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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18>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③허조[許稠(1369-1439), 시호 文敬公, 배향공신](中)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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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5월06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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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허조와 부민고소금지법 : 府民告訴禁止法]

 

예조판서 허조는 이렇게 생각했다.; “천하 모든 국가에는 인륜이라는 것이 있는데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의 신분질서가 그것이다. 조금이라도 이 질서를 능멸하고 훼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아래 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조금이라도 틈이나 허물이 생기면 그것을 꼬투리 잡아 문제 삼거나 소송을 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허조가 세종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만약 그런 나쁜 풍조를 금지하지 않으시면 그 폐단은 임금께서 신하를 모으지 못하고 아비가 자녀를 모으지 못하는데까지 이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하지만 방지계책 두 개를 정중히 올립니다(세종 2년 9월 13일).”

 

그 두 계책이라는 것이 하나는 종이 상전을 고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급관리가 상급관리를 고발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세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허조가 당 태종과 주문공의 예를 들어 도입한 부민고소금지법(府民告訴禁止法)의 시작이다. 세종은 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법으로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세종은 허조에게 물었다.

 

   “자기에게 억울한 바 있어도, 예를 들어 수령이 자기 노비를 뺏어 

    남에게 주어도, 소원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옳은 일인가.

    백성은 모두 원하는 바가 달라 왕이 잘 다스리지 않으면 혼란해질 것         

    이므로 반드시 최고 통치자를 세워 다스리는 법이다. 억울한 소송을 받       

    아 주지 않는 것이 어찌 다스림에 해가 안 된다는 말인가.   

 

    至於自己訴冤 悉令勿受 則假如守令 奪民奴婢 以與他人 更不受理可乎

    民生有欲 無主乃亂 必立君長而治之 不受訴冤 則豈不害於治體

    : 세종 13년 6월 20일)” 

 

허조는 늘 그렇듯이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 “고려가 오백년 유지된 것은 바로 윗사람을 능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민과 수령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와 같고 나아가 신하와 임금의 관계와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를 허용한다면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고소하는 것과 신하가 임금을 고소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더구나 때때로 중앙관리를 보내 일일이 백성의 말을 듣게 하면 되는 것 아니냐.” 

 

항상 백성들 입장에 서서 문제를 보려했던 세종은 허조의 논리와 부민고소금지법의 중대한 모순이 있음을 지적했다.

 

    “이미 고소금지의 법을 세웠는데 또, 중앙에서 조관을 보내 백성의 

     고소를 들어 준다니 실로 모순이다. 때때로 조관을 보내면 된다고 하나      

     그렇다면 그것은 특수한 경우이니 <육전>에 올려놓을 법은 못되지 

     않는가. 옛말에 ‘고사를 모범삼지 않는 근거가 없는 법을 경계하라’

     했는데 장차 있을 폐단을 어찌할 것인가. 

 

    (旣立告訴之禁 又遣朝官 使民       

     陳訴 實爲矛盾 時遣朝官 特一時之法 不合載諸六典 古人戒事不師古 

     立法無遽 弊將若何 : 세종 13년 6월 20일)”

  

허조는 대답을 못했다. 예조판서 신상, 이조판서 권진, 형조판서 정흠지, 대사헌 신개 모두 백성의 억울한 부분에 대해서만은 고소를 허용하자는 생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세종 29년 2월 21일 의정부의 계에 의해 다음 네 가지에 해당되는 경우에는 백성들은 억울함을 고소할 수 있게 하였다.

 

  (i) 노비나 토지의 잘못된 판결(奴婢田地誤決),  

  (ii) 부역이 균등하지 못한 점(賦役不均),

  (iii) 세금이 과중한 점(殮過重),

  (iv) 환곡이 증감되는 점(糶糶加減).    

 

그래도 이 문제에 관한 한 허조는 소신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2년 반이 지나 허조가 이 문제를 또 제기한 것이다.

 

   “부민원억(部民怨抑)의 소송을 받아들여 관리의 오판여부를 다시 재판

    하게 하셨으나 이것으로 존비의 구분을 잃을까 두려우니 원컨대 지난

    번 소신의 헌책을 받아들이소서. (受部民怨抑之訴 使之聽斷 

    則恐失尊卑之分 願依前日小臣獻策 : 세종 15년 10월 23일)”

 

여기서 ‘지난 번(前日)’이라 함은 세종 13년 6월 20일에 있었던 제안 즉, 일단 소송을 금지하되 수시로 파견관을 보내 지방관을 감시하고 또, 민원을 들어 처결하자는 안이다. 세종이 대꾸했다.

 

   “고금 천하에 백성들의 억울함이 있어도 말을 못하게 하는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경의 뜻이 아름답기는 하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많다. (古今天下 安有所民不言冤抑之理乎 卿之志則善矣 

    施於事則有防 : 세종 15년 10월 23일)”

 

허조가 나가자 도승지 안숭선에게 세종이 말했다. 

 

   “조는 고집불통이구나. (稠固執不通 : 세종 15년 10월 23일)”

이 일이 원인이 되었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꼭 20일 뒤인 세종 15년 11월 13일 이조판서 허조는 판중추원사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 신개가 들어온다. 중추원은 관장하는 일이 없는 당상관의 대기 장소로 최고직급인 판중추원사는 종1품이다. 형식상으로는 승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좌천에 가깝다. 중추원은 최윤덕으로 영중추원사로 삼는 세종 18년에는 최고직위가 정1품 관서로 승격된다. 


[신문고 운영문제]

 

세종이 허조를 높이 평가하여 많은 이조업무를 그에게 맡겼지만 여러 번 의견차이가 있었다. 첫 번째가 천민 여노비와 양민 사이에서 난 자녀의 양천여부 문제였고(세종 6년 7월), 두 번째가 부민고소금지법(세종 13년 3월)이었다. 세 번째는 세종 14년 11월에 있은 신문고에 대한 의견 차이였다. 신문고란 따로 호소할 데가 없는 사람이 자기의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치는 북을 말하는데 태종 때 처음 시행되었다(태종 2년 1월 26일). 신문고를 두드리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i)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하고(爲究治),

  (ii) 개인적인 원을 풀기위한 것(懷怨敢行)이 아니어야 하며,

  (iii) 혹은 누명을 덮어씌우는 무고(誣告)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조건(i)의 적극적인 해결 노력이란 지방관사(서울은 주무부처;지방은 수령감사)에 억울함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관사가 제대로 처결하지 않고,   그래서 중앙의 사헌부에 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헌부 또한 제대 처결하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지방이나 해당 관서에 고발하지도 않고 바로 신문고를 두드리면 월소죄(越訴罪)에 해당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지방관서의 심리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신문고를 두드리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부민고소금지법을 믿고 지방관서도 진지하게 심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신문고를 울리면 사람을 지방으로 보내어 해당 사항을 반드시 다시 확인토록 하고 만약 지방관이 업무를 성실히 하지 않으면 책임을 물리기로 하였다(세종 4년 1월 21일).

 

신문고 울리는 것에 대한 조건이 이같이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매우 많은 사람들이 신문고를 울려대었다. 허조의 말대로 하면, “따라서 억울하다고 정소하는 자가 벌떼처럼 일어나고 미미한 공로를 가지고서 관직이나 상을 하사하시기를 희망하는 자가 끝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신문고를 울려대는 사람들은 지방 관료들의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관리의 수장격인 허조는 관리들이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관리를 두둔했다.: “요즈음 관리들은 마음과 절개를 갈고 닦아 처리할 일이 있으면 아침으로 생각하고 저녁으로 궁리하여 오직 털끝만큼의 실수라도 있을까 조심하니 어찌 잘못 판결하는 자가 있음을 알겠습니까?” 그러니 조금이라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억울하다고 북을 쳐대는 간사한 무리들을 죄를 줘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종의 생각은 달랐다.

 

    “버릇없고 건방지게 소를 올리고 있다는 것을 내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결정해야만 하는 일을 당하여서는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한 번에 잘라서 결정하기 어렵다. 하물며 어찌 무지한 백성 

     들이 사건의 시비를 제대로 가릴 수 있겠는가. 일일이 모람의 죄를 

     적용할 수는 없다. (冒濫申訴 予亦知也 然當國家議事之時 甲可乙否 

     未循一轍 況無知之民 豈能度事之是非乎 不可以冒濫一一罪之也 : 

     세종 14년 11월 3일)” 

 

허조가 나가자 세종은 김종서에게 저렇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무리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으냐고 물었다. 좌대언 김종서의 대답이다. 

 

   “관리가 잘못 판결한 것을 신소로 인해 발견하는 일이 간혹 있습니다.

    어찌 그것을 금지하겠습니까. (官吏誤決之事 因申呈以發者或有之 豈可

    防之乎 : 세종 14년 11월 3일)”

 

우대언 권맹손도 같은 생각이었다. 오결만이 아니라 묻혀있던 공로도 신소로 들어나게 된 적이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허황한 일로 고소를 하는 자는 엄벌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임금이 옳다고 수긍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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