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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칼럼> 생각의 힘으로 건너가자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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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1월01일 05시47분

작성자

  • 최진석
  • 전 한국의희망 상임대표, KAIST 김재철AI대학원 초빙석학교수,(사)새말새몸짓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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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1월15일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받다 사망에 이르렀다. 당시 치안본부는 "'턱'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하였다. 32년 후, 2019년12월1일 밤, 산업부 원전산업정책과의 한 공무원은 감사원의 감사를 대비해서 관련 자료 530개를 삭제했다가 누구 지시에 의한 것이냐고 추궁하자 "내가 신내림을 받은 것 같았다"고 진술하였다. 경찰이냐 관료냐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둘 다 정권의 오만함과 사악함을 뒷심으로 믿고 여유롭게 한 변명이라는 점에서 똑같다. 토질이 같은 땅에서는 같은 풀이 자란다. ‘턱-억’과 ‘신내림’이라는 유사한 풀이 자라난 것은 그것들이 뿌리내린 토양이 같아서이다. 정권의 운영 면에서 볼 때, 1987년과 2019년 사이에 별로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내림’ 변명은 민주적인 제도가 의식, 즉 생각하는 능력에까지 정착되었다면 일어날 일이 아니다.

 

군부 독재를 극복한 흐름을 이어받아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다. 대한민국의 발전 노선은 “건국(새정부수립) - 산업화 - 민주화”의 직선적 상승이었다. 제도적 민주화는 김대중 대통령에서 완수된다. 1987년의 독재도 1998년의 민주화의 결실로 제압되었으니 우리의 역사는 실로 발전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1987년의 ‘턱-억’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조짐을 보이는 ‘신내림’ 변명이 어쩌다가 2019년에도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역사의 퇴행을 암시한다. 이런 나의 해석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여러 사례들 가운데 하나 만을 골라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역사 퇴행이다. 역사 퇴행은 사실 사유(생각)의 퇴행이나 말의 혼란을 의미한다.

 

통치를 인간미와 같은 감성적인 요소를 빼고 철저히 국가라는 높이에서 행해지는지의 여부만 가지고 볼 때, 우리나라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까지만 국가 높이의 대통령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의 대통령들은 진영의 대통령이거나 절반의 역사만을 선택한 대통령들이었다. 실용주의라는 국정 목표를 설정한 정부마저도 결국은 비실용적이라고 평가되던 다른 한 편을 ‘이념’적이라고 배척하면서 결국은 ‘이념’적이 되었으며, ‘참여’나 ‘포용’을 주장하는 정부에서도 노골적으로 한 편의 ‘이념’과 한 편의 계급에 의존하는 ‘참여’와 ‘포용’으로 전락하면서 이념적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이념적이라는 말에는 한 쪽에만 의존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반대세력인 6공화국 출신의 김중권을 비서실장으로 품은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현대의 국가들은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공화(共和)한다. 여기서 한 쪽 만을 위하거나 한쪽 만에 의존하는 통치는 국가레벨의 통치를 완수하기 어렵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의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의 통치는 다 국가 레벨의 통치라기보다는 진영 레벨의 통치였다. 그 흐름이 이번 문재인 정부에서 가장 심해진 것일 뿐이다. 가진 자들을 악으로 치부하거나,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형성된 집단을 처단해야 할 기득권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기류는 이미 극단까지 갔다. 명목상으로만 하나의 나라이지 내용적으로 국민은 이미 둘로 쪼개진지 오래며, 여기에는 통치 권력이 의도적으로 조장하는 측면도 있다. 심지어는 이제 국민을 둘로 쪼개서 다루는 것을 통치 기술로 삼기까지 하는 실정이다. 적폐청산은 국가 전략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특정 진영의 전투력으로만 행사됨으로써 이미 나라를 둘로 쪼개는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한 꼴이 되었다.

 

현재 단계에서 볼 때 우리나라가 도달한 가장 높은 단계는 민주화이다. 우리 사회가 ‘건국(새정부수립) - 산업화 - 민주화’의 발전 기류를 그대로 탔다면 우리는 민주화 다음으로 건너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20여 년 동안이나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민주화 이전으로 회귀하고 있다. 민주화 단계까지 우리는 일등국가, 전술국가, 추격국가였으니, 민주화 다음은 일류국가, 전략국가, 선도국가로 나아가는 길이다. 민주화 다음을 꿈꾸지 않으면 민주화 단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 이전으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민주화까지를 추격국가로 통칭하고 민주화 다음을 선도국가라고 통칭해보자. 물건도 그렇고 제도도 그렇고 문명은 모두 ‘사유’(생각)의 결과다. 문명을 선도하는 선도국가는 스스로 ‘사유’(생각)할 뿐만 아니라, ‘사유’(생각)의 레벨에 자리하는 것에 활동의 주도권을 둔다. 추격국가는 선도국가를 따라가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도국가에서 한 생각의 결과를 수행하거나 집행한다. 그러다보니, 생각(사유)의 레벨에 있는 것에 주도권을 두지 못하고, 오히려 현상(현실)적인 사건들에 좌우된다. 예를 들어보자. 5.18은 민주와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그렇다면, 5.18은 민주와 자유의 확대로만 완성된다. 민주와 자유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를 막는 것은 민주와 자유의 확대를 막는 일이고, 그것은 5.18의 완성과 거리가 멀어진다. 누군가 5.18을 왜곡하는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있는 법률로 처벌하면 된다. 그런데 새로 ‘5.18역사왜곡특별법’을 만들어서 넓은 의미에서 표현의 자유를 막는다면 그것은 민주와 자유의 확대와는 반대의 길을 가는 모양이 되는데, 그러면 5.18은 좁은 법의 테두리에 갇히게 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사유’(생각)의 레벨에 있는 자유와 민주에 주도권을 두지 못하고, 감각의 레벨에 있는 현상적 사건에 활동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주화 다음으로 한 단계 도약해야 한다면, 자유와 민주에 의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현상적 사건이 지배됨으로서 가능하지, 현상(현실)으로 민주와 자유를 통제하려 하면 불가능해진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덩달아 5.18도 완성의 길을 가지 못한다. 

 

대북전단금지법도 예로 들 수 있다. 대북전단금지법도 사유의 레벨에 있는 표현의 자유와 현상적 사건인 북의 위협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북의 위협이라는 현실을 피하려고 더 높은 곳에 있는 표현의 자유를 포기한 격이 되었다. 우리가 민주와 자유의 확대를 염두에 둔다면, 당연히 사유의 레벨에 있는 것을 선택해서 현상적 사건을 통제해야 한다. 오히려 북의 위협이라는 현상(현실)으로 자유와 민주의 토대인 표현의 자유를 막고 있으니 분명히 우리는 뒤로 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 퇴행의 기류이다.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자처하는 세력이 국가의 권력을 차지하고 나서는 오히려 민주와 자유가 축소되고 있으니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표현의 자유가 국정을 모르는 한가한 소리나 현학적인 것으로 들리고, 당장의 역사왜곡 현상이나 북위 위협이 실질적으로 더 커 보인다면, 당신은 미래로 건너가기 어려운 심리상태에 빠져 있다.

 

시선의 높이가 현상(현실)적 레벨에 있는 것은 생각(사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생각은 근본적으로 궁금증이나 호기심이 개입되는 일이기 때문에 현상(현실) ‘너머’나 ‘다음’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크게는 둘로 쪼개져서 각 진영에 갇혀 있는 것은 생각하는 능력이 거세된 까닭이 크다. 진영에 갇혀 있으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진영의 논리와 의지를 그대로 따라서 내뱉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질문은 생각의 활동이고, 대답은 생각 없이도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질문하는 사람은 건너가고 대답하는 사람은 멈춘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새로운 것들과 위대한 것들 가운데 대답의 결과로 나온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다 질문의 결과들이다. 그렇다면 건너가고 도약하고 위대해지고 싶다면, 질문하지 않을 수 없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면 지배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지배당한다. 생각 없이 진영에 빠져 있으면 종내에는 비효율에 빠져 스스로 무너진다. 

 

질문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에게만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에 의존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 독립되어 있다. 진영에 갇힌 사람은 진영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자신으로 독립되어 있지 못하다. 그래서 생각하는 자는 자유롭고 진영에 갇힌 자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주체들의 특징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말을 자기 자신의 존재성과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 경향이 지속되는 것을 우리는 신뢰라고 한다. 결국 자기 자신이 뱉은 언어에 대한 책임성이 강하다. 진영에 갇혀서 생각하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성이 매우 약하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거나 현실과 맞지 않는 말을 하거나 상황에 따라 말을 다르게 한다. 흔히 ‘내로남불’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하는 초기의 통치행위 가운데 내각을 임명하는 일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선거시절부터 인사5원칙을 발표하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내각 인사를 할 때는 인사5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우선 믿을만한 자기편이 필요했을 것이다. 스스로 한 말을 아예 처음부터 스스로 지키지 않았다.문재인 대통령의 통치 행위는 줄곧 이런 종류의 다양한 변주로 이뤄졌다. 현실(현상)적 필요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 사유(생각)의 레벨에 있는 인사 5원칙이라는 ‘말’이 밀려난 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위협이나 역사 왜곡하는 현상(현실)들에 의해 자유와 민주의 근본인 표현의 자유가 밀려난 것과 같다.

 

우리는 민주화 다음으로 건너가야 하는데, 건너가지 못하고 멈춰있다. 건너가려면 우선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면 현실(현상)로 생각(사유)을 통제하지 않고, 생각(사유)으로 현실(현상)을 통제한다.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되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의 역사도 퇴행을 멈추고 전진하기 시작할 것이다. 생각의 힘으로 이제는 그만 건너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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