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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5 : 3대 인재가 이어진 후진(後秦)을 망가뜨린 요홍(姚泓)(K)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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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7월30일 16시4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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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69) 요충의 반란 시도와 요흥의 하나라 유발발 공격실패(AD409-AD410)

 

서쪽으로 독발녹단, 그리고 남쪽으로 유유와 화친한 요흥은 이제 마음놓고 북쪽의 유발발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동생 요충과 장수 적백지에게 4만 기병을 주어 유발발 공격을 지시했다. 하루 길을 가서 영북(섬서성 예천)에 도착한 요충은 거꾸로 장안을 공격할 생각을 부하 장수들과의 논했다. 적백지가 반대하자 그 자리에서 독을 먹여 죽였다. 요충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요흥은 요충에게 죽음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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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의 유발발이 기병 2만으로 후진의 평양(감숙성 화정)을 공격하고 주민 7천을 약탈한 뒤 의역천(감숙성 화정현 남쪽)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후진 요흥은 유발발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북쪽 이성(섬서성 황릉)으로 나아갔다. 유발발은 기병을 거느리고 요흥을 먼저 공격했다. 요흥의 군사가 대패하여 장안으로 급히 후퇴하였다. 요흥이 유유의 공격을 받는 남연의 모용초를 돕기 위해 보낸 한범과 요소도 유유에게 패하였다. 요흥의 후진군은 북쪽, 서쪽 그리고 동쪽에서 모두 패한 셈이다. 끝까지 항전하던 모용초의 남연은 그 다음해(AD410)에 유유에게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요흥이 패퇴하자 유발발은 강력한 기병을 바탕으로 줄기차게 후진의 북쪽 변경 평량(감숙성 화정)과 정양(섬서성 의천현)을 노략질해 들어왔다. 요흥은 군사를 이끌고 직접 유발발을 맞아 싸웠지만 기병으로만 이루어진 유발발의 치고 빠지는 전략을 감당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70) 요흥의 인재 천거명령(AD411)

 

계속해서 쳐들어오는 유발발의 공격을 막지 못한 요흥은 자신의 통치가 부족해서 패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국의 인재를 천거해 올리도록 명령했다. 우복야 양희가 말했다.

 

“ 신이 여러차례 주상의 명령을 받았습니다만

  마땅히 천거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인재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요흥이 말했다.

 

“ 예로부터 제왕이 일어나서는

  훌륭한 재상이나 장수를 앉아서 기다린 적이 없었소.

  때에 따라 적절한 인재를 뽑아서 

  일을 맡긴 뒤에야 일이 제대로 다스려지는 법이요.

  경은 스스로 인재를 선발하는 식견이 높지도 않은데 

  어찌 사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인재감이 안된다고 서둘러 말하는거요?“

 

요흥의 이러한 훌륭한 말을 들은 신하들은 모두 기뻐하고 찬탄해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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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후진 양불숭의 패전(AD412)

 

구지(감숙성 서화)공 양성이 후진 요흥을 배반하여 후진의 땅을 침범하였다. 요흥은 조곤을 선봉으로 삼고 요백수가 그 뒤를 잇게 하였다. 전장군 요회는 감숙성 성현 북쪽, 요숭은 천수, 그리고 호익도는 견성(섬서성 농현)에서 출동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요흥 스스로도 섬서성 봉상에서 출병하여 농구(감숙성 청수)에서 도착하였다. 

 

천수태수 왕송충이 주군 요숭에게 말했다.

 

“ 먼저 돌아가신 황제(요장)의 신묘한 전략은 예측할 수가 없었고

  서락생이 뛰어난 무용으로 왕명을 보좌하여 다시 구지로 진입했으나

  공로를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양씨의 지혜와 용맹이 아니라 험한 지세 때문에 버티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조곤의 무리와 여러 장수들의 재주를 보면  

  지난 요장 황제에 비해 매우 뒤떨어지는데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면 어찌 표문을 올려서 그렇다고 보고를 하지 않으십니까?“

 

양성군과 조곤군이 싸웠으나 조곤이 크게 패하였다. 요흥은 패전한 요백수의 목을 베어버리고 돌아왔다.

요흥은 양불숭을 옹주(감숙성 진원)자사로 삼고 여러 주변 군사를 몰아서 유발발을 치도록 했다. 요흥이 이렇게 말했다.

 

“ 양불숭은 적을 볼 때마다 

  용맹함을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흥분하므로

  내가 군사를 조절하여 5천이 넘지 못하도록 하였소.

  지금 그가 거느리는 너무 군사가 많은데

  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할 것을 어떡하면 좋겠소?“ 

  

요흥의 말대로 앵불숭은 유발발과 맞붙어 크게 패하였다. 유발발에게 사로잡히자 양불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72) 요흥 와병과 후진의 내분 : 요홍과 요필의 대립(AD414) 

 

후진 요흥에게 병이 났다. 이 때 요흥(AD366-AD416)의 나이는 48세였다.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반란을 일으킨 이홍과 구상을 토벌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몰고 황릉까지 가서 역적구상의 목을 베고 이홍은 사로잡아 돌아왔다. 

 

이 때 태자 요홍은 좌장군 요문종을 총애하였는데 요홍의 동생 요필이 요문종을 싫어하여 요흥에게 요문종을 요망하다고 무고했다. 셋째 아들 요필을 매우 아낀 요흥은 요문종에게 죽음을 내렸고 사람들은 모두 요필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요흥은 요필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기밀을 취급하는 요흥의 핵심 측근은 모두 요필의 심복들로 교체되었다. 요흥의 우복야 양희와 시중 임겸과 경조윤 윤소 등 조정 대신들은 요흥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 부자지간의 일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군신지간의 일은

  부자지간의 일에 비추어 가볍지 않으니    

  신들은 침묵하고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최근 광평공 요필이 적자의 자리를 뺏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길거리에서는 폐하께서 조만간 태자 폐립의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 일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요흥은 깜짝 놀랐다.

 

“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양희 등이 다시 말씀을 올렸다.

 

“ 진실로 그런 일이 없으시다면

  폐하께서 요필을 아끼시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의 주변 사람을 쫓아 내시고

  그의 권세와 위엄을 조금 줄이는 것이 

  사직을 위해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흥은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곧바로 대사농 보온과 좌장사 왕필 등이 요필을 태자로 교체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요흥은 들은 척 하지도 않았다. 요필은 요흥의 병세도 그렇고 또한 요흥의 총애를 확신한 나머지 군사 수천을 모아 결사대를 꾸렸다. 

 

요흥의 다른 아들 요유는 공공연한 요필의 반란 계획을 지방에 나가 있는 형님들에게 알렸다. 포판에 있던 요의(요흥의 둘째 아들), 낙양에 있는 요광(넷째), 봉상에 있는 요심(여섯째) 등이 군사를 훈련하며 장안의 요필 토벌계획을 세웠다. 요흥의 병문안을 온 정로장군 유강이 요흥에게 여러 황자들의 반란계획을 보고해 올렸다. 양희와 윤소는 거듭해서 요필을 죽여야 한다고 간청하면서 말했다.

 

“ 진정으로 죽이지 못하시겠다면 

  그의 지위와 권세만이라도 박탈하셔야 합니다.“

 

마지못한 요흥이 요필의 상서령 직을 뺏고 평장군과 공작의 직위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요흥의 지시를 들은 요의 등 요흥의 여러 아들들은 군사를 풀고 토벌계획을 접었다. 강규와 양희는 요필과 반역무리를 더 멀리 쫓아내자고 권했지만 요흥은 대꾸하지 않았다.

 

 

(73) 요필과 요선의 갈등과 혁련발발의 침략(AD415)

 

광평공 요필이 지난 해 자신을 헐뜯은 동생 요선을 아버지 요흥에게 참소했다. 마침 요선의 사마(측근 신하) 권비가 장안에 들어오자 요흥은 요선을 잘 계도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죽이려고 하였다. 권비는 죽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주군 요선의 비행을 고자질하면서 형벌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요흥은 요선 등의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고 화가 나서 요선이 주둔하고 있는 황릉에 사람을 보내 그를 감옥에 가두라고 지시한 뒤 요필에게는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진주(감숙성 천수)에 주둔하라고 명령했다.   

 

윤소가 나서서 요흥을 말렸다.

 

“ 지금 광평공 요필과 황태자 요홍이 사이가 좋지 않은데

  저렇게 많은 군사를 요필에게 주신다면

  만일 황제께서 편치 않게 되시는 날에는 

  천하가 위험하게 됩니다.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커다란 계책이 위태로워진다(小不忍,乱大谋)’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지금의 폐하를 위해 하는 말입니다.“

 

요흥은 윤소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왕 혁련발발은 후진의 행성(섬서성 황릉)을 뽑아 버리고 후진 병사 2만 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요흥이 격분하여 북지(섬서성 요현)으로 진격하여 진주에 있는 요필과 염만외를 차출하여 신평(섬서성 빈현)으로 보냈다. 혁련발발은 북량의 저거몽손과 연대를 모색하면서 후진을 괴롭혔다. 

 

  

(74) 요흥의 발작과 요홍의 형제애(AD415)

 

거의 8년 전 부터 몸이 아파 약을 먹었던 요흥이 발작을 일으켰다. 광평공 요필은 몸이 불편하다고 하면서 문병을 오지 않고서 군사를 모아 만일에 대비했다. 요흥은 그 소식을 듣고 요필의 무리 당성과 손현을 붙잡아 들여 죽여 버렸다. 요홍이 요흥에게 간청했다.

 

“ 형제의 불화는 제 잘못입니다.

  신이 죽어서 나라가 안정된다면

  신에게 죽음을 내리시고

  차마 죽이지 못하신다면 차라리 먼 곳으로 내 쫓아 주십시오.“

 

요흥이 모자라지만 효성이 극진한 요홍을 불쌍히 여겼다. 대신 요찬과 양희와 윤소를 불러서 요필을 제거하는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그러나 요홍은 그 계획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눔물로 아버지께 호소하여 요필 제거계획을 중지시키도록 했다. 요흥은 요필 무리를 사면했다. 요홍은 이 일 이후에도 동생 요필을 예전처럼 원한없이 극진하게 다루었다.    

 

 

(75) 최호가 후진의 멸망을 예언(AD415)

 

형혹(화성)은 불길한 징조의 상징이다. 북위의 태사(천문학자)가 이렇게 상주했다.

 

“ 형혹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만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법칙에 따르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반드시 한 나라가 망하는데

  먼저 흉흉한 동요와 요망한 말들이 생긴 다음에

  재앙과 벌이 있게 되고나서 나라가 망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북위 탁발사가 걱정스러워 유학자 10여 명을 불러들여 의견을 들었다. 최호가 이렇게 말했다.

 

“ 춘추좌전에 따르면

  신(神)이 신성(하남성 삼문협)으로 내려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19 경오일과 20일 신미일 사이에 하늘에 구름이 많이 끼였으니

  형혹이 사라졌다면 반드시 그 이틀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경오는 모두 후진을 의미합니다.

  신미의 신은 서쪽 오랑캐를 뜻합니다.

  지금 형혹의 가르침은 분명히 요흥의 후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화를 냈다.

 

“ 하늘 위에 별이 없어졌는데

  사람들이 어찌 그 간곳을 알 수가 있단 말이요?“

 

최호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80여 일 이후 형혹은 동정별자리를 나왔고 한 참 그 주위를 맴돌다가 마침내 떠났다. 그 뒤 후진에는 가뭄이 들어서 저수지가 모두 메말랐고 동요가 와전되어 불렸으며 사람들이 불안해했다. 후진은 최호의 예언대로 그 다음해(AD417)에 멸망했다.

 

 

(76) 궁정 암투와 요흥 죽음(AD416)

 

후진 황제 요흥은 아들 요홍에게 감국을 시키고 화음(섬서성 화음,장안 동쪽 100KM)으로 가서 살았는데 병이 위독해지자 다시 장안으로 돌아왔다. 황문시랑 윤충은 요흥이 돌아오는 때를 기하여 황태자 요홍을 죽이려고 계획했다. 요홍이 아버지를 맞이하러 나가려하자 측근 신하가 말렸다.

 

“ 주상은 위독하시고

  사악한 신하들이 전하 곁에 우굴거리니

  나가셔도 전하를 뵙지 못할 것이고

  물러나셔도 내일을 기약 못하는 재앙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요홍이 이렇게 대답했다.

 

“ 신하된 아들로써

  병이 위중한 아버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말이 되겠는가?“

 

그 신하가 대답했다.

 

“ 몸을 온전하게 보전하셔서 

  사직을 안정하게 하는 것이 더 큰 효행입니다.“

 

요홍이 그 말을 듣고 나가 영접하지 않았다. 상서 요사미가 황문시랑 윤충에게 독촉했다.

 

“ 지금 요흥의 승여를 받들고 거사를 하시면 

  지팡이에 의지하듯이 일이 쉽게 풀려 

  광평공 요필의 재난도 풀어내시고 동시에

  우리들의 죄도 눈처럼 녹아내릴 것 입니다.“

 

윤충은 요흥의 생사를 몰랐으므로 요사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요흥이 병든 몰을 이끌고 궁으로 들어와 요홍, 요소 및 호익도에게 궁궐 호위를 부탁했다. 그리고 염만외를 요필의ᅟᅵᆸ으로 보내 그 안에 있는 병기와 갑옷을 모두 수거하도록 명령했다. 요필을 무장해제 시킨 것이다. 요흥이 누워있는 동안 요흥의 아직 어린 아들 요경아가 형 요음에게 요흥이 죽었으니 서둘러 병사를 일으켜 거사를 행동에 옮기라고 알려줬다. 

 

요음이 윤충과 함께 갑사 수 십명을 이끌고 황궁을 공격했지만 이미 염만외와 호익도 등이 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으므로 쉽게 부수고 들어오지 못했다. 궁궐 밖이 방화로 소란해지자 아픈 몸을 이끌고 일어난 요흥이 요필에게 사형을 내렸다. 금병들은 죽은 줄만 알았던 요흥이 일어서서 움직이자 기뻐 날뛰며 역도들을 도륙했다. 반란을 일으킨 요음은 여산(섬서성 임동)으로 도망갔다. 요흥은 요소와 요찬과 양희와 윤소 등에게 유언을 불러 주었고 향후 정사를 보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다음날 요흥이 죽었다. 요홍은 아버지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요음과 윤원 등 역모 주동자를 체포 주살한 뒤 황위에 올랐다.(AD416)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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