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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하지만 인성이 모자라는 군주의 병폐 : 중국 고대사에서 배운다 <4,끝> 후조(後趙)의 석호(하)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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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2월24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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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석호의 황위 등극과 요익중의 석호 질책(AD349)

 

조왕 석호는 마침내 황제로 등극했다. 섭조천왕이 된지 12년 만의 일이다. 동궁의 휘하에 있다가 량주(감숙성)로 귀양가던 10만여 병사들은 모두 무력과 체격이 뛰어난 장사들이었는데 감숙성으로 가던 도중 책임인솔자 양독의 지휘아래 반란을 일으켜 가던 길을 돌아왔다. 그들의 실력이 너무나 뛰어나서 갑옷과 무기가 없이도 한 명이 열 명 이상을 감당하였다. 양독은 스스로를 진의 정동대장군이라 칭하면서 장안으로 진격해왔다. 장안을 지키던 낙평왕 석포가 모든 정예병을 가지고 막았으나 한 번 만에 격파되었다. 양독의 군사는 동쪽으로 나아가 동관을 함락하고 낙양으로 들어갔다. 석호가 이농을 대도독으로 삼아 10만 기병으로 토벌하게 했으나 이농 또한 신안에서 크게 패하여 막아내지 못하고 성고로 퇴각했다.

   

양독은 더욱 동쪽으로 나아가 형양, 진류의 여러 군을 노략질했다. 석호는 무공이 뛰어난 아들 연왕 석빈에게 전권을 주고 관군대장군 요익중과 거기장군 포홍과 더불어 방어토록 했다.

요익중은 자신의 휘하 8천 기병을 이끌고 업에 도착하여 알현을 요청했다. 석호는 병중 이었으므로 직접 나오지 않고 음식만 하사했다. 화가 난 요익중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 주상이 나를 불러서 도적을 처치하라고 불렀으니

  마땅히 만나 보고서 방략을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나보고 밥만 먹고 가라는 것인데 내가 어떻게 밥을 먹으러 왔단 말입니까?

  또 내가 직접 주상을 보지 못하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안 단 말입니까?“

 

석호가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접견했다. 요익중은 석호를 크게 나무랐다.

 

“ 어린애가 죽어서 근심하는가?

  병 때문에 근심인가?

  자식이 어렸을 때 좋은 스승을 붙여 가르치지 않아서 반역에 이르기까지 했고

  또 그런 아들을 죽였으면 또한 어찌 근심하는가?

  너는 오랫동안 병이 들었는데

  세워 놓은 사람이 어린아이이니 네가 쾌유되지 않으면

  세상은 반드시 혼란에 빠질 것 아닌가. 그것을 먼저 걱정해야지 

  어떻게 도적 떼 들을 걱정한단 말이냐.

  양독이란 놈은 궁색하고 고단하여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저러는 것이니

  잔폭한 짓을 하고 어디까지 갈 수 있겠는가.

  이 늙은 강족 요익중이 너를 위하여 한 번에 처리하고 올 것이다.“

 

요익중은 강직하고 사나워서 누구한테든 너라고 불렀으므로 석호도 책망하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사지절과 정서대장군 직책을 내렸고 갑옷과 말을 하사했다. 요익중은 인사도 하지 않고 말을 달려 나갔다. 석빈과 힘을 합해 양독을 형양에서 격파하고 머리를 벤 다음 나머지 무리들을 모두 처단했다. 석호는 요익중에게 서평군공과 함께 칼을 차고 전작에 오를 수 있도록 허락하고 포홍에게는 거기대장군 약양군 및 옹주자사를 내렸다. 

  

 

(25) 석호의 와병과 혼란(AD349)

 

4월 석호의 병이 심해졌다. 석호는 팽성왕 석준에게 대장군 직을 주어서 관중의 오른쪽을 방어하게 하고 연왕 석빈을 승상으로 삼아서 상서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그리고 장시는 진위대장군 및 영군장군 이부상서로 삼아서 석빈과 함께 정사를 나누어 보도록 했다. 태자의어머니 유후는 석빈의 정치보좌를 싫어하여 장시를 꾀어서 석빈을 도모하게 하였다. 장시는 사냥으로 양국에 가있던 석빈에게 거짓 편지를 보냈다.

 

“ 주상의 병이 이미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사냥을 좀 더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석빈은 정말로 그런 줄 알고 사냥과 음주를 계속했다. 유황후와 장시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조서를 고쳐서 불충하고 불효한 석빈을 관직에서 몰아내고 귀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는 장시 동생 장의에게 무사 500명으로 석빈의 집을 지키게 하였다.(AD349년4월9일)

 

4월 19일 석준은 유주에서 업성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뵐 수가 없었고 다만 금병 3만 명을 배속 받고 임지(관중의 오른 쪽)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의식을 차린 석호가 석준의 도착을 물었는데 이미 떠난 지 한참 뒤였다. 석호를 호위하는 군사들은 연왕 석빈을 근위병사의 책임을 맡게하고 황태자로 삼을 것을 간청했으나 연왕을 불러도 유황후와 장시가 가로막아 들어올 수가 없었다. 석호의 눈이 가물가물해지자 인새를 직접 가지고 연왕에게 주려고 했지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석호의 마음이 석빈에게 있음을 알아챈 유황후와 장시는 다시 조서를 고쳐서 석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시를 태보⦁도독중외제군사로 삼았다. 최고의 군권이 장시에 쥐어진 것이다. 시중 서통은 절망에 빠져 음독자살하고 말았다.(4월22일) 그 다음날 석호가 55세의 나이로 죽었다. 열 살 태자 석세가 즉위하고 유씨가 유태후가 되어 황제를 대행했다. 장시는 태위 장거와 사공 이농을 죽이려고 모의했는데 장거가 사이가 좋았던 이농에게 미리 그 사실을 알려줬다. 이농은 즉시 식솔을 데리고 도망갔다.

 

 

(26) 석준의 무혈 쿠테타 집권(AD349)

 

팽성왕 석준이 하내에 이르렀을 즈음 아버지가 죽은 소식을 들었다. 요익중과 포홍과 석민이 양독을 정벌하고 돌아오다가 이성(하남성 온현)에서 석준을 만났다. 이들 노장들은 석준이 장자이고 도 무공이 혁혁한데다가 석호가 장차 후사로 생각했었으나 말년에 정신이 혼미해 지고 현혹되어 장시와 유후에게 휘둘렸다고 말하면서 장시를 토벌하는 것이야말로 쉽고도 바른 길이라고 설득했다. 석준도 동의했다. 군사를 돌이켜 이성을 출발해서 업성으로 들어가니 주변의 낙주자사 석준과 유국도 합류했다. 석준의 군사들은 탕음(하남성 탕음현)에 진을 쳤는데 융졸이 9만이었고 석민이 선봉에 섰다. 주변 성읍의 주민들은 물론 업성의 주민들도모두 다 석준에게 부응하여 왔다. 간사한 우복야 장리마저 마지막에는 장시에게 등을 돌리고 성문을 열어 석준의 군사를 영입했다. 다급한 유황후와 장시는 석준에게 있는 직책을 총동원하여 환심을 사려 했다. 승상, 영대사마, 대도고, 독중외제군사 녹상서사가 석준에게 내려진 직책이었고 덧붙여 황월과 구석(황제만 가질 수 있는 물건 아홉 가지) 내렸다.  

  

14일 석준이 업 부근에 도착하자 장시가 몸소 나아가 영접했는데 석준이 그를 잡아 가두었다가 다음날 평락시장에서 목을 베었고 삼족을 멸했다. 유씨(유태후 였다)의 명령을 빌어서 석준이 황위를 이어받도록 했다.(AD349년 4월 16일) 석세를 폐위하여 초왕으로 책봉하고 유씨도 태비로 책봉한 다음 얼마 후 모두 죽였다. 옛 연왕 석빈의 아들 석연을 태자로 삼았으며 석감을 시중 및 태부, 낙평공 석포를 대사마에 임명했다. 일등공신 선봉장 석민에게는 도독내외군사 및 보국대장군이라는 최고의 군사직을 수여했다.  

 

 

(27) 석호가 후조를 멸망시킨 이유

 

갈족의 작은 추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이리저리 흘러 다니던 방랑아 석륵이 서진이 망한 뒤 갈래 갈래로 찢긴 북중국 거의 전역을 통일하는 대업을 세운 것은 가히 조조를 능가한다고 할 만하다. 특히 완벽한 흙 수저 빈손으로 출발하여 큰 행운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대업을 일구었다는 점에서 확실히 조조나 사마염에 뒤지지 않는다. 석륵이 북중국을 통일해 나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유연의 객장으로 시작해서 북방 여러 주의 자사와 실력자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갔는데, 왕미, 근준, 업성의 사마등, 기주자사 왕빈, 연주자사 원부, 예주자사 사마확, 청주자사 이운, 기주자사 왕상, 청주도독 구희, 연주자사 전휘, 연주자사 서감, 청주자사 조억, 그리고 유주자사 왕준까지 처단하고 궁극적으로 유연의 전조마저도 멸망시켰다.(AD329) 그리고 석륵의 업적의 절반 이상은 뛰어난 명장 석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절대 강자 후조도 석륵이 죽으면서(AD333) 급격하게 붕괴되었다. 첫째, 황위를 물려받은 석홍이 대업을 이을 재목이 되지 못하였다. 둘째, 이미 정권은 대부분 석호에게 넘어가 있었고 병든 석륵도 조정을 거의 장악한 이복동생 석호를 제지할 능력도 기력도 상실한 상태였다. 셋째, 석호가 황제 석홍을 죽이고 등극(AD335)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훌륭한 인재들이 제거되거나 혹은 조정을 떠나게 되었다. 석호는 석륵에 버금가는 무공을 세운 사람이다. 전투능력이나 실전 전공으로 치자면 석호는 절대로 석륵에 뒤지지 않는다. 사실 석륵 치하의 대부분의 무공은 사실은 석호가 세운 것들이었다. 따라서 석호가 황위를 찬탈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후조의 멸망으로 자동 연결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수많은 조정의 인재를 죽이거나 잃은 것은 통일된 이후의 후조를 이끌고 갈 정치적 자산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석호는 전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서 과도한 전쟁을 일으키기는 했다. 두 차례 요서정벌 및 동진정벌 로 국력이 크게 피폐해 진 것은 맞다. 그리고 수많은 토목공사와 사치로 국가재정을 고갈시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후조가 결정적으로 망하게 된 것은 석호의 무자비한 정치로 인한 민심이반이 끊임없는 내분 및 반란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태자 석수의 반란시도, 석선으로의 태자 교체(AD337), 태자 석선의 동생 석도 살해(AD348), 석호의 태자 석선처형(AD348)으로 후조 황실은 심각한 내부분열이 진행된 것이 멸망의 근본원인이다. 이런 와중에 석호마저 병사(AD349년 4월) 병사하자 어린 황제 석세를 두고 치열한 내분이 격화되었다. 석감(石堪)의 쿠테타(AD349), 석감의 쿠테타(AD349) 그리고 석민의 쿠테타로 황위는 계속 바뀌어 갔다. 마지막으로 정권을 잡은 석호의 양자 석민은 나라의 이름은 염위로 바꾸었고 석호의 살아남은 다른 아들 석지는 자신의 봉지 양국에서 명맥을 잇고자 했지만 결국에는 염민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AD351)   

 

민심에 유념하여 나라를 대대로 잇는 것이 혁혁한 무공으로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몇 배나 어렵다는 것을 석륵과 석호의 후조가 잘 보여준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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