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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6-1 : 전한(前漢)의 창읍왕 유하(BC92-BC52) <C>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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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8월28일 12시32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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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둘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 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9> 태자 유거의 반란(BC91)

 

태자는 직접 감천궁으로 가려고 했지만 강충이 태자를 지극히 혐오하고 있었으므로 어디로 나가야 할지를 모른 채 결국 석덕의 계책, 즉 강충을 체포하는 쿠테타를 일으키기로 했다. 

BC91년 7월 태자는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황제의 사자라고 속이며 강충 무리를 체포하게 보냈다. 안도후 한열은 수상하다고 느끼고서 체포에 불응했다. 태자의 사자는 즉시 한열을 때려 죽였다. 태자는 강충의 목을 자르는 현장에 직접 나타나 소리질렀다.

 

   " 조나라의 종놈아. 

     전에 난을 일으켜 조나라 왕의 부자를 죽게 하고도 부족하여   

     이제는 우리 부자까지 이간질시켜 난을 일으키려 하느냐."

 

그리고 이방인 무당을 상림원 안에서 태워 죽였다. 태자는 또 무차라는 사람을 보내 밤에 지절을 가지고 미앙궁 장추문으로 들여보내 궁녀 의화를 통해 황후께 사실을 보고 드렸다. 그리고는 황궁의 마굿 간에서 마차를 동원하여 사수를 싣고 무고에서는 군사를 발동한 다음 장락궁의 수위병들을 살해했다. 장안 전역에 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황문 소문은 잽싸게 도망쳐 감천궁으로 들어가서 황제에게 태자가 상황을 낱낱이 보고했다. 무제는 이렇게 말했다. 

 

    " 태자가 분명히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강충에 대해 분노한 감정을 갖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마침내 무제는 사신을 보내 태자를 들어오라고 소환했다. 사신이 두려워 감히 나서지를 못하고는 돌아와 거짓으로 보고했다. 

 

 " 이미 태자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신을 죽이려고 하기에 피해서 돌아왔습니다."

 

무제는 격노했다. 승상 유굴리도 변란의 소식을 듣고 몸을 빼내 도망치다가 인수를 잃어버리고는 사람을 시켜 황제에게 급히 상황을 보고 드리게 지시했다. 무제가 물었다.

 

     “ 승상은 어떻게 대처했는가?”

 

보고를 드리러 온 사람이 말했다.

 

     “ 승상께서는 반란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발병하지 않았습니다.”

 

무제가 더욱 격노하여 말했다.

 

     “ 일을 저렇게 느려터지게 처리하다니

       어떻게 비밀에 부칠 수가 있다는 말이냐.

       승상은 주공의 기풍을 지니지 못했구나.

       주공은 반란을 일으킨 관숙과 패숙을 죽이지 않았더냐! ” 

 

곧바로 승상에게 새서로 지시를 내렸다.

 

      “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체포하여 참수하도록 하라.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상이 있을 것이다.

        소 수레를 가지고 방패를 만들고 

        짧은 칼을 지닌 병사들과는 접전하지 말라. 군사들 살상피해가 클 것이다.

        성문을 굳게 닫고 영을 따르지 않고 출입하는 것을 엄금하라.”

    

태자는 백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 황제께서 감천궁에 계시는데 병으로 피곤하시다.

        변란이 일어났다고 의심하시지만 

        그것은 간신들이 꾸민 장난에 불과하다.

 

무제는 감천궁에서 나와 장안 성 서쪽에 있는 건장궁으로 들어간 다음 조서를 내려서 삼보 인근 현 병사와 2천석 이하의 관리를 발동하여 승상이 지휘하도록 했다. 태자 또한 사신을 보내 황제의 명령을 위조하여 장안의 갇혀있는 죄수들을 사면하여 풀어 주고 소부 석덕과 빈객 장광으로 하여금 군졸을 나누어 지휘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장안 죄수였던 여후에게 지절을 지니고 장수와 선곡에 있는 이방인 기수들을 무장시켜 모이도록 지시했다. 무제의 시랑 마통이 사신이 되어 장안으로 들어가 여후를 체포했다.   

     ” 당신이 본 지절은 가짜요. 들으면 안 되오! “

 

마침내 여후의 목을 자르고 기병을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장안 내 노역꾼들을 모아서 대홍려 상구성에게 주어 지휘하도록 했다.  

 

<10> 태자의  반란 실패(BC91)

 

당시 한나라 지절은 붉은 색이었는데 태자의 지절 또한 같은 색이었다. 무제는 지절의 색을 노란 색으로 바꾸어 구별이 되도록 했다. 그걸 몰랐던 태자는 장안 남문 밖에 북군을 세운 다음 소환장을 보내 호북군 임안에게 지절을 주어 군사를 발동하라고 지시했다. 임안은 지절을 수령한 뒤 군사를 이끌고 남문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낭패를 겪은 태자는 남은 군졸을 거느리고 돌아가 여러 시장 상인들 수만 명을 끌어 모은 다음 장락궁 서궐에서 승상의 군대와 교전을 벌였다. 전투는 닷새 정도 이어졌고 사망자만 수만 명에 달해 피가 도랑을 흘러내릴 정도였다.  시중 사람들은 다들 태자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수군댔으므로 태자에게 붙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반면에 승상을 지원하는 사람들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다. 태자 군사들은 결국 실패했고 복앙성 쪽으로 달아났다.

 

사직 전인은 성문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태자와 황제 사이가 좋았으므로 급하게 처리하지 않았으므로 태자는 빠져나와 도망칠 수 있었다. 승상이 화를 내며 전인의 목을 치려고 나섰는데 어사대부 폭승이 말리며 말했다.

 

     " 사직은 이천석짜리 관리입니다.

       당연히 상부에 요청을 하시고 난 뒤에 처단하셔야지

       어찌 마음대로 처리하시려 합니까?"

승상은 전인을 놓아주었다. 무제가 그 소식을 듣고 대노했다.

     " 사직이란 놈은 반란을 추종한 것이다.

       승상이 목을 베는 것이 법이다.

       대부는 어찌하여 마음대로 중단시킨 것인가? "

 

폭승은 그 말을 듣고 황공하여 끝내 자살을 택했다. 무제는 종정 유장, 집금오 유감을 위황후에게 보내 인수를 거두게 했다. 황후 또한 자결을 택했다. 무제는 임안이 늙은 관리가 되어서 반란이 성공하는지 아닐지 앉아서 기다린 두 마음을 가졌다고 판단하고 전인과 함께 허리를 잘라 죽이는 요참형으로 처단했다. 

 

마통은 여후를 체포한 공, 장안남자 경건은 석덕으로 체포한 공, 상구성은 장광을 사로잡은 공을 높이 사서 후작의 지위를 내렸다. 

  

  <태자 유거 반란으로 죽은 사람>

 

    (황제쪽)            (태자쪽) 

  안도후 한열       석덕 – 경건에게 잡힘

  강충               장광 – 상구성에게 잡힘

                      전인 - 요참형

                      임안 - 요참형

                      여후 – 마통에게 잡힘

                      위황후 자살

                      태자빈객 모두 죽음

 

태자궁을 드나들던 빈객들도 모두 연루되어 죽었고 태자를 따라 나섰던 군사들도 법을 어긴 죄로 족멸되었다. 관리들이 겁을 주어 반란에 억지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돈황으로 옮겨가 살게 하였다. 

태자가 장안 밖으로 도망가 잡히지 않았으므로 처음으로 장안의 여러 성문에 군사를 풀어 둔병하게 하였다. 무제의 노한 감정이 너무 심하여 여러 신하들은 두렵고 무서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호관(산서성 호관현) 삼로인영호무가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신이 듣기에 아버지는 마치 하늘과 같고 어머니는 땅과 같으며

      아들은 세상의 만물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편안하고 땅이 온화하며 만물이 무성하려면

      아비가 자애롭고 어미는 사랑하며 아들은 효도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지금 태자가 한나라의 적통계승자가 되어

      만세의 업을 잇고 조종의 본체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그가 곧 황제의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강충이라는 자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여염집의 노예나 다를 바 없는 신하입니다.

      폐하께서 드러나게 쓰시게 되자 입을 악물고 지존의 명이라고 하면서 

      태자를 발로 차기도 하고 간사한 계교를 거짓으로 만들어내며 

      수를 셀 수 없는 착오를 범한 것은 

      부자지간에 차벽을 세워서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하려는 계략 때문입니다.

      태자로써는 나아가도 황제를 뵙지 못하고 

      들어가서도 난신들에게 시달리다 보니 홀로 

      원한이 쌓여 분노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게 되어 일어나 강충을 죽였지만 

      체포당할까 두려워 아버지 병사를 훔쳐 

      스스로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했을 뿐입니다. 

      신이 곰곰이 생각해보면 악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경>에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 앵앵대고 날아다니는 파란 파리는 울타리 위에 앉았구나.

               마음이 편안하고 단정한 군자는 참소하는 말을 믿지 낳는다.

               참언이 망극하면 사해가 서로 난리에 빠지는 법이다.”

      지난 번 강충이 조태자를 참소하여 죽여 천하가 다 알아차렸지만 폐하께서는 

     그것을 깊이 살피시지 않고 태자 잘못을 심하게 꾸짖으며 심하게 노하셔서 군사를 크게 일으키면서 

     삼공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셨습니다. 아는 사람들도 감히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였고 

     변사들도 감히 주장하지 못했으니 신은 실로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오직 폐하께서 너그러운 마음과 위로하는 배려로 조금만이라도 육친인 것을 생각하셔서

     태자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생각 마옵시고 군사를 파하시여 태자가 오랫동안 도망가 있지 않게 하옵소서.   

       신은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오늘 아침 목숨을 바치고자 건장궁 아래에서 죄를 받고자 기다리겠습니다.”

 

 무제는 그 글을 읽고 동감하는 점이 있었으나 드러내놓고 사면하지는 않았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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