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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17>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③ 허조[許稠(1369-1439), 시호 文敬公, 배향공신](上)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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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4월29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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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V.3 허조[許稠(1369-1439), 시호 文敬公, 배향공신]

 

허조도 황희나 변계량처럼 태종의 사람이었다. 사실 변계량 이상으로 태종의 사랑을 받았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옷을 평생 입고 다녔으며 죽을 때에도 그 옷으로 염을 하라고 할 정도로 효심이 남달랐다. 자기 스승(염정수)이 사형을 당하자 제자나 그의 옛 부하 등 모든 주변사람들이 염정수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허조만은 시체를 붙들고 애통해하며 관곽으로 장사지내 줄 만큼 의리도 뛰어났다. 과부가 된 처제가 허조의 맏아들 허후로 양자를 삼고 모든 재산을 허후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내 아들이 재물이 많아지면 반드시 사치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라고 사양했다. 그만큼 그는 청렴했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죽는 그 순간까지 국가를 걱정하면서 숨을 거두었던 인물이다. 


[응방인 사건과 좌천]  

 

허조는 권근의 문하로 열일곱 살(1376)에 진사과에, 그리고 열아홉(1378)에 생원과에 급제하여 관문에 들어섰다. 태조 때 좌보궐의 직을 받았으며 조선 초기 조선의 예절제도를 구축하는 일을 담당했다. 태종이 즉위하는 그 해 사헌부의 직을 수여하였지만 태종과의 첫 만남은 매우 좋지 않았다. 태종으로부터 사헌부 정 5품직인 잡단(雜端)에 임명되고 얼마 되지 않은 날 퇴근길에 태종의 매를 관리하는 응방인과 사헌부 정5품 잡단인 허조 사이에 길거리 마찰이 발생했다. 허조는 허조 대로 왕명을 감찰하는 사헌부 중급관리이니 권위를 세울 법했고 응방인은 응방인대로 태종의 비호를 받는 처지니 사헌부 잡단쯤이야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조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 거들먹거리는 응방인의 종 10여명을 가두어 버렸고, 응방인은 그 사실을 임금께 고해 바친 것이다. 태종은 즉각 허조를 불렀다. 7명의 아전을 데리고 입궐하려던 허조를 파수병이 세워 막았다. 한명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화가 난 허조는 꾹 참고 대궐로 들어가 태종을 뵈었다. 태종이 자기의 특별한 허가를 받은 응방인 종을 가둔 이유를 물었다. 사헌부 관리는 모두 왕명을 받드는 직책이므로 사헌부 관리를 능욕하는 것은 왕을 능욕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가두었던 것이고, 오래 풀어주지 않은 이유는 아파서 결근을 했기 때문이라고 허조가 대답했다. 그리고 대궐을 나오자마자 자기를 막아 세웠던 파숫군의 종 10명 마저 가두어 버렸다. 태종은 그 소리를 듣고 화가 치밀어 허조의 종 10명을 하옥했고 허조를 완산판관으로 좌천시켜버린 것이다. 

 

[태종의 감탄]

 

응방인 사건이 발생한지 1년 반 만에 허조는 이조정랑으로 발탁되어 돌아온다(태종 2년 7월).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다시 영월로 밀려나고 옥에 갇히기도 하다가(태종 5년 10월), 황희와 박석명의 강력한 추천으로 사헌집의가 되었다(태종 7년 8월). 이 때 허조는 토목공사의 폐해를 강력하게 규탄하며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공사를 서둘러 재촉하므로 사람들은 소나 양과 같이 험하게 부려지고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 허조의 상소내용이다 : “지금 이후로 각처의 영선공사나 벌목장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면 즉시 나라에 보고하고 그 책임자와 감독관의 죄를 물으시며 숨기고 감추는 자도 같은 죄로 다루시어 전하의 생명존중의 덕으로 백성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옵소서. 신은 국경에 있어 하는 일도 없이   하늘을 쳐다보며 성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길 수가 없어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태종 7년 10월 8일).”

 

이 상소를 읽은 태종은 깜짝 놀라며 얼굴색이 변하였다. 지신사(비서실장) 황희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이치를 아는 사람들이 아닌가. 어찌 저런 일을 듣지 못하고 

    내게 고하지 않았는가. 나의 충신은 오직 허조 뿐이구나! (汝等識理者      

    也 豈不聞此等事 何不告我歟 予之忠臣 惟許稠耳 : 태종 7년 10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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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허조를 세자의 스승인 우보덕으로 세웠다(태종 8년 5월 1일). 반 년만에 조대림 사건과 관련하여 노여움을 사게 되어 옥에 갇혔지만 세자 양령이 스승을 포함한 조대림 관련자들을 풀어주기를 태종께 간청하므로 다음해  허조는 풀려났다(태종 9년 1월 1일). 태종 16년 6월에 예조참판이 되었고 태종 18년 1월엔 개성유후사 부유후가 되었으며 그 해 3월엔 겸직으로 경기도 도관찰사직을 맡는다. 허조의 나이나 태종의 신임정도에 비하면 태종 재위 중 허조의 직위는 그리 높다고 할 수 없다. 개성유후사라는 관청자체가 한직인데다가 부유후라면 그리 눈부신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태종과 변계량과 허조 세 사람이 맞춤(對舞:세종 1년 5월 16일)을 추면서 허조를 가리키며‘이 사람은 진정한 재상이다(此眞宰相也)’라고 한 것을 보면 태종이 얼마나 허조를 신임했는지 알 수 있다. 


[세종의 이조판서]

 

세종이 즉위한 다음날에 있은 최초의 인사에는 허조가 빠졌다. 그 다음날인 8월 12일 세종이 좌, 우의정 및 이조 병조 당상관과 협의하여 발표한 인사에서 허조는 공안부윤으로 임명되었다. 태종 말년의 개성유후사 부유후나  공안부윤이나 매 한가지로 한직이라면 한직이라 할 수 있다. 동갑내기 변계량이 예조판서에 바로 등용된 것에 비하면 세종 즉위 직후 허조의 직급은 분명 낮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두 달 뒤, 즉위년 10월 16일 예조판서 변계량이 의정부 참찬으로 승진하면서 그 자리에 허조가 임명된다. 원래 예학에 매우 밝아서 태조와 태종 시대에 걸쳐 조선 초기 국가의 예절체계를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허조로서 예조판서직을 제수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종 치세에 있어서의 허조의 주된 역할은 예조가 아니라 이조(吏曹)였다. 말하자면 허조는 세종의 이조판서였다.


[점진적으로 불교를 혁파하라.]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조선이 들어서면서 불교에 대한 압박은 매우 강했다. 이념적으로 유교와 불교가 서로 상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원과 승려 들은 놀고먹으며 부역의무도 없이 법을 어기는 집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다. 또 엄청난 규모의 토지를 가지고 민폐를 끼치는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보았다. 세종 6년 사헌부의 상소로 불교에 대한 혁파의 요구가 촉발되었다. 대사헌 하연이 앞장섰다. 대소신료도 모두 동감했다(세종 6년 2월 7일). 오직 허조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혁파는 점진적이어야 합니다. 스님을 뽑고, 스님을 비판하고, 승록의 

    세 가지 일은 가히 서서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革之宜漸 寺社可汰 僧選 僧批 僧錄 三事可徐之 : 세종 6년 2월 7일)”  

 

세종이 맞장구 쳤다. 종교와 같은 관행을 혁파하는 것은 천천히 해야한다.  

 

   “이미 불법(佛法)을 이단이며 반드시 국가에 무익한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 법이 세상에 오래 실행되어왔으니 어떻게 영을 내린다고

    사람으로 하여금 이단이므로 무용하다고 빨리 알게 할 수 있겠는가.

    나 또한 급히 혁파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佛法旣謂異端 其無益於國必矣 然此法久行於世 安得令人

    人遽知其 異端無用之實乎 予亦以爲未可遽革也 : 세종 6년 2월 7일)”

      

[천민과 양민의 신분문제]

 

양민과 천민 사이에 낳은 자녀들의 신분이 양민인가 아니면 천민인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던 문제이다. 고려시대에는 ‘천민은 어미를 따른다는 법(賤者隨母之法)’이 있어서 비교적 간명했다. 어미의 신분대로 따라가면 되었다. 그러나 태종 때에는 양민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아버지가 양민이면 그 자녀도 양민이 되도록 법을 바꾸었다(종부법,從父以良法). 그러나 이 제도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천한 여종들이 양민 남자를 만나 낳은 자녀가 모두 양민이 됨으로써 천인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게 된 것이다. 이 문제를 가장 먼저 지적한 사람이 허조였다. 세종 6년 8월에 허조는 이렇게 건의했다.

 

     “공사 노비로써 양인에게 시집가서 나은 소생은 종부법에 따라 양인이

      되게 하지 말도록 하소서. 

      (公私婢子嫁良父所生 毋得從父以良 : 세종 6년 8월 10일)”

 

세종은 한마디로 거부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십여년 전에 만들어 놓은 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세종 14년 3월에 대신들과 함께 종모법의 재시행을 다시 토의하였다. 세조 때에는 종모법이 시행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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