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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20 : 잔학한 황제로 이어진 북제北齊(L)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3월12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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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71> 진패선의 왕승변 제거

 

왕승변과 진패선은 서로 힘을 합하여 후경을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므로 서로 간의 신뢰가 매운 돈독했다. 왕승변은 아들 왕외를 진패선의 딸에게 장가를 들게 했으나 마침 왕승변이 모친 상을 당하여 혼사를 치르지 못했다. 왕승변은 석두성(건강 서북쪽 성)에 있었고 진패선은 경구(강소성 진강)에 주둔했다. 왕승변은 진패선을 의심(推心)을 가지고 대했는데 형 왕의가 그러지 말라고 여러 번 부탁했지만 듣지 않았다. 왕승변이 소연명을 받아들이는 건으로 진패선과 다투었는데 여러 번 이의를 제기했지만 왕승변이 듣지 않았다. 진패선이 답답해서 한탄을 늘어 놓았다.

 

  ” 무제(소연)의 자식들이 많지만 

    오직 소역만이 원수를 갚는데 열심이었다.

    그 아들 (소방지)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폐위시킨단 말인가.

    내가 왕공(왕승변)과 함께 고아를 의탁 받아 여기까지 왔는데

    하루아침에 고쳐 버리니

    융적에 의지하고 차례에도 없는 사람을 세우는 것은 

    무엇을 하려는 심산인가?“    

 

제나라 군사가 대거 수춘으로 이동하자 첩자들이 제나라가 침략한다는 정보를 알려왔다. 왕승변은 급히 강간이라는 사람을 진패선에게 보내 장차 제나라가 침범할지 모르므로 대비하도록 지시했다. 진패선은 강간에게 경구(진강)를 지키도록 하고 왕승변을 습격했다. 계획을 반대하는 두릉은 비밀유지를 위해 감옥에 가두었다. 장수와병졸들에게 전부터 준비한 금은포백을 나누어주고 진담랑을 경구, 서도 및 후안도를 수군을 이끌고 석두로 보냈다.  진패선 본인은 기병과 보병을 거느리고 서로 만나기로 약속했다. 왕승변은 진패선의 부대가 자신의 명령을 받고 제나라를 방어하러 오는 줄 알았으므로 이상하게 여기지를 않았다.

 

진패선의 군대가 석두성을 난입하자 사무를 보던 왕승변은 그 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도망쳤지만 아들과 함께 사로 잡혔다. 그날 밤 진패선은 왕승변 부자를 목매어 죽였다. 제나라 군사는 건강을 침범하지 않았으므로 왕승변의 지시는 틀린 것이 되었는데 그 잘못된 지시 때문에 자신이 멸망을 초래한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진패선의 반란 낌새를 알고 경계했던 것은 바른 판단이었을 것이다. 진패선은 왕승변 이외의 모든 사람을 사면하고 황제 소연명을 자리에서 내리고 소방지를 세웠다.(AD555년 8월 29일) 제나라에 대해 대국으로 섬기고 칭신하겠다는 약속을 맺었다.

 

<72> 진패선의 북제 격파(AD555)

 

초주와 진주 두 주를 지키던 서사휘는 두 주 들어서 제나라에 항복했다. 서사휘는 비밀리에 임약과 짜고 5천의 기동대를 가지고 건강의 진패선을 공격하고자 했다. 제나라에서도 5천 군사를 덧붙여 서사휘와 임약을 지원하였다. 그에 더하여 안주자사 적자승과 초주자가 유사영과 회주자사 유달마와 함께 1만 군사를 따로 보내 석두로 진격하게 했다. 진패선은 제나라 공격을 막을 방도를 위재에게 물었는데 위재가 답하였다.

 

  ” 동쪽 지역을 제가 장악하면 대세는 끝입니다.

    먼저 동쪽을 확보하고

    군사를 나누어 적의 양곡 보급로를 끊으면 

    제나라 장수의 목은 10일 이면 도착합니다.“

 

진패선은 그대로 진행했다. 제의 서사휘가 11월 건강성을 지키던 진패선을 공격했지만 크게 패하였다. 12월에는 후안도가 서사휘의 본거지인 진군(강소성 육합)을 공략하여 크게 약탈하였다. 서사휘는 임약과 제나라 구원병과 함께 석두성을 점거했는데 진패선이 석두를 포위하고 압박했다. 견딜 수 없게 된 제나라 장수 유달마는 아들을 인질로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진패선의 부장들 또한 건강이 허약하고 물자도 부족하여 화의를 받아들이자고 했다. 진패선은 조카 진담랑을 역시 인질로 보내 화약이 성립되었다. 포위를 풀고 제나라 병사들이모두 북으로 돌아갔으나 제의 고양은 화해하고 돌아 온 유달마를 죽였다. 

 

    

<73> 포학해지는 고양(AD555)

 

청하소무왕 고악은 제나라 황실로써 공훈도 많이 쌓았으므로 명성과 위엄을 크게 떨친 사람이었다. 고양이 즉위하면서 총애를 받아 영군대장군이라는 최고의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정이 없고 야박한데다 과도하게 사치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오래 전에 고악에게 길러졌던 평진왕 고귀언이 고악을 황제 고양에게 비판했다.

 

  ” 청하왕이 참람하게 황궁을 모방하여 집을 짓고

    궁정식으로 집 안에 긴 골목을 만들었습니다.“

 

고양은 이 말을 듣고 고악을 미워하게 되었다. 고양이 설씨를 후궁으로 들이게 되었는데 고악은 누나를 통해 그 설씨를 먼저 자신의 집으로 들여오게 했다. 황제가 설씨의 집에서 놀면서 고악의 누나를 만났는데 자신의 아버지(고악의 아버지이기도 함)에게 사도직을 주기를 요청하였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그 누나를 톱으로 잘라 죽였다. 그리고는 고악에게 자신의 여자를 간음한 것을 책망하자 고악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굴복하지 않았다. 황제는 고귀언으로 하여금 고악에게 술을 보내며 말했다.       

 

  ” 이것을 마시면 온 가족이 온전할 것이오.“

 

고악은 독주를 마시고 사망했다. 고양의 첩이 된 설씨(설빈)은 한 때 황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홀연히 고악과의 관계를 생각해 내고는 아무런 이유 없이 목을 베고 그것을 몸에 품고 연회에 나가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갑자기 설빈의 수급을 꺼내 쟁반 위에 놓고 설빈의 사체를 가지고 비파를 타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런 뒤 모든 것을 수습하여 마주하며 눈물을 뚝뚝 흘려 말했다. 

 

  ” 아름다운 사람을 다시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74> 우문태의 후계 문제 : 운문각으로 결정(AD556)

 

우문태는 AD555년 모든 북위의 황실의 작위를 한 계급 낮추도록 지시했다. 우문태는 효무즤 여동생 풍익공주를 부인으로 맞아서 우문각을 낳았고 요부인을 통해서 우문육을 낳았다. 우문육이 여러 아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아 독고신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우문태가 후게자를 세우려고 공경을 모아놓고 의견을 물었다. 아무도 겁이 나서 말을 하지 못했다. 상서좌복야 이원이 나서서 말했다.

 

  ” 후계는 적자를 세우는 것이지 나이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약양공 우문각이 세자가 되는데 어찌 의심의여지가 있습니까.

    독고신이 싫다고 하면 목을 베어버리면 되는 일입니다.“

 

이원이 칼을 배어 독고신에게 다가가자 우문태가 깜짝 놀라면서 자신의 칼을 뽑고 이원에게 다가가 말렸다. 주변이 모두 이원의 생각에 동의하고 독고신도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말했으므로 사태는 여기서 종결되었다. 이원이 나오면서 독고신에게 사과했다.

 

  ” 대사이다 보니 부득불 그렇게 된 것입니다.“

 

독고신도 이원에게 사과했다.

 

  ‘ 이원 공 때문에 어려운 문제가 결정되었소.”

 

<75> 고양의 술 중독(AD556)

 

AD556년 경 장강 이북은 서쪽의 서위와 동쪽의 북제로 확실하게 세력분할이 되었지만 장강 이남은 사정이 복잡했다. 먼저 진패선은 건강을 중심으로 양나라의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 외의 지역은 여러 세력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강릉에는 소찰이 서위에 복속하면서 독립을 꾀하고 있었고 파릉(무한)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은 후평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더 남쪽 장사에는 왕림이 자립잡고 있었다.  

 

북제 현조 고양은 AD550년 24세 나이로 처음 즉위했을 때는 정신을 바로 차리고 간단하고 안정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인사도 매우 공정하고 적소에 사람을 뽑았으므로 평판도 좋았고 신하들도 정성을 다해 정치를 도왔다. 전쟁에 있어서도 신중하며 과단성 있게 전략을 펼쳐서 큰 공을 많이 일으켰다. 고양이 세운 큰 무공만 여섯 번이다.

 

  ① AD550년 11월 서위 격파

  ② AD552년  1월 고막해 정벌

  ③ AD553년 10월 거란 격파

  ④ AD553년 12월 돌궐 격파

  ⑤ AD554년  1월 경내산호 정벌

  ⑥ AD555년 3월-6월 유연 정벌

 

그러나 공이 쌓이고 좌우에 간신들이 꼬이면서 술 때문에 행동이 방탕해지고 음란해지면서 분별력을 잃어갔다. 일찍이 길을 지나가는 여인에게 황제가 어떤 분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 미치고 어리석은데 어찌 천자 역할을 하겠소?”

 

황제는 그 여자를 죽였다. 누태후(고양의 어머니)가 막대기로 아들을 때리면서 한탄했다.

 

  “ 이 같은 애비니까 이 같은 아이를 낳지 않겠소?”    

 

황제가 말했다.

 

  “ 즉시 이 늙은 어머니를 오랑캐에게 시집을 모내야 하겠습니다.”

 

이 때 누태후는 54세 였으니 시집갈 나이가 아니었지만 술 취한 아들은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뱉었다. 술이 깨면 고양은 후회하고 사과하기를 반복하면서 불을 피우고 그 속으로 들어가려고까지 하였다. 누태후는 어이가 없었지만 아들을 위해 술 때문이니 걱정 없다고 위로할 뿐이었다. 술에서 깨어난 고양은 고귀언에게 몽둥이를 쥐어 주면서 자신을 피가 나도록 때리라고 명령했다. 피가 나지 않으면 목을 치겠다고 호령했다. 누태후가 울면서 고양에게 다가가 껴안으며 말리는 바람에 고귀언은 화를 면했다. 누태후는 대신 회초리를 들고 고양에게 50대를 가볍게 내려쳤다. 고양은 의관을 다시 고쳐 입고 사죄했지만 열흘이 지나지 않아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취중에는 포학하기가 걸주를 능가했지만 술이 깨면 다시 엄정하고 판단력이 살아났으므로 정사를 돌볼 수가 있었고 특히 훌륭한 양음에게 정사를 맡겼기 때문에 나라가 제대로 굴러 갈 수가 있었다. 

 

 

<76> 고양의 충신 양음(AD556)

 

양음은 풍모가 위엄하면서도 모범적이고 결단력이 있었다. 어려운 시절을 겪었던 사람이어서 과거에 음식 한 사발이라도 도와준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 두 배로 갚았고 일찍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살마 조차도 관용으로 살려 주었다. 20년 동안 인재를 뽑으면서 현명하고 강직한 사람을 천거하는 일을 자신의 책무로 삼았다.    

 

기억력 또한 매우 좋아서 한 번 만나면 그 성명을 잊지 않았다. 노만한 이라는 선비가 양음에게 발탁되었는데 너무 비천한 집안 출신이라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양음이 말했다.

 

  “ 공은 일찍이 원자사방에서 꼬리가 짧은 암나귀를 타고 가지 않았소.

    나를 보고도 내리지도 않고 네모난 보자기로 얼굴을 가렸는데

    내가 어찌 경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소.”

 

노만한은 기겁을 하며 그 기억력에 감탄했다.

 

  

<77> 우문태 사망과 우문호 집권(AD556)

 

서위의 안정공 우문태가 병이 들었다. 급히 동생 중산공 우문호를 장안으로 불러들였다. 우문태가 우문호에게 말했다.

 

  “ 내 여러 아들들이 아직 어린데

    외적은 강하기만 하구나.

    천하의 일을 네게 부탁하니 내 뜻을 이루도록 하거라.”

 

우문태가 AD556년 10월 4일 죽었다. 나이가 49세였다. 우문태는 영웅호걸들을 영입하고 그들을 잘 대접하였으므로 많은 인재들이 그를 따랐다. 성품이 호탕하면서 검소하여 허영을 싫어했고 정사에 밝고 유학을 숭상하면서 옛 것을 따르고 시행하기를 좋아하였다. 세자 우문각이 15세 나이로 관직과 작위를 그대로 계승하여 태사, 주국, 대총재가 되었다.

 

죽음을 앞둔 우문태의 간절한 요청을 받은 우문호는 지위가 높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않으려 했다. 우문호는 대사구 우근에게 계책을 물었다. 우근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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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을 무릅쓰고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날 여러 공들이 모여 의논할 때 우근이 말했다.

 

  “ 안정공(우문태)이 아니었으면 오늘이 없었을 것입니다.  

    중산공(우문호)은 형의 아들과 친하고 

    또 직접 고탁을 받은 몸이니 군국의 일은 일단 그에게 위탁해야 합니다.”

 

무리들은 얼굴이 붉어지며 어쩔 줄을 몰랐다. 우문호가 나서서 확실하게 선언했다.

 

  “ 이것은 집안의 일입니다.

    저 우문호가 비록 용렬하나 어찌 형님의 부탁을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우근의 압박을 받고서 모든 공경들이 우문호를 지도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우문호는 기강을 바로 잡고 문무백관을 잘 위로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78> 우문각의 북주 건국 : 周齊陳의 삼국시대 (AD557)

 

우문호는 주공 우문각이 아직 어리기는 하나 서둘러 주군의 자리에 앉혀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겠다고 판단했다. 서위의 주군 공제 탁발곽에게 선양하라고 압박하여 제위를 물려주도록 조치했다.(AD556년 12월 30일) 우문각은 나라 이름을 주(북주)로 정하고 도읍을 장안에 두었다. 이로써 AD383년 탁발규에 의해 건국된 북위는 173년 만에 완전히 멸망했다. 이제 중국은 북제, 북주, 그리고 양(곧 진으로 바뀜)의 삼국으로 분할되는 시대가 열렸다.

우문각은 천왕에 올랐고 이필을 태사, 조귀를 태부 및 대총재, 독고신을 태보 및 대종백으로 임명했다. 우문호는 대사마로 병권을 장악했다. 북주의 여덟 명의 공신을 8주국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우문태를 비롯하여 독고신, 조귀, 왕(원)흔, 이필, 이호, 우근, 후막진숭이다.  

 

조귀와 독고신은 8주국으로써 우문태와 버금가는 중신이었으므로 우문호가 정권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깊었다. 조귀가 나서서 우문호를 죽이려고 했으나 독고신이 나서서 말렸다. 우문씨 일가인 우문성이 그 사실을 우문호에게 알려 조귀는 죽고 독고신은 관직을 면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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