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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8 : 작은 아버지의 유업을 못 지킨 남연의 모용초(A)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4월29일 18시3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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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 전연(AD37-AD370)과 후연(AD384-AD407)과 남연(AD398-AD410)의 뿌리 선비족

 

선비족은 선사시대부터 중앙아시아 북부 지역과 몽고와 내몽고 등지에 옮겨 다니며 살던 유목민족이다. BC 3세기경 당시 강력한 흉노족에 의해 선비족이 복속된 이래로 흉노족에 충성을 받쳤으며 흉노족이 한나라에 의해 정복된 이후부터는 한족에게도 충성을 받쳐 왔었다. AD 87년 흉노족의 족장 우류를 제거한 뒤부터 선비족은 흉노족으로부터 잠깐 독립하긴 했지만 유목하는 경제적 이유와 정치적 조직력이 매우 약한 탓에 AD 3 세기 중엽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지역을 유랑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중앙정권에 의해 위성국가의 지위를 내려 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전국이 서진에 의해 통일되어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된 AD 4세기가 되면서 선비족 집단은 강력한 세력으로 형성되었는데 서진 조정이 흔들리면서부터 여러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대(代)나라와 북위를 세운 탁발씨와 전,후연을 세운 모용씨였고 조금 지나서 서진을 세운 걸복씨와 남량을 세운 독발씨도 다 선비족 계통 국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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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 모용씨가 세운 전연과 후연은 요동반도 주변 지역을 기반으로 나라를 키워갔으므로 오랫동안 고구려와 전쟁과 갈등을 피할 수가 없었다. AD 342년 모용황이 고구려 수도 환도를 침공하여 5만 명 이상을 납치해 갔으며 광개토대왕의 조부인 고국원왕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다 주었고 AD346년에는 부여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부여 국민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대이동하기도 하였다. 전, 후연, 그리고 나중에 남연, 북연 및 서연 이 모든 나라의 시조는 고조 무선황제 모용외(AD269-AD333)다. 후연의 존립 기간(AD384-AD407년)은 광개토대왕의 재위 기간(재위 AD391-AD412)과 일치한다. 

 

(2) 전연 모용외의 죽음과 모용황의 계승과 동생의 쿠테타 음모 (AD333)

 

AD333년 5월 6일 전연의 무선공 모용외가 죽었다. 세자 모용황이 6월에 아버지가 갖고 있던 평주자사의 직책을 대리했다. 아직은 전연이라는 나라를 세우기 전이었으므로 모용외는 무선공이라고 불렸다. 자리를 이은 모용황은 장사 배개를 군자좨주로 삼고 고후를 현도태수로 임명했다. 대방태수 왕탄을 좌장사로 삼았으나 사양하고 요동태수 양무를 추천하자 그를 좌장사로 지명하고 왕탄은 우장사로 등용했다. 

 

모용황은 매우 엄격하고 깐깐하면서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반면 서형 모용한(翰)과 동복동생 모용인과 모용소는 총명하면서도 용기가 있고 또 인자하여 아버지 모용외는 물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당연히 모용황이 그런 형제들을 시기하고 질투했다. 모용한(翰)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가족을 이끌고 외가인 단씨에게로 도망갔다. 모용인이 아버지 모용외의 상을 당하여 도읍지인 극성(요녕성 금주)로 돌아온 참에 동생 모용소를 불러 말했다.

 

“ 형님(모용황)이 까다롭고 엄격하시니 장차 우리의 신변이 걱정되는 구나.”

 

모용소가 말했다.

 

“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적자입니다.

  당연히 일정한 나라의 몫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까지 의심받을 일을 한 적이 없으니

  틈을 보다가 일을 일으키면 됩니다.

  형님이 바깥에서 군대를 가지고 오시면 

  나는 안에서 호응하겠습니다.

  성공하는 경우에 저에게 요동을 주십시오.

  남자가 일을 벌여서 이기지 못하면 죽는 것이고

  건위장군(모용한)처럼 이역에서 구걸하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요.“

    

모용인이 말했다.

 

“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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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인은 임지인 평곽(요녕성 개평현)으로 돌아갔다. 그런 뒤 10월에 모용인은 군사를 일으켜 서쪽 금주로 진격할 참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모용인과 모용소가 반란을 모의한 것을 밀고를 하니 모용황은 사람을 모용인에게 보내 몰래 조사하도록 했다. 모용황의 사자가 평곽에 도착하자 모용인은 계획이 탄로 났다고 판단하고 사자를 죽였으며 즉시 평곽으로 돌아가 점거하면서 수성자세에 돌입했다. 모용황은 모용소에게 자진을 명령하고 고후,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 모용한 등을 보내 모용인을 토벌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모용인의 수비군사들은 모용황의 토벌군을 격파하여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이 사로잡히고 모용한과 봉혁은 패잔병을 이끌고 돌아왔다. 이 지역의 모용황의 군사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가니 모용인이 요동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단료와 선비족의 여러 부족들이 강퍅한 모용황에 대하여 반기를 들면서 모용인과 서로 연대하고자 하였다. 모용황은 이때에 비로소 자신의 엄격한 통치에 대하여 반성하고 그 부분을 항상 지적하던 황보진을 평주별가라는 중책에 임명했다.

 

모용황의 토벌군을 훌륭히 저지한 모용인은 기세가 등등했다. 모용황이 직접 출정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1월이라 날씨도 몹시 추웠지만 모용황의 병력 자체가 대수롭지 않다고 폄하했었다. 모용인은 전군을 성벽에 모아놓고서 외쳤다.

 

“ 적군의 말 한필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라.”

 

문제는 안에서 일어났다. 모용인 휘하에 있던 모용군이라는 친족이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모용황에게 항복한 것이다. 모용인의 군대는 크게 흔들렸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모용황의 대군이 들이닥쳐 모용인 군대를 대파하였다. 모용인은 도망가다가 배반한 부하에게 붙잡혔 모용황에게 끌려왔다. 모용황은 반란에 가담한 모용인의 부하의 목부터 내려쳤다. 그런 다음에 모용인에게 사형을 내렸다. 모용인의 부하들은 모두 동쪽 고구려로 도망갔다. 모용황 군사들이 추격하여 적해와 방감은 잡아 죽였지만 동수와 곽충은 무사히 고구려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해 6월 단료가 중군장군 이영과 군대를 보내 모용황을 습격했다. 모용황의 장수 장맹이 이영을 사로잡았다. 단료는 다시 단란에게 수 만 명의 대군을 붙여서 유성의 서쪽 강가에 주둔시키고 우문씨와 힘을 합해 모용황을 칠 준비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모용황은 기다리지도 않고 보기병 5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유성(요녕성 조양)을 향해 진격했다. 모용황의 5만 대군이 쳐들어온다고 하자 단란은 싸움을 포기하고 혼비백산 도망쳐 버렸다. 우문씨의 군사들도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 버렸다. 모용황이 군사들에게 말했다.

 

“ 저들이 공을 세우지도 못하고 도망갔으니 

  반드시 다시 쳐들어 올 것이다.

  마땅히 유성 주변에 매복하고 기다렸다가 저들이 올 때를 기다려라.“

 

봉혁과 수 천 기병을 풀어서 마두산(요녕성 조양부근의 산)에 매복시켰다. 과연 몇 개월 뒤단요의 군사들이 쳐들어 왔지만 매복한 모용황 군사에게 전멸 당하였다.  

 


(3) 모용황의 전연 건국과 후진과의 연대(AD337)

 

AD337년 9월 진군장군부의 좌장사 봉혁과 여러 막료들이 모용황에게 연왕의 칭호를 사용하기를 권했다. 모용황은 부하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연왕에 오르기로 하고 봉혁을 국상, 한수를 사마, 배개를 봉상, 양무를 사예로 임명했다. 모용황은 다음 달 10월에 연왕에 즉위하고 위나라 조조와 진나라 사마염이 한 예에 따라서 예식을 올림과동시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부인 단씨를 왕후로 삼고 아들 모용준을 왕태자라 불렀다. 

 

단료의 군대들이 끊임없이 서쪽의 후조 영토를 침략하자 모용황은 양렬장군 송회를 후조에 보내 스스로를 낮추어 후조의 번속이라고 칭하면서 동생 모용한을 인질로 보내고 동시에 단요를 토벌하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후조 석호는 크게 기뻐하면서 인질을 받지 않고 돌려보내면서 후하게 위로하고 답례를 보냈다. 그리고 비밀리에 내년에 연합작전을 펼 것을 약속했다. 

 

 

(4-1) 모용황의 영토 사방 확장(AD339)

 

후조의 남진 공격을 잘 받아친 동진은 요녕성 전 지역을 장악한 모용황에게 연왕 칭호를 내려주지 않았다. 동진 조정 내부에 사도 왕도가 죽는 등 여러 곡절이 있어서 혼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용황은 동진 조정에 장수 유상과 국운을 보내 최근의 승전을 보고하고 후조를 맞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임시방편으로 칭왕하지 않을 수 없었음 알려서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동진 조정에 함께 군사를 크게 일으켜 중원지역(즉 후조)를 토벌하자고 제안했다.   

 

겉으로 연대한다고 했던 후조가 버티고 있는 서쪽과 남쪽을 공략하는 대신 모용황은 적극적인 동진정책을 펴서 고구려 영토를 침략했다. 전연의 군사가 신성(요녕성 신빈)에 이르자 고구려왕 고소(고국원왕)가 동맹을 맺기를 간청해 오므로 모용황은 군대를 돌려 돌아왔다. 대신 아들 모용낙과 모용패를 북쪽 우문씨 영토로 보내 그 지역을 경략했다.(AD339) 

 

 

(4-2) 전연의 수도 이전 : 극성(요녕성 금주)에서 용성(요녕성 조양)으로(AD342) 

 

동진 조정에서는 돌아가는 전연 사신 유상과 함께 곽희를 사절로 보내었는데 떠난 지 6개월이 지난 AD341년 7월에 극성으로 돌아왔다. 모용황은 유상의 공로를 높이 사서 동이호군, 영대장군부 장사로 임명하고 당국내사 양유는 좌사마, 이홍은 우사마로 삼았다. 모용황이 아들 모용각을 도요장군으로 삼고서 동생 모용인이 장악하고 있던 평곽에 진수하도록 했다. 모용각이 평곽에 도착하고서 백성들을 위무하면서 새 이주민들을 진심으로 보살피자 민심이 크게 그를 따랐다. 여러 차례 군사를 내어서 동쪽의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고구려가 모용각의 위용에 눌려 국경을 감히 넘어 올 생각을 못했다.

 


(5) 모용황의 고구려 공략과 고국원왕의 수모(AD342)

 

AD342년 겨울 모용황은 동진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연왕의 직책을 내려 받자 수도를 극성(요녕성 금주)에서 약 100KM 서북쪽에 있는 용성(조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다. 서형 모용한이 이렇게 건의했다.

 

“ 지금 우문씨 들의 세력이 매우 강성해졌습니다.

  자리를 찬탈한 우문일두귀가 난폭하고 실정하므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용렬하기 짝이 벗고 아둔합니다. 

  장수들 또한 형편없는 무리들입니다.

  방위시설이 엉망이고 군사들의 대오나 기강도 해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소신이 그 나라에 있으면서 그 곳 지리를 제대로 새겨 두었습니다.

  비록 갈족(후조)에 의지하고 있지만 난이 일어날 때

  실제로 구원해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거사 하시면 백번거사에 백번 승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고 

  그들 또한 우리를 훔쳐보려는 생각을 한 시도 버린 적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문씨를 친다면 다음이 자신들일 것이라고 알고 

  곧바로 우리 후미를 공격해 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슴 속과 뱃속의 걱정이오니 

  의당 이들부터 먼저 쳐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세력을 보건대 한 번 거병이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문씨들은 오직 지키기만 하는 오랑캐들이니 

  이 번 공격을 틈타고 후미를 공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은 다음에 우문씨를 치고 나서

  군대가 강성하고 백성이 부요해 지고 나면

  중원 사해를 도모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용황이 모용한의 대범한 계략에 찬사를 보냈다.

 

“ 훌륭한 말이요.”

 

그러나 모용황은 서북쪽 우문씨보다도 동쪽의 고구려에 더 관심이 높았다.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했는데 가는 길은 두 길이었다. 하나는 북쪽으로 평원을 가로지르는 길이었고 다른 한 길은 남쪽 길로써 험하고 가파르면서 위험했다. 모두 들 북쪽 길로 가자고 했다. 모용한은 북쪽 길은 방비가 삼엄할 것이므로 남쪽 길로 가자고 했다. 다만 일부 군사를 나누어 북쪽으로 보내어 고구려군의 방어를 분산시키는 것은 좋은 계략이라고 말했다. 모용황도 모용한의 생각을 수용했다. 11월 모용황이 직접 강병 4만을 이끌고 남쪽 길로 나섰고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세웠다. 별도로 장사 왕우와 군사 1만 5천을 북쪽으로 보내 고구려로 향하게 했다.

 

고구려에서는 고국원왕 고소가 강병 5만 군사와 동생 고무를 파견하여 북쪽의 왕우 군사를 대적했다. 고소는 직접 노약한 병사를 이끌고 남쪽 길에서 막았다. 길이 험하므로 노쇠한 병사로도 잘 막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모용한이 먼저 도착하여 고소와 싸웠고 곧바로 모용황의 대군이 들이닥쳐 뒤를 받쳐 주었다. 과거 후조의 장수였던 좌상시 선우량이 자신을 살려 준(AD338년) 모용황에게 은혜를 갚겠다면서 몇 명의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 진영으로 쳐들어갔다. 선우량 무리가 고구려 진영을 크게 휘젓는 동안에 고구려군은 혼란에 빠졌고 사기도 많이 떨어졌다. 모용황의 군대가 고구려군을 무너뜨리고 진격하여 수도 환도성에 들어갔다.   

 

고구려 고국원왕 고소는 단기로 달아났고 모여니는 고소의 처와 어머니를 사로잡았다. 모용황이 군사를 되돌리려고 하자 장수 한수가 말렸다.

 

“ 고구려 땅은 반드시 수비부대를 세워 두셔야 합니다. 

  지금 주군이 도망쳤고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우리가 군대를 물리고 나면 저들은 다시 비둘기처럼 모여들어

  다시 세력을 키울 것이니 장차 걱정거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고소 아버지(미천왕)의 시체를 파헤쳐서 싣고 

  그 어미를 인질삼아 고소가 자신의 몸을 묶고서 항복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런 다음에 모두 풀어주는 정책이 가장 좋은 정책입니다.“ 

 

모용황은 한수의 말대로 미천왕의 묘를 발굴하여 시체를 싣고 모든 고구려 왕실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 호를 포로로 잡고서 환도성 궁실을 모두 불 태우고 파괴한 뒤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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