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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3 : 능력 없이 쿠데타 일으켰다 망한 후량(後涼)의 여륭 여초 형제(C)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1월29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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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3) 전진의 양희 격파와 양주접수(AD385)

 

3월에 출발한 여광이 거의 반년 뒤인 그 해 가을에 의화(감숙성 안서)에 도착했다. 당시 그곳을 지키고 있던 전진의 양주자사 양희가 변경을 폐쇄하고 여광의 무리를 받아주지 않았다. 여광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고창(투르판)태수 양한이 이렇게 말했다.

 

  “ 여광이 서역을 격파하여 강하고 기세가 날카롭습니다.

    중원에서 전쟁으로 혼란이 거듭된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기도를 할 것입니다.

    하서 땅은 사방 1만 리에 갑병이 10 만 명이니 지키기 충분합니다.

    만약 여광이 사막지역을 나오면 저지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고오곡구(투르판)는 험한 요새이니 

     먼저 그곳을 지키면서 물을 빼앗으면 그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곳이 멀다면 이오관(합밀)을 막아도 좋습니다.

     이 두 곳만 지킨다면 여광이 자방의 계략을 가졌다하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여광이 무리가 도착하기 전에 투르판이나 합밀의 두 요새를 막아 저지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양주자사 양희는 듣지 않았다. 양희가 여광의 군사를 미리 막지 않은 것은 다른 속셈이 있었다. 책사 장통이 양희에게 이렇게 물었다.

 

  “ 관중이 크게 혼란하니 경사를 조정이 아직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여광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무슨 명분으로 

    어떻게 그를 막겠습니까?

 

양희가 대답했다. 

 

 “ 나도 아직 그 방도를 모르겠다.”  

 

장통이 양희에게 슬쩍 이렇게 제안했다. 

 

 “ 여광은 계략이 뛰어납니다.

   그리고 군사들도 연전연승을 해서 기세가 등등합니다.  

   양장군은 대대로 은혜를 입었고 충성이 뛰어났으니

   이번에 공훈을 세우셔야 합니다.

   행당공 부락은 황상의 사촌이고 용감합니다.

   그를 맹주로 삼아 군중의 소망을 거두고    

   충의를 고양시켜 호걸을 거느리면 

   여광이 온다 하여도 감히 다른 생각 못할 것입니다.

   여광의 정예병을 기둥삼아 모흥(하주자사)을 아우르고 

   왕통(진주자사)과 양벽(남진주자사)을 연결하며

   사주(四州)의 흉악한 무리를 쓸어내고 제실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제환공 강소백과 진문공 희중의 업적입니다.“

 

여광의 군사를 이용하여 주변 지역을 장악하여 부락을 세워서 반란을 일으키자는 말이었다.

양희는 장통의 말을 듣지 않고 AD380년 귀양와 있던 부락을 죽였다. 

 

여광은 고창태수 양한이 양주자사 양희에게 올린 계책, 즉 험한 요새를 틀어막고 여광을 제압하자는 책략을 듣고 선뜻 나아가지 못했다. 책사 두진이 나사서 여광을 독촉했다,

 

  “ 양희는 문장 짓는 것에는 여유가 있으나

    기회를 살피는 것은 부족합니다.

 

    결국에는 양한의 계략을 실천하지 못할 것이니 걱정할 것 못됩니다. 

     그들의 위,아래 마음이 흐트러지게 하면서 

     급히 진격하셔서 그곳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여광은 두진의 책략을 따랐다. 급히 전진하여 고창에 이르자 태수 양한이 군대를 들어 항복해왔다. 여광의 군사는 옥문관에 도착했고 양희가 격문을 띄워 여광을 질책하면서 양윤에게 5만 군사로 주천에서 방어하게 했다. 그러나 돈황태수 요정과 진창태수 이순이 여광에게 항복해왔다. 여광은 격문을 띄워 국난을 도울 생각을 않고 또 귀국하는 자신의 병사를 막은 양희를 질책했다. 팽황, 두진, 강비를 선봉으로 양주군사 양윤과 안미(감숙성 주천 동쪽)에서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부근 전 지역이 여광에 투항해왔다. 양주 관내 무위태수 팽제도 양주자사 양희를 체포하고 투항해왔다. 여광은 양희를 참수하고 고장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양주자사가 되었다. 두진은 무위태수를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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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당당한 송호와 송반의 죽음(AD385)

 

양주 모든 군현이 항복했지만 주천태수 송호와 서군태수 송반은 저항을 계속했다. 여광은 군사를 몰아서 이들을 체포하고 이렇게 꾸짖었다.

 

 “ 내가 황제의 조서를 받고 서역을 정벌했는데

   양희가 내 귀로를 끊으니 조정의 죄인 아닌가?

   왜 내게 반대하였는가?         

 

송반이 이렇게 대꾸했다.

 

  “ 장군은 서역을 평정하라는 조서를 받았지

    양주를 어지럽히라는 조서를 받은 것은 아니다.

    또 양공(양희)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죽이는 것인가?

    나 송반은 힘을 다했으나 부족하여 군부의 원수를 갚을 수 없으니

    어찌 역적 저족의 팽제가 한 것과 같겠는가?

    주군이 망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늘 있는 일 아닌가?“

 

(15) 여광이 총애한 간신 위우의 배신(AD385)

 

뼛속까지 서늘하고 당당한 대꾸에 내심 많이 놀랐지만 여광은 송반과 송호를 죽였다. 양주 주부 위우는 간사하고 사악하여 아첨과 모함을 잘했다. 팽제와 함께 양희를 체포하는데 앞장선 사람이었다. 여광은 이들을 좋아하고 신임했다. 위우는 여광의 총애를 믿고 고명한 선비 요호 등 10여 명을 참소하여 죽였다. 이 때문에 양주사람들은 위우는 물론 여광도 싫어하게 되었다. 여광은 위우를 금성(감숙성 난주)태수에 임명했는데 위우는 윤오(감숙성 영정)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여광의 충신 강비가 군사를 이끌고 위우 토벌했고 위우는 결국 달아나 흥성(윤오 서쪽)을 점거하고 버텼다.  

 

(16) 여광의 후량 건국(AD386) 

 

여광의 장수 팽황과 서경이 임도(감숙성 민현)에서 전량의 잔당 장대예를 크게 격파했다. 전량의 장천석이 부견의 공격을 받아 망하면서 동진으로 도망갈 때(AD376) 어린 세자 장대예를 왕목이 숨겨서 하서(감숙성 중서부)로 달아났었는데 이 지역을 장악하던 독발사복건이 장대예를 보호해 주었다. 독발사복건은  AD397년 남량을 세운 독발오고의 아버지다. 독발사복건은 장대예를 위안(감숙성 고랑현)으로 보냈는데 이 지역 사람 초송, 제숙, 및 장제 등이 장대예를 주군으로 모시고 여광의 영토 창송군(감숙성 무위시)을 점령하고서 반란을 일으켰다.  

 

여광은 장수 두진에게 장대예 무리를 토벌하게 했지만 두진은 패배했고 장대예 무리는 다시 후량 수도 고장(감숙성 무위시)까지 쳐들어왔다. 장대예의 충신 왕목이 이렇게 간했다.

 

 “ 여광의 군대는 양식이 풍부하고

   숙련된 전투병일 뿐만 아니라 갑병은 정예병인데다

   성벽이 공고하므로 그를 공격하는 것은 옳은 전략이 못 됩니다.

   영서지방(감숙성 장액, 주천 및 돈황지역)을 장악한 뒤에

   군사를 연마하고 나서

   틈을 보아 공격하면 일 년도 안 돼 여광을 잡을 수 있습니다.“

 

어린 장대예는 왕목의 말을 듣지 않았다. 스스로 무군장군 양주목이라고 일컫고는 왕목을 장사로 삼고 군사를 일으켜 여광에 대항하였다.(AD386년) 장대예가 왕목 및 독발사복건의 아들 독발해우와 함께 3만 군사로 고장(감숙성 무위)의 서쪽에서 여광과 대치했는데 여광이 직접 나아가 이들을 격파해 독발해우와 2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AD386년) 장대예는 요행히 죽음을 면하고 빠져 나와 감숙성 남쪽으로 도망갔다. 

 

AD386년 부견을 죽인 후진 황제 요장이 장안에서 즉위했다. 부견의 사망소식을 늦게 전해들은 고장에 있던 여광은 AD386년 9월 군대 전체에게 흰 옷을 입게 하고 통곡했다. 그리고 10월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연호를 대안(大安)으로 정했다. 스스로 사지절 중외대도독 독농우하서제군사 양주목 주천공이라 불렀다.(12월) 이때가 사실상 실질적으로 후량을 건국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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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전량 후예 장대예의 최후와 이어지는 왕목, 팽황, 강녕의 반란(AD387년)

 

AD387년 여광의 장수 팽황과 서경이 임도(감숙성 민현)로 도망간 장대예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장대예는 광무(감숙성 영등현)로 도망갔고 왕목은 주천(감숙성 주천)으로 도망갔다. 그해 8월 광무 사람이 장대예를 사로잡아 고장으로 압송하자 여광은 그의 목을 잘랐다. 왕목은 주천을 점거한 후 스스로 대장군 양주목이라고 일컫고 자립하기로 했다(AD387년7-8월)

 

여광의 서평(청해성 서녕)태수 강녕도 스스로를 흉노왕이라 칭하며 황하(청해성 화륭현)태수 강희 살해한 후 반란을 일으켰다. 장액태수 팽황도 반란을 일으켜 동쪽 주천에 있는 왕목과서평에 있는 강녕과 연대를 모색했다.

 

여광은 직접 팽황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여러 장수들이 말리며 나섰다.

 

 “ 전하가 팽황을 공격하면 남쪽의 강녕이 협공하여 올 것입니다.

   매우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여광이 대답했다.

 

  “ 실로 제장들의 말이 맞소.

    그러나 내가 지금 가지 않으면 저들이 쳐들어 올 것이요.

    세 군대가 동시에 북, 남에서 쳐들어오면    

    나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 또한 당연하지 않겠소.

    지금 팽황이 처음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강녕과 왕목의 마음이 서로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오.

    이럴 때 갑자기 공략한다면 승산이 높지 않겠소?“

 

3만 군사를 이끌고 빠르게 진격, 20일 만에 팽황을 잡아들여 참수했다. 여광의 전략적 재능이 남다르게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18) 왕목의 단견과 멸망(AD387)

 

왕목이 주천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사자를 보내 돈황처사 곽우를 소환했다. 곽우는 저족여광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모두가 야만인의 휘하에 들어가 좌임(옷을 좌쪽으로 맴)하게 될 것을 탄식하며 한족인 왕목을 돕기로 했다. 색하라는 사람과 함께 군사와 곡식 3만 석 모아 왕목에게 보냈다. 왕목은 고마운 곽우를 좌장사, 군사장군으로 삼았고 색하는 돈황태수에 임명했다. 

 

그러나 왕목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 색하를 공격했는데 곽우가 왕목을 말렸어도 듣지 않았다. 곽우가 성안으로 돌아와 대성통곡하면 말했다.

 

 “ 내가 다시는 너희들을 볼 수 없겠구나.”

 

복면을 덮어쓰고 곡기를 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광은 이렇게 말했다.

 

  “ 두 오랑캐가 서로 공격하면 이제 둘 다 사로잡는 것이다.

    이 호기를 잃을 수는 없다.“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주천을 공격해서 왕목을 이겼다. 왕목이 홀로 달아났으나 성마(감숙성 옥문)현령 곽문이 그를 잡아 머리를 베어 여광에게 보내왔다. 이로써 하서지역은 완전히 여광의 손아귀에 들어간 셈이다.

 

 

(19) 여광의 2인자 두진 제거(AD388)

   

여광이 양주 평정(AD385) 때 참모 두진의 공적 많았다.[위(13)참조] 여광은 그를 무위태수에 임명했으며 존귀함과 총애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여광의 조카 석총이 관중에서 돌아오자 여광이 이렇게 물었다.

 

   “ 중원지역 사람들이 내정치를 어떻게 평가하던가?”

 

석총이 대답했다.

 

  “ 두진이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외숙이 계신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여광이 후환을 두려워하여 두진을 죽였다. 여광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는데 단업이라는 신하가 이렇게 말했다.

 

 “ 명공의 법치가 너무 엄격합니다.”

 

여광이 이렇게 대꾸했다.

 

  “ 오기(吳起,전국시대 초기 위나라 병가)가 은혜를 베푸는 일을 없애자 

    초나라가 강성해졌고

    상앙(商鞅)이 형벌을 엄하게 하자 

    진나라가 흥하지 않았소.“

 

단업이 반박하며 말했다.

 

  “ 오기는 결국 자신의 몸을 해쳤고

    상앙 또한 그의 가족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잔혹한 형벌 때문입니다.

    명공께서는 대업을 열어 세우시면서 

    요순의 밝은 정치를 하셔도 다스려지지 못할까 두려운데 

    오기와 상앙의 정치를 본받으시면 

    이것이 어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바람이겠습니까?

 

여광이 고개를 정중하게 숙이면서 사과하였다. 단업은 10여년 뒤 저거몽손과 힘을 합쳐 북량을 세운 사람이다.       

 


(20) 여광의 왕위 등극(AD389년 2월)

 

여광이 스스로를 삼하왕이라고 일컬으며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대사면령을 내렸고 조정에  백관을 두었다. 아내 석씨와 아들 여소, 동생 여덕세를 구지(감숙성 서화현)로부터 고장(감숙성 무위)으로 불러들여 왕비와 세자로 세웠다.

 

삼하왕 여광은 동생 우장군 여보를 보내 금성(난주)왕 걸복건귀를 공격했다(AD392). AD385년 난주(감숙성 난주)에서 서진을 세운 선비족인 걸복국인을 부등은 금성왕으로 책봉하여 번국으로 삼았는데 전진에게 배반한 여광에게는 부등이나 걸복국인 모두 적인 셈이었다. 그러나 여보의 군사는 걸복건귀에게 대패하여 죽은 군사만 1만여 명이었다. 여광의 아들 여찬을 보내 강족 팽해념을 공격했지만 그 또한 패하였다. 여광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 부한(감숙성 임하)을 공격하여 이기자 팽해념은 감송(감숙성 질부)으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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