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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8 : 작은 아버지의 유업을 못 지킨 남연의 모용초(D)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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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5월20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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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8) 남연의 시조 모용덕(AD368)

 

AD364년에 전진의 부생의 친동생 여남공 부등(騰)이 다른 네 명의 동생들과 함께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 죽은 적이 있었다. 왕맹은 예전부터 부생의 자식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원래 불심 자비심으로 유명한 주군 부견은 주모자 부등만 처리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살려 주었다. 그 때 살아남은 정북장군 회남공 부유가 AD365년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습격했는데 이위가 잘 방어하여 부유가 체포되고 죽었다.(AD365년 10월) 이 때 부건의 아끼는 아들 정동대장군 진공 부류(부생의 동생)와 부견의 친형 정서대장군 조공 부쌍도 반란에 가담을 했지만 부견은 부유만 처단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살려 주었다. 부견이 두 번이나 목숨을 살려 주었던 부류가 AD367년 부생의 다른 동생 진동장군 위공 부수와 안서장군 연공 부무와 함께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모의했다. 진동장군부 주부 요조가 주군 부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공께서는 주공과 소공처럼 주군(부견)과 친한 사이인데      

  국가가 어려울 때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어찌 스스로 난을 일으키려 하십니까?“

 

부수는 요조의 말을 듣지 않고 반란 군사를 일으켰다. 부견이 그 소식을 듣고 즉각 난을 일으킨 부류 형제를 장안으로 긴급 소환했다. 부류 형제들은 소환령을 거부하고 군사를 몰아 

남쪽으로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부견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군대를 물리고 소환에 응하면 용서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신표로 배를 깨물어 보이는 「설리의 신표(齧梨爲信,설리위신)」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부견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다. 다음해 정월 부견은 양성세와 모숭을 보내 진주(秦州) 방향 반란군 부무를 토벌하게 하고 왕맹과 등강은 옹주 포판(산서성 영제)의 부류를 공격하였으며 양안과 장자를 보내 섬성(삼문협)의 부수를 토멸시켰다. 

 

섬성을 지키던 부수는 두려운 나머지 전연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전연의황제는 용렬한 모용위였고 훌륭하게 정치를 이끌어가던 모용위의 삼촌 모용각은 지난해(AD367) 사망한 직후였다. 모용각은 죽기 직전 조카 황제 모용위에게 친동생인 오왕 모용수를 등용하여 모든 정사를 자문할 것을 신신당부했었지만 모용위는 듣지 않았다. 모용위는 모용수 대신 시기심이 많고 편벽한 작은 할아버지 모용평을 태부로 등용시켰다. 사실 전연 조정에서는 부견의 전진이 부씨 형제간 내전으로 혼란한 지금이야말로 전진을 토벌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범양왕 모용덕이 이렇게 말했다.

 

“ 선황(모용준)께서 하늘의 뜻에 호응하고 천명을 받아서 

  뜻을 높여 6합(동서남북천지=천하)을 평정하시려 했습니다.

  페하께서 그 대통을 이으셨으니   

  마땅히 그 뜻 또한 계승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부씨들이 골육전쟁으로 흩어져 나라가 다섯으로 나뉘고

  정성을 다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전진을 우리에게 던져 준 것입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천하재앙을 내릴 것이니

  오월의 경우가 그런 것입니다. 

  황보진에게 명령하시어 병주, 기주 무리를 데리고 포판으로 가게 하시고

  오왕은 허창과 낙양의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부수를 구해 주십시오.

  태부(모용평)은 금위군을 인솔하여 뒤따르게 하시며

  격문을 천하에 띄워 포상금으로 전국의 군대가 호응하도록 하시면

  천하 통일의 기회가 바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태부 모용평은 옹졸하고 그릇이 형편없이 작았다.   

 

“  전진은 대국이라 쉽게 도모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닫아걸고 국경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진을 평정하는 것이 어찌 나의 소관이란 말이냐!“

 

이런 전연 조정의 내막 형편을 알게 된 부수는 오왕 모용수에게 서신을 보내 상의했다.

 

“ 지금 이 기회를 타서 빼앗지 않으면 

  과거 오의 부차가 월왕 구천을 죽이지 않음에 따라

  나중에 월왕 구천의 공격을 받아 용동에서 방축되어 자살하게 만든 

  용동의 한(甬東之恨)이 될까 걱정됩니다.“

 

모용수가 측근 황보진에게 이렇게 걱정했다.

 

“ 주군(모용위)이 어리고

  태부 모용평은 용렬하기만 하니

  어떻게 부견과 왕맹을 당해 내겠소?“ 

 

황보진이 이렇게 대꾸했다.

 

“ 우리가 그것(이 기회에 부견을 공격하자는 것)을 말한 들

  듣지 않을 것이니 말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전연의 모용위와 모용평 조정은 소중한 기회를 이렇게 놓치고 말았다. 물론 이 때 전연이 전진을 공격했다고 해서 이겼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좋은 호기였음은 분명하다. 이로부터 2년 뒤인 AD370년 전연은 부견의 공격을 받고 허무하게 멸망하게 된다.    

 

 

(19) 동진의 무리한 전연 북벌(AD369)

 

동진 대사마 환온은 오래 전부터 북벌의 계획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북벌의 대상은 전진과전연이다. AD368년 3월 환온은 서여주자사 치음과 강주자사 환충과 예주자사 원진과 함께 전연을 토벌하게 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다. 치음은 원래부터 전쟁 따위에 참여하는 것이싫어서 자신의 휘하 부대를 모두 환온에게 맡기면서 다른 자리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환온은 즐거운 마음으로 요청을 수락하고 치음을 회계내사로 내보내고 자신이 서연주 이주 자사가 되었다. 

 

환온은 보,기병 5만을 물길을 타고 이끌고 고숙(안휘성 당도, 장강의 마안산 남쪽)을 출발하여 연주, 즉 지금의 산동성 제녕 부근에서 북벌을 시작했다. 치초가 강물의 수위가 낮아서 조운이 원활하지 못할 것에 대비하자고 했지만 환온은 걱정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환온군이 진격하고 나서 가뭄이 점차 심해지면서 강물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 환온은 모호생을 시켜서 거야(산동성 거야)로부터 300 리 운하를 파서 말라빠진 변수에 물을 대도록 했다. 치초가 무리한 북진전략을 비판했다. 

 

“ 수로의 배후가 적에 의해 막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차라리 군대를 이끌고 수로가 아닌 육로로 

  전연 수도 업으로 바로 진격하면 

  그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 저절로 붕괴될 것입니다. 

  만에 하나 나와서 싸운다 하더라도 전세는 금방 결단날 것입니다. 

  다만 공께서 이런 전략이 경솔한 것이어서 

  승산이 엷다고 생각하신다면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군사를 황하와 제수 사이에 머물게 하신다음 

  물자를 충분히 축적하고 나서 

  여름쯤에 병력을 발동하시면 

  비록 늦은 것 같아도 필시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 두 계략을 버리고 계속하여 진군하신다면

   속도도 빠르지 않을뿐더러 물러날 수도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도적들이 이런 형국을 이용하여 전투를 계속 지연시키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면 북쪽 지역은 곧바로 가을과 겨울이 와서

   물길이 얼고 곡식이 다하며 

   가죽옷을 입어도 추위가 뼛속을 스며들 것이 두렵습니다.“   

 

환온의 군대를 맞아 산동성 호륙(어태현)에서 녕동장군 모용충(忠)이 분전했으나 패하여 사로잡혔다. 모용위가 하비왕 모용려를 대도독으로 삼고 보기 5만 명을 다시 보냈으나 황허(하남성 개봉 부근)에서 대파 당하였다. 고평태수 서번은 동진에게 항복했고 전연 장수 부안도 동진의 등하와 주서에게 연파 당하였다. 다급해진 전연 황제 모용위는 낙안왕 모용장에게 전군을 통괄하게 하고 환온에 대항했으나 그마저 격파 당하자 이제 남은 유일한 방법이 전진의 부견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었다. AD369년 7월 환온이 무양(산동성 신현)까지 들어와 주둔하자 주변의 인사들이 속속 동진 환온에게 투항해왔다.           

 

 

(20) 도망갈 생각 밖에 없는 모용위와 모용평(AD369)

 

순식간에 황하 이남 회하 이북 영토가 무너지자 전연 황제 모용위와 최고 군사지도자 모용평은 두려운 마음에 화룡(용성, 즉 전연의 옛 수도, 지금의 조양)으로 달아날 생각부터 했다. 사실 황하가 뚫리면 수도 업(하북성 형태)까지는 지척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왕 모용수가 나아와 말했다.

 

 “ 신이 청컨대 이들을 치게 해 주십시오.

   만약 그리하고도 이기지 못한다면 

   그 때 달아나셔도 늦지 않으실 것입니다.“ 

 

황제 모용위가 낙안왕 모용장 대신 모용수에게 사지절, 남토대도독의 직책을 주고 범양왕 모용덕의 5만 군사와 함께 환온을 막았다. 동시에 산기시랑 악숭을 전진에 보내 구원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성공하면 호뢰관(하남성 형양 부근 사수진) 이서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21) 전진 부견의 전연 파병과 모용수의 혁혁한 전공(AD369)

 

전진의 부견은 대신들과 함께 전연에 대한 파병지원 문제를 의논했다. 모두들 반대했다. 15년 전인 AD354년 환온이 전진을 공략해 왔을 때(AD354년 남전 전투: 위(51)) 전연이 도와주지도 않았고 또 전진에게 칭번해 오지도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전진의 책사 왕맹의 생각은 달랐다.

 

“ 현재 전연의 실권자 모용평은 전혀 환온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환온이 이길 것은 자명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환온이 낙양을 잡아먹고 

  유주(하북성 북경 주변)와 기주(하북성 중부)와 

  병주(산서성 태원 부근)와 예주(하남성 동부와 산동성 남부)의 온 병사를 긁어모아

  우리 전진의 동쪽 국경을 넘볼 텐데

  그렇게 되면 폐하의 사업은 끝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전연과 힘을 합쳐서 환온을 물리치신 다음에 

  허약해진 전연을 흡수하면 우리가 대세를 잡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가 막힌 묘책이 아닐 수가 없었다. 부견은 구지와 등강에게 2만 군사를 붙여서 동쪽으로 낙양을 거쳐 영천(하남성 우현)에 진을 치게 하는 한편 산기시랑 강무를 전연에 보내 구원군이 동쪽으로 이미 진군했다고 알려주었다. 황하를 건너 온 환온의 군대는 여러 가지 악재에 시달렸다. 선봉 군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전연군에게 연이어 패배하는가 하면 너무 깊이 들어 온 까닭에 배후 보급로가 차단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전진의 대군이 동쪽으로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에 동진 군대는 크게 술렁거렸다. 그리고 건강의 동진 조정안에서는 환온에 대한 반감이 싹트고 있었다. 

 

환온은 황급히 철군을 결정했다. 전연의 방위군 선봉장인 오왕 모용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환온의 뒤를 쫓았다. 참모들은 퇴각하는 환온 군대를 급습할 것을 종용했지만 모용수는 침착했다. 최초로 후퇴를 결정한 환온 군은 추격해 오는 전연군에 대비하여 최정예군을 후방에 배치하면서 퇴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전연군이 쫓아오지 않는 것을 본 환온군은 방심하면서 퇴각 속도를 높였다. 이때를 틈타 모용수는 전격 습격 작전을 폈다. 순식간에 환온은 5만 정벌군사의 6할인 3만을 잃었다. 환온은 패잔병을 모아 산양(강소성 회안)으로 물러나 주둔했다. 그리고 패전의 책임을 전부 군량보급의 책임자인 원진에게로 돌렸다. 원진은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덮어씌운 환온에게 격분하여 수춘(안휘성 수현)에 웅거하면서 전연에 항복하고 말았다.   

 

 

(22) 암살 모의와 모용수의 망명(AD369)

 

환온이 퇴각하자 모용수는 양읍(하남성 수현)을 거쳐 전연의 수도 업(하남성 임장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승전 포상 문제를 전연 조정에 상주했다. 태부 모용평은 날로 위엄과 명성이 떨치는 조카 모용수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태후 가족혼(황제 모용위의 친모) 또한 오래 전부터 시동생 모용수를 싫어했다. 당연히 모용평과 가족혼 태후는 서로 짜고 모용수를 살해할 음모를 진행시켰다. 죽은 모용각의 아들 모용해와 모용수의 장인 난건이 몰래 모용수에게 암살계획을 알려 주면서 말했다. 

 

“ 먼저 일어나야 이긴다.

  모용평과 모용장(황제 모용위의 형)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용수는 거절했다.

 

“ 피붙이 간의 다툼이야말로 나라의 혼란입니다.

  내가 조용히 죽을지언정

  차마 형제를 죽이면서까지 정권을 찬탈할 수는 없습니다.“

 

모용해와 난건이 거듭 재촉하자 모용수는 이렇게 말했다.

 

“ 그렇다면 차라리 제가 피하겠습니다.”

   

모용수는 아들 모용령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모용령은 일단 전연 모용씨의 근거지인 용성(요녕성 조양)으로 돌아간 뒤 조정의 적개심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주변을 흡수하여 스스로 힘을 기르는 것이 다음의 계책이라고 말했다. 모용수는 그것이 훌륭한 생각이라고 판단하여 몰래 빠져나가 북으로 달아났다. 모용수가 출발한 지 하루도 안 되었을 무렵 모용수의 다른 아들 모용린은 평소 아버지로부터 홀대받은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 계획을 조정 밀고해 버렸다. 다른 모용수의 측근들도 모두 모용수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북쪽으로 가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모용령이 아버지에게 마지막 수단은 전진에 투항하는 것이라고 건의했다. 모용수도 동의했다. 모용수와 모용령 부자는 조카 모용해와 함께 그 길로 말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장안을 향해 달려갔다. 전진의 부견은 모용수 부자를 크게 환영했다. 모용수에게 관군장군, 모용해에게 적노장군의 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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