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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22>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⑤맹사성[孟思誠(1360-1438), 시호 文貞公,계속](下)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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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6월03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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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세종과 맹사성]

 

세종은 즉위하자 바로 변계량, 박자청과 함께 맹사성에게 말을 한 필 씩 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경이 관습도감제조로 악사들에게 새 가사를 잘 가르쳐 율조와 

    합치되므로 부왕이 매우 기뻐하셨소. 

    (卿爲慣習都鑑提調 敎伶人新詞 合 

    於律調 父王歡愉 : 세종 즉위년 11월 10일)”  

 

맹사성은 음악에 관해 조예가 매우 깊었으므로 세종은 늘 그에게 음악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 악사의 연주를 지켜 본 세종이 잘못을 지적하며 말했다.

 

  “<시경>에는 노래 사이에 <어려>를 부른다고 했고 <서경>에는 생과 용을   

 교대로 부른다고 했으니 당상악과 당하악이 번갈아 부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 동시에 연주하는 것을 보니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우 

  리나라는 본래 향악을 배웠으므로 종묘제례 때 먼저 당나라 음악을 연주 

  하고 삼헌 할 때에 비로소 향악을 연주하는데 어르신들이 평소에 듣던  

  향악을 사용하는 것이 어떨지 맹사성과 의논해보라.  

   (詩間歌 魚麗 書 笙鏞以間 則堂上堂下之樂迭奏明矣 而今日時同奏吾以爲   

  非也 且我國本習鄕樂 宗廟之祭 先奏唐樂 至於三獻之時 乃奏鄕樂 以祖   

   考平日之所聞者 用之何如 其與孟思誠議焉 : 세종 7년 10월 15일)” 

 

세종이 어느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말이다.

 

[황희와 맹사성의 교육진흥책]

 

맹사성과 황희의 정치철학과 정치경력은 거의 포개진다고 할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황희가 세종 8년 5월 13일 먼저 우의정이 되었다. 8개월 뒤 황희가 좌의정으로 승진 할 때 맹사성은 황희의 우의정 자리를 이어 받았다(세종 9년 1월 25일). 4년 뒤 황희가 영의정으로 승진할 때에는 맹사성이 황희의 좌의정 자리를 이어 받는다. 세종 17년 2월 1일 맹사성이 은퇴하기까지 거의 십년을 두 사람은 자리를 주고받았다. 이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좋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치철학이나 의식구조도 서로 잘 맞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거의 모든 정책 사안에서 두 사람의 의견은 같았다. 이 두 사람이 같은 입장을 공동으로 펼친 대표적인 사례가 교육진흥책이다.

 

세종 11년 1월 3일에 올린 교육진흥책 6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i) 모든 조관의 자제를 입학시켜 25세까지 교육하며 유음자손으로 

      오부학당에 입학하지 않은 15세 이상인 자는 성균관에 입학시킬 것, 

   (ii) 무과시험에 편중되는 지원경향을 시정하도록 조치할 것, 

   (iii) 문장(사문,斯文)을 짓는 교육을 강화할 것,

   (iv) <내외학춘추과시법>을 강화하여 역사와 경서 교육을 강화할 것, 

   (v) 생원의 성균관 입학을 독려하고 성실한 학생에게는 관직을 주어  

       입학을 장려할 것, 

   (vi) 각 도에 도회소를 설치하여 학생을 모아 경서와 사서를 특강하게 

       할 것 등이었다(세종 11년 1월 3일).

 

세종은 황희와 맹사성이 제시한 이 시책을 빠짐없이 모두 받아들였다.       


[노비자손의 양천문제] 

 

공천이든 사천이든 천민이 양민과 결혼하는 경우에 그 자녀의 양천 자격은 원칙적으로 아버지의 신분에 의해 결정된다(노비종부법,從父爲良法). 즉, 천부(賤父)와 양모(良母)가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를 따라 천민이 되고 반대로 양부(良父)와 천모(賤母)가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양민이 된다. 태종 때 세운 노비종부법(從父爲良法)의 원칙이다. 그러나 천모가 자녀를 양민이 되게 하기 위해 아이의 아버지를 양인이라고 우기거나 소송을 제기하므로 소송도 많아지고 또 천민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맹사성은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청하옵기는 지금부터 연한을 정하여 양인 남자가 천인을 아내로 삼지 못하도록 하는 편리하겠습니다. : (세종 11년 7월 25일)”   

대사헌 김효손도 맹사성을 거들었다. 그러나 세종은 그 요청을 거부했다.

 

   “조종이 법을 세운 뜻은 양민의 수를 늘이고자 함이었다. 만약 그 법을

   만들면 조종의 법을 세운 뜻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조종의   

   법을 고치는 격이 된다. 그 법을 세우느니 차라리 천자수모법을 복구하는

   것이 낫겠다. (祖宗立法之意 欲令良人日增也 若立此法 則與祖宗立法之意 

   相遠是改祖宗之法也 與其立此法 寧復賤者隨母之法也 :   세종 11년 7월 25일)”

   

[태종실록의 열람문제]

 

세종은 원래 변계량으로 하여금 태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그가 도중에 죽자 황희와 맹사성에게 감수를 맡겼다(세종 12년 4월 27일). 춘추관에서 태종실록 작업을 마쳤다고 보고하자 세종은 그 내용이 보고 싶었다. 역대 제왕들이 전왕의 실록을 다 봤지만 하륜이 보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하자 태종은 태조의 실록을 보지 않았다. 맹사성이 말했다: “이번에 편찬한 실록은 모두 좋은 말과 선정을 기록했으므로 고칠 것이 없으며 더구나 전하 같은 성군께서  어찌 고치라고 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 보시게 된다면 후세의 임금도 보고 고치자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관들도 임금이 볼 것을 우려하여 기사를 곡진하게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장래에 말을 전달하겠습니까(세종 13년 3월 20일).” 

 

맹사성의 그 지적을 듣고는 세종은 태종실록 보는 것을 포기했다.


[장리(贓吏)의 자손을 쓸 것인가]

 

수뢰죄를 범한 관리, 즉 장리(贓吏)의 자손을 등용하는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세종이 묻기를,

 

   “장리의 후손을 어떤 자는 등용해야 한다하고 어떤 이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일정한 법을 만든 다음에 등용하는 것이 좋겠는데 준다면 

    어떤 직을 주는 것이 좋겠는가. (贓吏之後 或用或否 宜立一定之法 如用   

   之則授何等職 : 세종 14년 5월 14일)” 

 

장리의 자손을 등용하면 탐오한 자들이 무서울 것이 없어질 것이라는 이유로 지신사 안숭선은 반대했다. 김종서는 등용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의정대신에게 물어봤다.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은 고사를 보면 아비가 천해도 자손이 훌륭한 경우가 많았으며 사람을 쓰는 것에는 출신성분을 보지 않는 것이 이미 오래 된 관행이라고 했다. 출신 성분이 낮다고 사람을 쓰지 않는 것은 정말 도량이 좁은 처사라고 지적했다. 우의정 권진은 그러나 장리의 자제에게 의정대신 육조 대간과 같은 중책을 맡기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군관직에 국한하는 게 좋겠다고 절충안을 제시했다. 세종은 결심했다.

 

   “써야겠다(用之可也 : 세종 14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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