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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20>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④신개[申槪(1374-1446), 시호 文僖公, 배향공신]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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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5월20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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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4 신개[申槪(1374-1446), 시호 文僖公, 배향공신]

 

신개는 황희, 허조, 최윤덕과 함께 세종의 묘정에 배향된 7공신 중에 하나이다. 두 형(양령대군 제와 효령대군 보)과 일찍 타계한 스승 이수의 3명을 제외하면 이 4명이 세종의 묘정에 배향된 ‘진정한 세종의 신하’라고 할 수 있다. 신개는 세종의 공법(貢法)을 강력하게 추진한 인물이다.  

 

신개는 조선 개국과 함께 치러진 과거에 급제하여 태조 1년(1393) 스무 살의 나이로 사관(史官)이라는 공직의 길을 시작하였다. 태종 때에는 주로 사간원에서 봉직하였으며 태종 17년에는 공조참판으로 북경에 천추사로 다녀왔다. 세종 즉위 초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와 황해도 도관찰사로 나가 있었으며 세종 5년 12월 11일 형조참판으로 중앙에 복귀하였지만 곧 조말생 뇌물사건에 연루되어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세종 6년 9월 7일). 1년 뒤 형조참판으로 돌아 왔지만 황희와 함께 서달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황해도 강음으로 귀양갔다(세종 9년 6월 21일). 6개월 만에 유배에서 풀려 난 신개는 세종 12년 4월 좌군총제가 되었다가 석 달 뒤 7월 3일 예문대제학으로 임명되었으며 세종 13년 2월 대사헌이 되었지만 또다시 민여익의 처 곽씨 사건에 말려들어 감금되었다가 열흘 만에 풀려난다. 그 후 중군 총제직을 포함하여 서반 직을 섭렵하다가 다시 대사헌으로 임명되었으나(세종 14년 5월 9일), 다시 조선 사건에 관련되어 좌천된다(세종 15년 윤8월 20일). 6년 동안 세 번의 사건과 관련되었다. 대부분 무혐의 또는 가벼운 혐의에 불과했다.

 

세종은 신개를 이조판서로 임명하였고(세종 15년 11월), 약 2년 뒤에는 형조판서로 임명한 뒤 세종 18년 4월 참찬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 신개는 세종 편에 서서 공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자는 의견을 폈다. 농사의 수확을 실제로 측정하여 과세의 기준으로 삼는 손실답험제도는 폐단이 많았지만 조정신하들은 이 제도만을 완강하게 고집할 때 공법으로써 이를 개혁하자는 세종 편에 선 몇 안 되는 동지가 신개였다(세종 18년 2월 23일).

찬성 신개가 대사헌 이숙치와 함께 나서서 다음과 같이 세종을 지지했다.

 

   “상교가 지당하십니다. 근래 손실답험의 부정확성이 너무 크므로

    공법을 실시하는 것의 옳음보다 못합니다. 

    (上敎然矣 近來損失之不中尤甚 莫若行貢法之爲善也

    : 세종 18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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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잠정적으로라도 공법을 시행하고 싶었다. 선왕의 법이라 함부로 손실답험법을 고치지 못하지만 시험 삼아 일,이 년 만이라도 공법을 시행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신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반대를 고집하던 신하들도 공법에 대한 반대의 강도를 점차 낮추어가기 시작했다.

 

신개는 최윤덕과는 달리 순수한 문관이었으나, 오히려 국방과 관련한 무공도 두드러진 신하라 할 수 있다. 특히 제1차 파저강 전투 이후에도 노략질을 거듭하는 북쪽 방면 오랑캐에 대한 수비에 관해서 글을 올려 상소한 바가 있던 사람이었다(세종 18년 9월 30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만주 일당을 한 번 더 토벌할지를 신하들에게 물었던 세종은 토벌전쟁을 적극 찬성하는 유일한 의정대신 신개에게 도승지 신인손과 좌부승지 김돈을 보내 제2차 파저강 토벌전략을 수립하도록 명령했다(제2장 세종의 국방정책, IV의 제2차 파저강 전투 참조). 신개가 밤늦게 고안한 12개 전략과 세종 스스로 고안한 네 가지를 더해 총 16개 전략을 세워 제2차 파저강 토벌전쟁을 뒤에서 조종했던 인물이 신개였다. 그리고 평안도를 두 개로 분할한 것과 평안도 대장성을 건축할 것을 제안한 것도 신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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