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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30>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⑨정초[鄭招(?-1434), 시호 文景公]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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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7월29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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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V.9 정초[鄭招(?-1434), 시호 文景公]

 

정초는 세종의 전반기(세종 즉위년-세종 16년)사람이다. 세종 전반기 치적으로는 어느 누구에도 뒤지지 않은 공적을 남긴 신하였다. <속육전>의 개정에서부터 <농사직설>의 편찬과 <역법>의 개정과 왕실의 <회례문무악> 작곡 및 <삼강행실도>의 발문작성과 혼천의 발명과 병서의 일종인 <진서(陣書)>라는 책을 펴내는 등 법, 악, 농, 병, 예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신하였다.

 

[충신과 간신]

 

정초는 고려시대 사헌집의를 지낸 정희의 아들로 경상도 선산에서 태어났다. 태종 5년 4월 문과복시에 2등으로 급제하여 내자직장으로 관문에 들어섰으며, 태종 7년 4월에는 문과친시 2등으로 좌정언이 되었다. 충령대군이 갑자기 세자로 책봉됨에 따라 유관, 맹사성, 이지강, 권우, 윤회, 김익정과 함께 충령의 교육을 담당하는 스승으로 초빙되었다. 충령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경연에 나아가 세종의 상임시강원으로 강의하였다. 세종이 왕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경연에 나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자고로 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가 임금을 아양으로 즐겁게 하는 모양이

    저러하지만 그러나 끝까지 명을 보전한 자는 없다.

    (自古姦佞之臣 媚悅  其君 其狀如此 然未有能保其終者 : 세종 즉위년 11월 29일)” 

   

그러자 시강관 정초가 말을 이어 이렇게 말했다.; “책에서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는 것은 저 같은 혼미한 자도 능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 잡으시고 근본에 맑게 투철하신 다음에야 사람의 마음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명해지며 혼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문장만 보고 능히 간신 충신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은 자고로 없었습니다(세종 즉위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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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경연 중에 역사서 춘추를 읽던 중 “큰 물이 넘치다(大水).”라는 기사에 관하여 <호서(胡書)>라는 책에 “착하지 못한 사람이 천변을 당하여 물이 범람하고 재앙이 찾아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요임금을 인용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세종이 이렇게 언급했다.

 

   “그렇게 말하는 자가 필시 많다. 상서로운 일만 말하기를 좋아 하는 신하 

    가 있는 가하면 재변만 말하기를 좋아하는 신하도 있다. 오로지 상서로   

   운 것만 말하고 재변을 말하지 않는 것이 어찌 옳은가. 상서로운 일을     

   만나면 상서로운 말을 하고 재변을 만나면 우려와 두려움을 말해야 옳    

   을 것이다. (如此者必多矣 人臣有喜言祥瑞者 有喜言災變者 專言祥瑞而不  

   及災變 是豈可乎 値祥瑞則言祥瑞 遇災變則言憂懼可也

   : 세종 1년 7월 25일)”   

 

이 말을 듣자 시강관 정초가 송나라 진종 때 정승 이항의 예를 들며 이렇게 권고하며 말했다.: “임금이 어리면 연장자가 사방의 어려움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온갖 오락과 향락에 물들면 장차 토목갑병 혹은 제사를 지내야 할 일이 일어날 것이라 했습니다. 곧 항이 죽자 과연 <천서>의 예언대로 일이 일어나 왕이 이항의 선견지명을 탄식했다고 했습니다(세종 1년 7월 25일).”

  

변계량은 임금 앞에서 이런 불길한 말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꾸짖었지만  임금 앞이라고 듣기 좋은 말만 하지 않는 정초의 강직함이 잘 드러나 있다. 


[강직한 정초]

 

정초의 강직함을 잘 나타내는 일화가 기록되어있다. 심온은 세종의 장인이지만 병권문제에 관한 태종과의 갈등으로 세종이 즉위하는 해에 사약을 받았던 사람이다. 세종이 왕위에 십년 쯤 재위했을 때 의정부와 육조의 관원들이  심온의 지위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심온의 죽음은 ‘의심스러운 옥사’라고 세종에게 탄원하였다. 그 이유로, 

 

   첫째, 그 당시 연루자 중에 죄를 면한 자도 있었고, 

   둘째, 심온이 사신으로 귀국하기 전에 미리 강상인을 처형한 것을 보면            태종의 본의도 심온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심온은 억울하게 죽은 것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태종이 살아있을 때라면 입도 벙끗 못할 내용이었다. 태종이 죽은 지도 6년이나 되었으니 이제 세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심온의 명예회복을 추진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세종은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겠노라고 대꾸했다. 이조참판 정초는 그 당시 사간으로서 심온의 옥사와 국문에 직접 참여를 한 사람이었다. 심온의 심문과 압슬과정을 모두 현장에서 지켜보았던 정초가 이렇게 증언했다.; “도제조 유정현이 심온에게 말하기를 ‘공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금일 저렇게 국문하는 형세를 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니오. 끝내 불복 하시려오.’ 이 말을 들은 심온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일일이 승복했습니다(세종 11년 3월 17일).”

 

웬만한 신하라면 잠자코 있었을 것이다. 온 의정대신이 다 심온을 두둔하고  있었고 세종도 분명히 그럴 의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초는 현장을 똑똑히 증언하며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세종은 그 후 죽을 때까지 장인의 명예회복을 승인하지 않았다. 정초가 죽고(세종 16년 6월)나서도 심온 복권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장인이라도 부왕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온은 문종 1년에 가서야 외손자 문종에 의해 안효공(安孝公)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복권되었다. 

 

원래 사형죄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재산을 국가가 몰수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강력하게 법을 집행하기 위해 ‘재산을 몰수하는 형벌’을 세종은 여러 범죄에 도입하였다. 예컨대 동전을 사용하지 않는 자는 경중에 따라 중한 자는 장 1백대에 몸은 수군에 충당하고 재산을 몰수한다는 영을 내린 적이 있었고, 다른 사람의 노비로 가장하여 궁궐로 들어오는 경우나 강을 건너 몰래 밀무역을 하는 경우에도 재산 몰수형을 다른 벌과 함께 부과하였다. 형조참판 정초는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너무 과중하므로 제거하자고 건의했다(세종 8년 4월 19일). 세종은 정초의 말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달력의 개선]

 

세종은 원래 천문기상에 조예도 많았고 따라서 월력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유순도라는 사람을 시켜 부정확한 달력을 고치고자 애를 썼으나 그는 갑자기 월력을 바꾸면 큰 혼란이 예상된다고 하니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때 정초가 나서서 말했다.

 

   “황명력과 당나라 일행력 선명력 등의 책을 참고하여 상세히 연구하면   

    거의 바르게 할 수 있겠습니다. (以 皇明曆 唐 一行曆 宣明曆 等書 

    參考詳究 則庶幾得正矣 : 세종 12년 12월 11일)”

 

세종은 천문의 법이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계산법을 익혀 둔 다음에 장래에 잘 아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정초는 몇 년을 씨름했지만 그 분야 전문가인 유순도는 나이가 많고 젊은 사직 김구경은 게으르므로 이 두 사람만으로는 직책을 충분히 수행할 수 없었다. 정초는 그렇다고 서운관 판사 황사우나 행부정 박염도 모두 용렬한 사람이니 정인지가 도와주면 어떻겠냐고 지신사 안숭선에게 부탁했다. 세종도 정인지가 그 분야 전문가는 아니지만 기초를 잘 닦아 놓으면 훗날 완성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혼천의 제작]

 

정초는 혼천의를 만드는 작업에도 깊숙이 참여했다. 예문관 대제학 정초와 지중추원사 이천과 제학 정인지 그리고 응교 김빈 등이 제작한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는 기구로서 당시 천문연구에 핵심 장비였다. 세종과 세자는 혼천의와 간의(간이 천체 측정기구)의 사용법과 응용법을 물었으며 해와 달과 별의 실험에 사용해 보고 장점과 문제점을 토론하였다. 실록에는 세종과 세자가 매일 간의대를 방문해 정초와 의논했다고 기록했다(세종 15년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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