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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8: 작은 아버지의 유업을 못지킨 남연의 모용초(E)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5월27일 17시3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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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23) 모용수를 제거하려는 왕맹(AD369)

 

부견이 모용수 부자를 크게 후대하는 것을 왕맹은 경계했다.

 

“ 모용수 부자는 용과 호랑이 같은 부자이니

  지금 제거하셔야 합니다.“

 

부견의 생각은 달랐다.

 

“ 영웅호걸을 거둬들여 사해를 깨끗이 평정하는 것은

  군자의 소망인데 내 어찌 그들을 죽이겠소.

  또 서로 이미 정성스럽고 충성스런 말을 나누었는데 

  필부도 허툰 말을 하지 않을 터인 바에 

  만승인 내가 어찌 약속한 말을 거두어 그를 죽이겠소.“

 

당시 전진과 전연의 외교관계는 우호적이었다. 서로 신하들의 교류가 활발했다. 전진에 들어 갔던 양침은 돌아와서 전진의 전쟁준비와 민심수습 등을 보고하면서 장차 있을 변란에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황제 모용위와 태부 모용평은 부견이 모용수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먼저 우호관계를 깰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부견이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으면 분명히 적개심 때문에 오왕 모용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단순논리였다. 그러나 전연의 태위 황보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 오원의 화(伍員之禍)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낙양과 태원과 호관(산서성 장치)에 병력을 증강시켜

  장차 전진의 침입에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오원의 화란 BC 6세기경 춘추시대 초나라 오원(오자서)의 아버지 오사가 간신 비무기에게 모함을 받아 죽자 오원이 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 오왕 합려에게 등용되어 아버지 원수 초나라를 멸망시킨 고사를 말한다. 황보진이 빗댄 것은 전진으로 도망간 모용수를 경계하자는 말이었다. 태부 모용평이 황제 모용위에게 말했다.

 

“ 전진은 힘이 적고 약하기 때문에 우리를 도왔던 것입니다.

  또 부견은 항상 정도만 따라 가는 사람이므로

  반란을 일으킨 오왕 모용수의 말을 듣고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볍게 놀라서 경계심을 일으키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침략의 빌미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득하면서 한편으로 전진에서 온 사신에게 얼마나 전연이 풍요롭고 잘 사는 지를 보여 주었다. 고태와 하간과 같은 강직한 전연 신하들은 오히려 강한 병기와 조직된 군사들의 힘을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간청했지만 무력긴장을 원하지 않는 모용평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정권은 문란한 가족혼태후가 쥐고 있었고 모용평은 옹졸하고 편협하며 질투와 탐욕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뇌물로 자리를 사는 것이 유행이 되어 유능한 관리는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24) 왕맹의 낙양함락과 모용수 제거 모략(AD370)

 

동진이 스스로 퇴각하고 나서 승리에 도취된 전연은 참전 대가로 약속한 호뢰관(하남성 형양 서북쪽 사수진) 서쪽 땅을 전진에게 주지 않았다. 사신이 말을 잘못한 것일 뿐 애당초 호뢰관을 할양할 생각이 아니었다고 둘러댔다. 화가 난 부견은 왕맹과 양성과 등강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전연을 토벌하기로 하고 낙양을 공격했다.(AD369년 12월) 낙양을 지키던 전연의 형주자사 모용축은 부견의 항복권유 편지를 읽자마자 창과 칼 을 내려놓고 투항해 왔다.

 

왕맹은 낙양을 향해 출병하기 직전 모용수의 아들 모용령을 향도로 삼음과 동시에 모용수를 찾아가 기념할 만한 물건을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모용수는 의심하지 않고 몸에 지니던 작은 패도 하나를 건네주었다. 낙양을 함락시키자 왕맹은 모용수와 가까운 금희라는 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 모용령을 찾아가서 이 패도를 보여 주면서 

  아버지가 이렇게 말 했다고 전하시오.

  ‘지금 왕맹이 나(모용수)를 심하게 견제하고 있고

   부견 또한 나를 진정으로 신뢰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 아버지 모용수는 막 동진으로 망명길을 떠나면서

   이 칼을 금희에게 주어 미리 알리는 것이니

   너 또한 곧장 동진으로 출발하라.‘ “ 

 

모용령은 아버지가 동진으로 망명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결심을 못하다가 사냥 간다는 핑계로 사촌지간인 전연의 낙안왕 모용장에게로 피신했다. 왕맹은 즉각 모용령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표문을 장안으로 올렸다. 그 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황급히 도망가다가 남전에서 사로잡혔다. 부견은 대범하게 이렇게 말했다.

 

“ 경의 아들이 고향이 그리워 돌아 간 것을 가지고 

  흉허물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소. 

  장차 전연은 망하고 말 것이니 

  모용령도 거기서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오.

  제 발로 호랑이 굴로 돌아 간 것이 애석할 따름이요.

  부자간이나 형제간에는 연좌되지 않으니

  경께서 어찌 지나치게 두려워하며 일을 낭패할 수가 있겠소?“

 

부견은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모용수를 대했다. 모용수는 부견의 대범하고 사려 깊음에 뼛속깊이 감탄했다. 전연에서는 돌아 온 모용령을 의심하여 조양 북쪽 600여리로 귀양보냈다. 귀양지에서 모용수 장자 모용령은 그 다음해에 모반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죽었다. 

 

 

(25) 왕맹의 전연 토벌(AD370)

 

왕맹은 낙양을 함락시키고 나서 등강에게  맡기고 더 동쪽으로 나아가 형양 가까이까지 다가갔다. 부견은 그의 공을 높이 사서 사도 겸 녹상서사 겸 평양군후라는 작위까지 내렸지만 왕맹은 사양했다. 부견이 억지로라도 받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왕맹은 끝내 받지 않았다. 부견은 왕맹과 양안에게 6만 군사를 주면서 다음과 같이 동진을 명령했다.

 

“ 호뢰관을 깨뜨리고

  상당(산서성 장치)을 평정하며

  달려가 업(전연의 수도)을 접수하되

  마치 빠른 뇌성은 귀에 듣지 못하는 것처럼

  전격적이어야 한다.

  내 친히 1만 군사를 가지고 뒤쫓아갈 테니

  육로와 수로로 나누어 동시에 갈 것이다.

  경은 후미를 전혀 걱정하지 마시고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시오.“

 

왕맹이 이렇게 답변했다.

 

“ 남은 호족으로 싹 쓸어버림이

  마치 바람으로 낙엽 쓸 듯이 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수레가 먼지를 뒤집어쓰시는 수고를 겪지 마시고

  서둘러 칙령을 내리셔서 

  선비족을 어디에 묻을 것인지만 걱정하십시요“ 

    

업성에 주둔하는 전연 황제 모용위는 30만 대군을 모아 방어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 전진의 군사는 얼마나 되는가?

  우리가 싸울 만한가? ”

 

산기시랑 이봉은 전진의 6만 군사력을 형편없이 폄하하면서 대수롭지 않다고 평가했다. 황문시랑 양침과 중서시랑 악숭은 군사의 수가 아니라 지략이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고 그들은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것이므로 전쟁의 승산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 사이에 왕맹과 양안이 각각 호뢰관과 상당을 함락시키자 전연은 크게 술렁거렸다. 전진의 왕맹이 동진하여 낙양과 호뢰관을 정벌하는 사이 양안은 북로를 향하여 상당을 접수하고 진양(산서성 태원)을 함락시켰다. 전쟁이라고 할 것도 없이 전진 군사가 도착하는 순간 전연 군사는 무너졌다.  

 

진양을 함락시킨 양안의 군사는 다시 남동진하여 왕맹의 군대와 합류한 뒤 모용평의 30만 대군이 주둔한 노천(산서성 여성)으로 향했다. 이 때 왕맹의 척후병 서성이 기한을 어겨 늦게 도착하는 잘못을 범했다. 왕맹이 군법을 위반한 서성을 죽이려하자 등강이 말리고 나섰다. 왕맹이 등강의 용서를 듣지 않자 등강은 왕맹을 공격하려 했다. 왕맹이 왜 그렇게 흥분하냐고 묻자 등강이 이렇게 대답했다.

 

“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먼 곳 까지 와서 적을 토벌하러 왔는데

  가까운 곳에 적을 두고

  서로 죽이려고만 하고 있으니

  답답해서 내가 그대를 공격하려 한 것이요.“

 

왕맹은 그런 등강의 용기를 높이 치하하면서 서성을 사면했다. 서성이 사면되자 등강 또한 왕맹을 몸소 찾아가 사죄했다. 왕맹이 등강의 손을 잡고 말했다.

 

“ 내가 장군을 시험해보려고 한 것일 뿐이오.

  장군이 한낱 군장 서성에게도 그리 충성을 보이신

  나라에 대한 충성이야 어떻겠소.

  나는 다시는 전연 도적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요.“ 

 

 

(26) 전연의 멸망(AD370년 11월)

 

전연은 망할 징조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황제 모용위는 무능하고 정치는 가족혼태후가 농단하고 있었다. 군사를 장악한 대사마 모용평은 겁 많고 용렬하며 허풍에만 익숙해 있었다. 모용위가 전쟁을 독촉하자 노천(산서성 여성현) 방어에만 힘쓰던 모용평이 사신을 왕맹에게 보내 한 판 전쟁을 벌이자고 독촉해 왔다. 왕맹은 등강에 전투를 부탁했다. 등강은 전쟁 조건으로 사예교위를 달라고 했다. 사예교위란 황실과 대신들의 비위를 감찰하는 책임자 자리다.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공직자 비리수사처 같은 자리인 셈이다. 왕맹은 자기 능력 밖의 일이기는 하나 안정태수에 만호후 정도는 최선을 다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시큰둥해진 등강은 물러나 자리에 눕고 일어나지 않았다. 왕맹이 마침내 사예교위를 허락하자 등강은 즉각 군사를 일으켜 전연을 대파시키고 약 5만군사의 목을 베었고 10만 군사의 항복을 받아냈다. 모용평은 노천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업성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전진 군사는 노천에서 동쪽으로 100여KM 떨어진 수도 업성을 포위했다. 부견은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함락을 미루고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AD370년 11월 10만 전진의 대군이 업을 둘러싸고 포진했다. 이미 황제 모용위, 태부 모용평, 모용장, 모용연 등 전연의 최고 지도부는 업성을 빠져 나간 뒤였다. 업성을 지키던 전연 산기시랑 여울은 업의 북문을 몰래 열고 전진의 군사를 받아들였다. 11월10일 부견은 전연의 궁궐로 무혈 입성했다. 부견을 수행한 모용수는 남아있는 전연의 공경대부를 심하게 질책했다. 모용수와 함께 전진으로 망명했던 측근 고필이 다가가 화를 내실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나라를 시작하는 계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몰래 귀띔했다. 모용수는 과거 전연의 대신들을 책망하기를 그쳤다.

 

전진의 유격장군 곽경은 번개처럼 말을 몰아 도망가던 전연 황제 모용위를 체포해서 업성으로 압송했다. 모용위가 모든 전연 관원을 대동하고 전진에게 무릎 꿇고 항복했다. 전연의 157개 군과 246만호, 그리고 인구 999만이 전진에 항복했다. 북중국의 절반 이상이 전진의영토가 된 것이다. 장천석의 전량이 고장(감숙성 무위)에 있기는 했으나 칭번국이었으므로 사실상의 북중국 통일이나 마찬가지다. 왕맹에게는 사지절, 도독관중육주제군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기주목으로 삼아 업에 주둔시키고 모용평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주었다. 등강에게는 사지절, 정로대장군, 진정군후 및 안정태수, 양안에게는 박평현후, 그리고 곽경에게는 도독유주제군사를 주었다. 

 

부견은 전연의 관료들을 후히 중용했다. 황제 모용위에게 신흥후라는 작위를 주었고 황보진은 봉거도위, 이홍은 부마도위라는 직책을 주어 등용했다. 모용위는 전연이 멸망하고도 한참 뒤인 AD385년 동생 모용충의 반란에 연루되어 부견에게 죽었다. 전연 지도부를 추격하던 곽경이 용성에 다다랐을 때 모용평은 고구려로 달아났지만 고구려 고국원왕이 모용평을 잡아들여 업성으로 압송시켜 버렸다. 업성에서 다시 전진 수도 장안으로 끌려 온 모용평에게 부견은 급사중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전연 조정에서 간첩으로 오인되어 갇혔던 양침에게는 중서저작랑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모용수는 부견에게 모용평을 죽여야 한다고 간청했지만 부견은 죽이지 않고 범양(학북성 탁현)태수로 내보내었으며 전연의 여러 왕족도 죽이지 않고 변방으로 내보내기만 하였다. 

사마광은 부견의 이런 관대한 조치를 냉혹하게 비판했다.

 

“ 모용평은 임금을 가리고 제멋대로 정치를 하였고

  현명한 사람을 시기하고 공로를 세운 사람을 미워하며 

  어리석고 아둔하여 포학한 일에 욕심을 내어 나라를 망치게 했으나

  스스로 도망쳐 숨었다가 잡혀 왔던 사람이다.

  부견은 그런 그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총애하는 자리를 내렸으니    

  이는 한 인간을 아낀 것이지 한 나라를 아낀 것이 아니므로

  그로인해 인심을 잃은 것이 크다.

  따라서 한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었어도

  그 받은 사람은 그것을 은혜로 생각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정정을 쏟아도

  그 사람은 정성을 되 쏟지 않으니 

  끝내 은혜와 정성이 공로와 명성을 쌓지 못하고

  자기 몸을 받아들일 곳조차 없게 되었으니

  그가 도를 얻지 못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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