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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주의, 위기와 도전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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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2월10일 16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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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세종연구소가 발간하는 [정세와 정책 2021-2월호-제2호](2021.2.1)에 실린 것으로 연구소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편집자> 

 

미국 민주주의 현실, 위기인가? 실패인가?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담은 건국 헌법에 기초하여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1789년 세계 최초의 ‘행정부’를 구성한 이래 미국은 민주주의 가치와 제도, 그리고 절차를 유지해 왔다. 그런데 지난 1월 6일 의사당에 난입한 시위대로 인해 대선 결과 최종 인증 작업이 중단되었고 폭력이 투표를 막아선 민주주의 위기 순간이 발생하였다. 1800년 선거로 최초의 정권 교체를 이룬 이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현직 대통령이 지지자들을 선동하여 민주주의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해 버린 셈이다. 

 

그런데 미국 국민 중 약 40% 정도가 이번 의사당 난입 사태에 트럼프 책임은 거의 없다고 믿는다면 미국 민주주의는 위기일까, 아닐까?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는 공화당 시도에 찬동하는 국민이 약 45퍼센트라면 미국 정치 시스템은 위기 상황일까,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치 양극화, 경제 불평등, 의회 입법 교착, 가짜 뉴스 득세 현상 등은 미국 민주주의 위기일까, 아닐까? 사실 “미국 민주주의는 위기”라고 누가 어떻게 판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기준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공감대는 넓다. 따라서 미국 민주주의 위기는 미국 정치 실패를 함께 고려해야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비록 연방제인 점이 우리와 큰 차이지만 미국 민주주의 실패는 대통령제의 실패이기도 하므로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또한 적지 않다.

 

 미국 민주주의 위기, 트럼프는 원인인가? 결과인가?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 위기는 위기 시 이를 대체할 대안적 체제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대개 특정 시스템이 그 순기능을 다하면 새로운 체계로 교체하면 된다. 그런데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전면 대체할 새로운 정치 체제는 생각하기 어렵다. 다만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개혁만이 해결책이다. 미국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참정권 확대, 투표권 보장, 정치 자금 제한, 행정부 감독 강화, 의회 투명성 제고 등 다양한 정치 개혁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특히 미국은 건국 이래 한 번도 중단되거나 변경된 적이 없는 선거 제도를 운영하며 기존 정치 시스템 실패에 대응해 왔다.

 

평화적 정권 교체를 달성한 1800년 제퍼슨 대선, 대중 민주주의 시대를 연 1828년 젝슨 대선, 남북 전쟁을 해결한 링컨 리더십을 만든 1860년 대선, 미국의 정치경제 시스템 향방을 결정한 1896년 대선, 근대 대통령과 적극적 정부를 인증한 1932년 루즈벨트 대선, 레이건 혁명과 작은 정부로 돌아간 1980년 대선 등을 ‘중대 선거(critical elections)’라 부른다.1) 

선거 압승이라는 민의를 기초로 새롭게 등장한 리더십이 개혁 입법과 개혁 이념을 통해 정당 정치 내부의 오류를 재편(realignment)하고 민주주의를 재건(reconstruction)하는 역사를 반복해 왔다. 

 

문제는 정치 양극화가 본격화된 1980년대 후반 이후 이처럼 선거로 개혁을 동원하던 미국 민주주의의 자정(自淨) 프로세스가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 제도적 차원에서 살펴보면 대통령과 행정부 권한 과다(executive overreach) 현상이 두드러졌다. 1970년대 닉슨 시기 ‘제왕적 대통령제’가 이후에도 정치적 편의성을 동반한 행정 명령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왔다. 필리버스터의 덫에 빠진 상원 탓에 미국 의회는 더 이상 주요 입법으로 미국 사회 변동에 대처하는 대의 기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비대칭적 정당 양극화(asymmetric polarization)는 보수 미디어와 강경 프라이머리 유권자들에게 포획된 공화당이 점점 국정의 파트너가 아닌 기득권 사수 집단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개혁 입법의 위헌 소송 정례화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을 불러 일으켰고 연방대법원 대법관 선출을 둘러싸고 극단적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

 

정치 과정 상의 민주주의 실패 또한 두드러진다. 선거 민주화를 위해 도입된 예비 경선제도 경우 미디어와 정치 자금 간 통제 불능의 연결 고리로 인해 극단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커졌다. 게다가 뉴욕 타임스 같은 주류 언론을 가짜 뉴스라고 믿는 보수 유권자들이 80%가 넘을 정도로 언론에 대한 신뢰는 편향적이 되었다. 이념 성향에 따라 특정 매체에만 눈과 귀를 여는 유권자들은 국가 차원의 상호 소통은 외면하고 있다. 차분한 토론과 공감대 형성 대신 ‘고함치는 뉴스(shout-show)’와 ‘부정적 당파성(negative partisanship)’에 열광하는 중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회전문 인사를 통해 씽크 탱크와 행정 부처를 계속 오가는 정책 전문가들은 또 하나의 워싱턴 기득권 세력이 되어 버렸다. 이번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안보 라인 경우에도 멀리는 1990년대부터 익숙해져 있는 북한 이슈를 놓고 과연 얼마나 창의적인 접근법을 취할 수 있을지는 다소 미지수다.

 

미국 민주주의 실패를 위기로 내몬 트럼프 시대에 관한 분석이 빠질 수 없다. 지난 4년 간 트럼프 시기는 미국 민주주의 오작동이 민낯을 드러냈던 시간이다. 앞서 살펴 본 미국 민주주의 실패 요소들, 즉 과도한 행정부 권력, 정치 양극화, 경제 불평등, 인종 갈등, 민주주의 규범 약화 등은 트럼프 임기 중에 새로 갑자기 나타난 문제들은 아니다. 대신 트럼프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이러한 실패 요소들이 한꺼번에 분출되었다는 점이다.2)

트럼프 주도의 ‘지지층만을 위한(base-only) 정치’가 민주주의 규범, 제도, 과정 모두에 치명적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으로 미국 대통령들은 기득권을 옹호하는 의회를 압박하는 개혁 전도사이자 양당제 경쟁 시스템 하에서 정당 정치 한계를 뛰어 넘는 국익 옹호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애써 왔다. 트럼프는 정반대다. 양극화를 이용해 대선에 승리하였고 양극화를 부추기며 국정을 운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선 실패 불복에 양극화 세력을 동원하였다.

 

미국 정치를 역사와 접목해 분석하는 스코우로넥(Skowronek)은 트럼프 시기를 레이건 시대의 끝자락에 두고 이해한다. 쇠락하는 레짐(disjunctive regime)을 아웃사이더 방식으로 연장하려고 하지만 결국 재건의 정치 개창에 빌미를 제공하는 역할이다. 트럼프는 또한 공화당과 긴밀히 협력하여 미국 보수를 새로 정비한 대통령이 아닌 까닭에 대통령의 정당 건설(party building) 스타일도 기존 설명과 맞지 않는다. 그런데 반(反)트럼프 정서만 가지고 대선에 승리한 바이든과 민주당이 얼마나 새로운 체제를 건설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정치 자금과 미디어의 영향력이 과도한 현행 후보 선출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트럼프 파워 혹은 트럼피즘 또한 쉽게 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트럼프만 제거하면 민주주의가 저절로 회복될 것이라 믿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만큼 오늘날 미국 민주주의 병폐는 심각하다. 하지만 대통령제 경우 말과 행동을 동반한 대통령 리더십 그 자체가 결정적 요소임에 틀림없다. 트럼프는 미국 민주주의 실패의 증상일 뿐이었다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 민주주의 변화, 통합인가? 개혁인가?

 

미국 민주주의 위기가 세간에 생소한 것처럼 미국 정치학 연구자들에게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미국 정치학을 유럽 전통에서 독립시킨 1960년대 행태주의 혁명은 개인과 선택을 핵심 의제로 다루기 시작했고 미국 민주주의 전반에 대한 통합적 성찰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왔다. 더 이상 달(Dahl)이나 샷슈나이더(Schattschneider) 같은 학자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3) 

민주주의를 전파해야 한다는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가 팽배한 풍토에서 내부적으로 미국 민주주의 자체를 돌아보는 연구는 미진했다. 예를 들어 소득 불평등 현상을 민주주의 실패로 간주하고 분석하는 정도가 명맥을 유지하였다.4) 

따라서 주류 미국 정치학자들이 제안하는 민주주의 개선 방식도 각개 격파 방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민주주의 위기 극복 방식은 개혁의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제도주의 대통령 연구로 유명한 모(Moe)와 하웰(Howell)의 제안은 건국 헌법에서 강조된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시대가 변해도 신성시되는 미국 헌법의 모순을 타파하는 방식 중 하나로 대통령에게 신속 입법권(fast-track authority)을 부여하자는 제안이다. 이에 따르면 대통령이 제안하는 법안에 대해서는 수정안 없이 통과 여부만 표결할 수 있다. 대신 법무부와 정보기관들을 대통령에게서 독립시키고 대통령의 사면권을 철폐함으로써 국정 운영의 효율성과 민주성을 동시에 높이자고 주장한다.5) 

 

공화당과 민주당 동수로 구성된 의회 현대화 위원회(Select Committee on the Modernization of Congress)는 지난 2019년 1월 116대 하원에서 발족되었다. 특히 전직 의원들과 의회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입법 절차, 인적 자원, 의원 교육, 기술 개선, 소통 확산 등 100여 가지에 이르는 의회 개혁 방안들을 도출해 냈다.6) 

그리고 정당 양극화 시대에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정당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의회와 언론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미국 양대 정당들이 실제로 정책 개발 및 토론, 민주적 후보 선출, 풀뿌리 정당 조직 등의 측면에서는 속빈 강정(“hollow parties”)이라는 것이다.7)

오히려 정당이 편향적 이해 그룹 영향력을 제어할 수 있는 기능을 회복함으로써 중도파 세력이 경선에서 살아남도록 유도하자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바이든 시대에 미국은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적어도 통합을 호소하는 새 대통령의 정돈된 메시지는 트럼프의 트윗으로 밤잠을 설쳐온 미국과 세계 시민들에게 중요한 변화다. “민주주의는 소중하지만 깨지기 쉽다. 오늘 민주주의가 승리했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 메시지가 공감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실패를 함께 고쳐 나가는 길만이 위기를 넘어서는 길이라는 사실을 미국 국민 모두가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민주당 대통령 선배 중 대중 연설에 능했던 오바마(Obama)보다는 의회 입법을 위한 주고받기에 능숙했던 존슨(Lyndon Johnson)을 모델로 삼는다면 바이든 시대에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 극복이 가동될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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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V. O. Key, Jr. 1955. "A Theory of Critical Elections,” Journal of Politics 17(1):3-18.

2) Zachary Callen and Philip Rocco ed. 2020. American Political Development and the Trump Presidency. (Philadelphia: Univrersithy of Pennsylvania Press)

3) ​백창재. 2020. 『미국정치연구』(서울: 사회평론아카데미)


4) ​Larry M. Bartels. 2008. Unequal Democracy: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New Gilded Age. (New York: Russell Sage)

​5) William G. Howell and Terry M. Moe. 2020. Presidents, Populism, and the Crisis of Democrac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6) https://modernizecongress.house.gov/recommendations​

7) Daniel Schlozman and Sam Rosenfeld. 2019. “The Hollow Parties,” in Frances E. Lee and Nolan McCarty ed. Can America Govern Itself?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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