 여론(AD376-AD377)

 

전진의 양평국(하북성 관도현) 상시 모용소가 모용해에게 이렇게 모용수 옹립을  건의했다.

 

 “ 전진이 강성함을 믿고 오로지 전투에만 몰두하여 있으니

   백성들은 길거리에서 굶거나 노역으로 쓰러지고

   병사들은 바깥에서 지쳐 힘들어하니

   나라가 위태롭기가 짝이 없습니다.  

   관군장군 모용수 숙부는 어질고 지혜가 뛰어나서 영웅으로 발탁되었습니다.

   반드시 연을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무리들은 자신을 아끼면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AD376)“

전진의 국위가 사해를 떨치게 되자 조정안에서 서서히 국가기강이 무너질 조짐이 보였다. 삼십 여 년 전 후조의 석륵 조정에서 장작공조(기물제조 담당)를 했던 웅막이 말하기를 후조시대의 기물과 완구가 지금보다 훨씬 웅장하고 화려하며 정교했다고 지적하자 부견은 당장 그에게 장작승이라는 직책을 내리고 후조에 못지않은 병기와 기물을 제작하라고 지시했다. 전진 조정이 점차 사치에 기울고 나태해지자 큰 아들 모용농이 아버지 모용수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 왕맹이 죽고 나서 전진의 법제도가 나날이 쇠퇴하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치하고 장차 재앙이 올 것 같습니다.

    도참에 있는 말도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마땅히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 영웅호걸들을 영입하셔서

    하늘의 때를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모용수가 웃으며 말했다(AD377).

 

   “ 천하의 일은 네가 알바가 아니다(天下事非尔所及)”。

  

 (28) 전진의 남침에 동참하는 모용수(AD378)

 

부견은 동진 조정의 어수선한 틈을 타고 남정을 결정했다.(AD378년 2월) 목표는 양양이었다. 양양은 한수를 장악하는 요충지다. 양양을 장악하면 물길로 내려가 무한을 거쳐 건강(남경)까지 직행 할 수 있다. 부견의 대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 남하했다. 남쪽의 양양을 향하는 부견의 중군 선봉에는 아들 정남대장군 부비가 섰다. 구장과 모용위가 동행했다. 총 군사는 7만 이었다. 부견의 동군은 모용수와 요장이 이끄는 5만군으로 남향(하남성 석천)에서 양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부견의 서군은 구지와 모당과 왕현이 이끄는 4만 대군으로 장강을 끼고 무당(호북성 단강구)에서 양양을 향해 나아갔다. 총 16만 대군이다. 동진에서는 환충의 7만 군이 송자에 주둔하고 있었고 시평에 1만 뿐이었다. 수적으로 동진은 확실한 열세였다. 환충이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모용수가 남양을 뽑아버리고 양양 주변에서 중군 부비군사와 만났다, 부비는 구장의 권고에 따라 서두르지 않고 장기전으로 갈 생각이었다. 전진 조정에서는 부비가 대군을 가지고도 속히 양양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탄핵해야 한다고 난리였다. 부견조차 아들에게 전투를 재촉하며 말했다.

 

“ 봄까지 함락시키지 못하거든 

  목숨을 끊고 나타나지 마라!“

 

당황해진 부비는 마침내 양양 공격을 개시했다. 부견은 스스로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융에게 군사를 수춘에 모으라고 지시했다. 부융이 부견을 말리며 나섰다.

 

“ 형님, 강남을 얻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넓고 깊게 생각하셔야지

  어찌 그리 조급하게 덤벼드십니까? 

  만약 양양만 얻을 것이라면 대가가 움직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수후가 구슬로 천길 참새를 쏜다면(隨珠彈雀) 세상이 웃을 일 아니겠습니까?“

 

양희도 말리며 나섰다.

 

“ 한광무제가 공손술을 죽였고

  진무(사마염)제가 손호를 사로잡았지만

  두 황제가 손수 6사를 이끌고

  친히 북과 북치는 막대기를 잡고

  돌과 화살을 무릅썼다는 예기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마침내 부견이 친정의 생각을 버렸다. 마침 부비가 훌륭하게 양양을 함락시켰으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AD379년1월-2월) 

 

(29) 부견의 동진정벌 계획을 부추긴 모용수(AD382)

 

부견에게 동진은 사랑니 같은 존재다. 환온이 살아 있을 때에는 수시로 국경을 넘보면서 국가에 통증을 주곤 했지만 지금은 내부 문제로 골머리 썩다보니 마치 매복된 사랑니 같은 존재가 되었다. 있어도 없어도 별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천하를 통일한다는 관점에서는 아무래도 뽑아야 할 나라였다.

 

자신의 아버지 부법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고 반란을 일으킨 아들 동해공 부양의 반란(AD382)이 마무리되자 부견은 부융을 정남대장군으로 내세워 다시 남정준비에 착수했다. 일단 파서(사천성 낭중)와 재동(사천성 금양)에 있는 태수들에게 수군을 양성하여 장강을 따라 내려 올 준비를 하도록 명령했다. 부견이 이렇게 말했다.

 

“ 내 30여 년 왕업을 이어받고도 아직

  저 동남쪽 귀퉁이(동진을 폄하하며 지칭)를 교화하지 못하였다.

  대략 계산해보니 전국에서 약 97만을 동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저 귀퉁이를 토벌할까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비서감 주융이 손뼉치며 호응했다. 

 

“ 만약 동진 주군(효무제 사마요)이 

  손을 뒤로 묶고 옥을 입에 물고 항복해오지 않는다면  

  저들은 모두들 수장되어 물고기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견이 흡족해 하며 말했다.

“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바이다.”

 

상서좌복야 권익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 은나라 주왕이 비록 포학했으나 

  세 사람의 인자한 사람(三仁 : 微子, 箕子, 比干)이 있었으므로

  주나라 무왕이 군사를 돌렸습니다.

  지금 동진은 비록 작고 약하지만 크게 나쁜 일을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안과 환충은 강도의 영웅호걸로써

  군주와 신하가 위아래로 화목하고 단합되어 있으니

  아직은 도모하기 쉽지 않습니다.“ 

 

부견은 모든 신들에게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라고 명령했다. 석월은 아직 정벌할 때가 아니라고 말했다. 부견은 이렇게 말했다.

 

“ 시경에 이렇게 씌여 있다 :

  ‘집을 지을 때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집을 지을 수가 없네’

  내가 마음속으로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신하들이 모두 물러가고 부융만 남았다. 부융은 전쟁이 불가한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하늘의 도에 순응하지 못하는 것,(정당성이 없다는 것)

  둘째, 동진에 아무런 틈새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셋째, 그동안 전쟁이 너무 잦았고 병사들이 적을 두려워 한다는 것.

 

부견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 내게 강군 100만이 있다.

  그리고 전쟁물자가 하늘처럼 비축되고 쌓여있다.

  또 내가 비록 선량한 군주는 아닐지라도 사리에 어둡거나 약하지는 않다.

  승기를 이어 망해가는 나라를 치고자 하는데 

  어찌 이기지 못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도적을 밑에 두고 나라 근심을 언제까지 끌고 가야 한단 말인가?“

 

부융이 단호하게 말했다.

 

“ 동진을 멸망시킬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지친 병사를 끌고 이길 수는 없습니다.

  폐하 주변에는 흉노, 선비, 갈, 저, 강 등

  우리의 태생적 적들이 가득한데

  만약 우리가 동쪽으로 내려 간 틈을 타고 뒤를 공격해 온다면

  비록 태자가 지킨다고 하더라도 

  마치 변란이 배, 가슴, 팔꿈치, 겨드랑이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승상 왕맹이 죽으면서 한 말을 왜 상기하지 못하십니까?“

 

부견은 반대 의견에 귀를 닫아버렸다. 부융의 강력한 반대에 힘을 얻은 신하들은 더욱 강하게 전쟁불가를 외쳤다. 한번 군사를 일으키기만 하면 가을 낙엽 떨어지는 듯하다고 여기는 부견으로서는 신하들의 반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태자 부굉도 동진이 죄가 없으므로 명분도 없는데다가 만에 하나 밀리기라도 한다면 북중국 최강국 전진의 위신이 도저히 서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부견은 이렇게 쏘아붙였다.

 

“ 진나라 시황제가 6국을 통일할 때에도

  모든 군주가 포학해서 

  전쟁 명분을 얻었기 때문에 이겼냐?“ 

 

찬반 의논이 끝이 없이 길어졌다. 모용수가 부견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 성스러운 마음으로 폐하께서 결정하시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입니다.

  널리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진무제(사마염)가 오나라를 멸망시킬 때 

  오직 장화와 두예 두 사람만 찬성했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좇았다면 어느 틈에 출병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견이 크게 기분이 좋아졌다.

 

“ 나와 더불어 세상을 도모할 사람은 오직 경뿐인 것 같소.“

 

부융이 나서서 말렸다.

 

“ 만족할 줄 알면 욕을 입는 일이 없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로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동진은 작지만 우리 융적과는 다른 

  중화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입니다.

  하늘이 그들의 대통을 절대로 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30) 비수(肥水)대전의 참패(AD383)

 

AD383년 정월 전진의 효기장군 여광(3년 뒤 후량을 세움)이 동진정벌을 준비하기 위하여 장안을 출발해 황하를 끼고 동쪽으로 내려왔다. 지난 해 서역을 정벌할 때 항복받은 선선왕 휴밀타와 미전도 향도로 자원 동참했다. 5월 동진의 거기장군이자 군사 실권자인 환충은 10만 군사를 이끌고 호북성 송자에서 북으로 올라왔다. 4년 전(AD379년, 위(62) 참조) 빼앗긴 양양지역을 수복하자는 생각이었다. 유파는 정북진 하여 양양으로 나아갔고 곽전은 양양의 배후 단강구를 습격했다. 양량은 장강을 거슬러 서쪽 방면으로 부성(사천성 면양)을 향했는데 촉지역 전진 군사를 묶어두기 위한 전략이었다. 

 

부견은 즉각 정남장군 부예와 관군장군 모용수에게 보기병 5만을 주어 환충의 양양방면 군사를 막게 하고 사천성 방면에는 요장과 장자를 보내 막았다. 환충의 군대는 면수(한수) 남쪽으로 퇴각했다. 오래 전부터 동진정벌을 꿈꾸며 공격개시 시점을 저울질하던 부견으로서는 환충의 양양 역습이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즉각적으로 전국에 동원령을 발표하였다. 전국 동네마다 장정 10명에 1명을 강제로 차출하였다. 그 중에 20세 이하로 재능과 용맹을 갖춘 자는 황실호위 우림랑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AD383년7월)

 

  “ 동진의 사마창명(현재 황제 효무제)은 상서좌복야, 

    사안은 이부상서,

    환충은 시중으로 임명할 것이며

   이들에게 새 저택을 하사할 것이다.“

 

부견은 8월 2일 부융과 부굉과 모용수에게 25만 군사를 나누어 주고 선봉에 서게 하였다. 요장에게는 용양장군의 직책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 옛날 짐이 용양장군으로 대업을 이루었소.

  일찍이 남에게 내린 적이 없는 직책이니 분발하시오.“

 

 

엿 세 뒤인 8월 8일 부견도 스스로 60만 보병과 27만 기병을 이끌고 부견이 장안을 출발했다. 전국 각국의 차출군사 수 십 만 또한 동진을 향해 남으로 혹은 동으로 내려왔다. 부융의 30여만 선봉이 9월 제일 먼저 영구(안휘성 영상현)에 도착했다.

 

동진 조정은 크게 술렁거렸다. 상서복야 사석을 정토대도독으로 임명하고 서주,연주자사 사현을 전봉도독에 임명했다. 동진의 방위군은 보국장군 사염과 서중랑장 휘하의 약 8만이었다. 전진군의 1/10도 안 되었다. 초조해 진 사현이 들어가서 삼촌 사안에게 대책을 물었다. 사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 내 따로 생각해 둔 게 있다.”

 

 사실은 사안에게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태연한 척했던 것이다. 사안은 곧 물러나 산중의 별장으로 가 조카 사현과 바둑을 두었다. 평소 사현에 비해 실력이 한참 모자라는 사안이었지만 그 날을 긴장한 사현을 완벽하게 이겼다. 환충은 걱정이 되어 정에 3천을 건강에 보내 황제를 호위토록 했다. 사안은 필요 없다고 되돌려 보냈다. 환충은 위급한 전시에 바둑이나 두고 3천 정예병을 돌려보내며 게다가 나이 어린 동생 사석이나 조카 사현을 전쟁의 책임자로 임명하는 사안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10월 부융의 군대가 수양(안휘성 수현)을 먼저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모용수는 운성(호북성 안륙)을 함락시켰다. 전진은 동진 대도독 사석에게 서한을 보내 순순한 항복을 권했다. 그 사이에 사현은 유뢰지에게 정예 5천을 보내 부융의 전진 선봉의 오른쪽 배후인 낙간을 기습 공격하고 전진 장군 양성을 잡아서 참수하고 전진의 자사 왕현을 생포했다. 이번 전투에서 동진군이 올린 최초의 전과였다.

 

전진의 100만 대군은 비수(안휘성 수현을 오른쪽으로 끼고 도는 강) 서쪽 강변에 진을 쳤다. 동진군은 비수 동쪽에 대치했다. 부견과부융이 수양성루에 올라가 동진군대를 보니 대오가 엄격히 정렬되어있고 팔공산 수풀 또한 동진군대로 보였다. 부견이 말했다.

 

“누가 동진군이 약하다고 했느냐?”

 

부견이 낙심하여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양쪽 군대 모두 먼저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사현이 부융에게 제안해 왔다. 지구전으로 갈 생각이 아니고 한 판 결전을 붙을 생각이라면 전진군대를 약간 뒤로 물려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렇게 해주면 동진군이 물을 건너서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제안이었다. 많은 전진 장군들은 반대했다.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이쪽이 많으므로 저들이야말로 전쟁의 생각이 없을 것인데 물려주면 전쟁하겠다는 것은 반드시 무슨 계략이 숨어있는 증거라는 것이었다. 부견은 생각이 달랐다. 오히려 물을 건너는 그들을 역습하자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 또한 그럴 듯했다. 부융도 동의했다. 마침내 전진의 대군이 약간 뒤로 몰러나 주기로 결정했다. 

 

100만 대군이 물러난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배치된 병기와 개인 무기를 다 들고 뒤로 물러나야 하므로 엄청난 혼란이 수반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라서 모두가 매우 긴장된 상태에서 몸과 무기를 이동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적군이 도착하기 전에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전진 대군이 혼돈 속에 물러나는 틈을 노리고 동진군이 습격해 왔다. 뒤쪽 어디선가 전진 군대가 패했다는 외침도 들려왔다. 전진군은 더욱 큰 혼란에 빠졌다.     

 

이렇게 외친 사람은 주서(周序)였다. 주서는 동진의 훌륭한 장수요 행정가였다. AD379년 전진이 양양을 함락시킬 때 어머니 한씨와 함께 끝까지 항거하다가 부비에게 사로 잡혔던 인물이다. 절조를 지킨 것에 감탄한 부견이 전진 조정에서 탁지상서의 직을 수행하다가 이번 동진정벌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동진 쪽에 사신으로 가서 항복을 설득한 사람이 주서였다. 

 

전진의 100만 대군은 참혹하게 붕괴되었다. 넘어진 전우를 수백, 수천의 동료들이 밟고 넘어가면서 전사자는 열에 일곱, 여덟에 달했다. 전진의 모든 병기는 물론 부견이 타던 운모거마저 포획되었다. 부융이 전사했고 부견은 떠도는 화살에 맞아 부상당해 회수 이북을 떠돌다가 주민에게 더운 물에 말은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비단 열 필과 솜 열 근을 주었으나 그 노인은 사양하면서 말했다.

 

“ 폐하께서는 안락함이 싫증나셔서 전쟁을 일으키셨지만

  저희들은 그런 폐하를 아버지처럼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밥을 드리는 데 무슨 보답이 필요합니까?“

   

노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부견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부인 장씨에게 말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천하를 다스린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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