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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20 : 잔학한 황제로 이어진 북제北齊(K)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3월05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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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65> 동위의 서위 왕사정 공격 : 제6차 동서위 전쟁(AD549),

 

AD548년 동위가 양나라와 화평을 체결한 이후 동위 고징은 태위 고악과 행대 모용소종을 10만 대군과 함께 보내 서위의 왕사정이 지키는 영천(하남성 장갈)을 공격했다. 왕사정은 군사들을 매복시켜놓고서 기다리다가 습격하여 동위를 대파하였다.(AD548년 4월) 동위의 고악과 서위의 왕사정은 서로 토산을 쌓고 뺏기고 하기를 수차례 하면서 장기전에 들어갔다. 고징은 고악이 영주를 쉽게 뽑지 못하자 구원병을 보냈지만 여전히 함락시키지 못했다.

 

유풍생의 제안으로 강물을 막아 성쪽으로 돌리자 성 대부분이 무너졌고 고악은 병사를 교대로 투입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왕사정은 몸으로 화살을 막고 돌을 맞으면서도 병사와 함께 분연히 방어를 이어갔다 우문태는 왕사정이 위급하다고 느끼고 대장군 조귀와 군사를 급히 보내 지원하게 했지만 그 지역에 연못과 저수지가 많아서 신속하게 군대를 파견하기 어려웠다. 그 사이 동위에서는 전문 궁수를 동원하여 활로 성안을 공격하여 거의 성이 함락될 즈음 강력한 태풍이 들이닥쳐 동위의 배가 부서지고 동위 군사가 혼란에 빠졌다. 모용소종이 물에 빠져 익사하고 유풍생은 헤엄쳐 올라오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 고징은 모용소종을 잃고 나서 뜻이 많이 꺾였다. 진원강이 고징에게 말했다 

              

  ” 왕께서는 정사를 보필하신 이래 특별한 무공이 없으십니다.

    후경에게 이긴 적은 있지만 외적은 아니고 내적이었습니다.

    지금 영천(하남 장갈)이 거의 함락될 지경이니 서둘러 공적으로 삼으십시오.“

 

고징이 그 말을 듣고 다시 전의를 살려 1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장사로 갔다. 오랫동안 포위공격을 받았던 장사는 소금과 식량이 부족하여 열에 여덟아홉이 굶거나 병들어 죽었다. 큰 바람이 또 불어서 물이 성을 무너뜨리자 고징이 소리쳤다.

 

  ” 왕대장군(왕사정)을 살려서 데리고 오는 사람에게 후작을 줄 것이며

    만약 대장군의 몸에 손상이 있다면 좌우 모든 사람의 목을 벨 것이다.“

      

왕사정은 성 안의 토산에 올라 말했다.

 

 ”내 힘은 꺾였고 계책이 막혔으니 오직 죽음으로 마땅히 사죄할 것이다.“

 

서쪽을 향하여 절을 두 번하고 하늘을 우러러 크게 곡한 뒤 스스로 목을 베려 할 때 도독 낙훈이 말했다.

 

  ” 공은 항상 우리에게

    ‘네가 내 머리를 가지고가서 항복하면 부귀를 누릴 수 있다.’ 고 하셨습니다.

    지금 고상이 저런 명령을 내렸는데

    대장군께서 몸을 해치시면 우리 모두가 연루되어 죽게 되는데    

    공은 홀로 우리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

 

주변에서 왕사정의 몸을 제어하여 자결하지 못하도록 했다. 고징은 사로잡은 왕사정을 크게 예우했다. 처음 왕사정이 영천에 들어갈 때 군사가 8천이었으나 함락되었을 때에는 3천뿐이었지만 한 명도 배반한 사람이 없었다. 노잠이란 사람이 스스로 자결하지 않은 왕사정을 예우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지적하자 고징이 좌위에 말하였다.

 

  ” 나는 노잠이 있었기에 다른 한 명의 왕사정을 얻을 수 있었다.“

 

우문태는 영천을 뺏기자 군대를 모두 빼서 돌아오게 하였다. 

 


<66> 고징의 파살과 고양의 등장(AD549)      

 

고징의 주방 노복 중에 난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서주자사 난흠이었다. 그는 양나라 사람으로 고징이 서주를 장악하면서 서주를 맡게 되었다. 난흠은 고징에게 속죄할 테니 아들 난경을 돌려달라고 애원했지만 한 번만 더 하소연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난경은 그런 난폭하고 몰상식한 고징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고징은 낭야공주를 총애했다. 그는 서위 고양왕 원빈의 서얼 누이동생이었지만 집안에서는 가족이라고 여기지 않아서 손등의 기생이 되었다가 버림을 받았는데 AD545년 길에서 고징의 눈에 들어서 낭야공주가 된 원옥의라는 사람이다. 고징은 낭야공주와 있을 때에는 항상 시종이나 시위를 다 물리치고 둘만 같이 있었다.

 

8월 8일 고징이 진원강과 최계서와 양음 등 최측근과 함께 동위의 선양문제를 가지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난경이 음식을 올리자 고징이 그것을 물리치고 말했다.    

 

  ” 내 어제 꿈에 이 노복이 나를 찍는 꿈을 꾸었소.

    급히 죽여야 하겠소.“

 

난경이 그 소리를 듣고 칼을 쟁반 아래에 숨기고 올라가 음식을 바치자 고징이 소리질렀다.

 

  ” 내가 아직 먹을 것을 찾지 않았는데  

    어찌 급하게 올라오는 것이냐?“

 

난경이 칼을 붙들고 휘두르며 소리쳤다.

 

  ” 내가 오늘 너를 죽일 것이다.“

 

고징은 칼을 피하다가 다리를 다쳐 넘어져 평상 아래로 숨었다. 난경의 무리가 달려들어 평상을 치우고 고징을 죽였다. 양음은 도망가다가 신발 하나를 놓고 달아났으며 최계서는 측간 속에 숨었고 진원강은 칼을 막다가 찔려서 창자가 튀어나오는 부상을 입었다. 태원공 고양(고징의 바로 아래 동생)이 그 소식을 듣고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부서를 지휘하여 들어 가 도적들을 토벌하고 목을 베고 살을 저미었다.

 

  ” 노복이 반란을 일으켜 대장군이 다쳤으나 큰 어려움은 없다.“

 

고양은 고징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았다. 진원강은 상처가 깊어 어머니에게 하직하는 편지를 쓰고 그날 밤에 세상을 떠났다. 주변의 사람들의 권고를 받고 고양은 태원으로 옮겨갔다. 동위의 주군은 황실로 권력을 옮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고양은 태위 고악, 태보 고륭지, 개부의동삼사 사마자여, 그리고 시중 양음을 업에 남겨두고 모든 사람을 이끌고 진양(태원)으로 갔다. 

 

고양은 형님 고징이 세웠던 모든 불편한 제도와 법을 다시 고쳐 원상을 복귀시켰다. 평소 고양을 가볍게 보았던 많은 사람들이 고양의 능력과 수완과 근엄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고륭지와 사마자여 등이 고징이 총애했던 최섬과 최계서가 그동안 악랄한 비행을 저질렀다고 지적하자 장 200대를 친 다음 변방으로 유배를 보냈다.  

 

 

<67> 동위의 선양 : 북제 창업(AD550)

 

동위의 제왕 고양이 AD535년 11월 관부를 개설하고 고덕정이라는 사람을 기실참군으로 썼는데 고양은 거의 모든 것을 이 사람과 의논해서 결정했다. 고덕정이 마침내 선양을 받도록 고양에게 권고했다. 고양이 생모 누태비와 상의하자 누태비는 용과 같은 아버지도 못하고 호랑이 같은 형도 못한 일인데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 말을 고양이 주변에게 알리자 그러니까 더욱이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했다.  

 

고양이 점을 쳐서 좋게 나오자 사주자사 곡률금을 불러서 묻자 곡률금은 불가하다고 말하면서 선양을 권유한 사람을 죽이라고 청했다. 고양은 다시 원로 귀족을 모시고 누태비와 함께 의논했지만 여전히 태비는 고덕정이 꾀어서 그런 것이라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고양은 고덕정을 업으로 보내 관료들의 뜻을 탐문하도록 시켰는데 아직 고덕정이 돌아오기 전에 공훈귀족들과 이 문제를 의논했다. 두필이 나서서 말했다.

 

  ” 만약 선양을 받으시면

    서위 사람들이 천자를 끼고서 스스로 의병이 되어서 

    동쪽(동위)으로 올 것인데 그 때 대왕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양을 강조했던 사람 중의 하나인 서지재는 서위가 군사를 일으키기보다는 저희들도 칭제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사마자여는 고양에게 아직 안된다고 설득했다. 고양은 술사 이밀에게 다시 점을 치게 한 결과 ‘대횡(大橫)’괘를 얻었다. 옛날 한 문제 유항이 얻었던 것과 같은 괘다. 송경업이 본 점에서는 건(乾)괘와 정(鼎)괘가 나왔다. 건은 황제를 의미하고 정은 음력 5월을 뜻한다. 누군가가 5월은 관직에 들어가지 않는 달이고 어기면 죽을 거라고 말하자 송경업이 말했다.

 

  ” 대왕께서 그 자리에 들어가시면 다시 나올 일이 없으니

    당연히 죽어야 나오는 것입니다.“

 

고양이 기쁜 마음으로 결정했다. 5월 6일 상국으로 승진한 다음에 10일 남교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아버지 고환에게는 태조(나중에 고조) 신무(헌무)황제, 형 고징을 세종 문양황제, 연호는 천보, 동위의 이전 황제 원선견을 중산왕으로 책봉했다. 원선견은 다음해에 세 아들과 함께 독살 당했다. 고양은 10명의 종실과 7명의 공신에게 모두 왕호를 내렸다. 7명의 공신은 고적간(장무왕), 곡률금(함양왕), 하발인(안정왕), 한궤(안덕왕), 가주혼도원(부풍왕), 팽락(진류왕), 반상락(하동왕)이다. 

 

우문태는 AD550년 외람되게 칭제한 고양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 선봉에는 우문도가 도독이십삼주제군사가 되어 함양(섬서성 경양)에 주둔하면서 출발날짜를 기다렸다.

 

 

<68> 북제로 투항한 소륜(AD550)

 

소릉왕 소륜의 심복 중에 군사나 백성들로부터 심하게 원성을 사는 자가 있었다. 자의참군 강중거라는 사람이 참다못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사전에 계획이 탄로 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소륜은 갑옷과 병기를 크게 수리하여 후경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상동왕 소역은 그런 소륜을 싫어했다. 8월에 소역은 왕승변, 포천과 수군 1만 명을 소륜이 있는 무한으로 보내 소륜을 영접하다고 거짓으로 말한 다음 장차 상주(장사)까지도 넘겨 줄 것이라고 유혹했다. 처음에는 소륜은 소역의 계략을 몰랐으나 자신의 부하 유룡호 등이 왕승변과 내통하고서 왕승변과 포천이 자신을 잡으러 오는 것을 깨달았다. 소륜이 왕승변에게 편지를 써서 질책했다.

  

  ” 장군은 지난해 다른 사람의 조카(소예)를 죽였고  

    이번엔 다른 사람의 형을 죽이고자 하는데

    이런 패역을 하면서 천하가 부귀영화를 누리게 할 것 같소?“

 

왕승변이 그 편지를 소역에게 보이자 소역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군사를 발동하여 강을 따라 내려갔다. 소륜은 제장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 나는 본래 다른 뜻이 없고 

     오로지 도적(후경)을 소탕하는데 두었는데

     상동왕은 항상 내가 그와 황위를 다툰다고 생각하면서

     군사를 일으켰다.

     지키고자 한다면 저장된 양식이 고갈될 것이고

     싸우고자 한다면 천년 동안 비웃음을 살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도 용납 못할 일이니

     마땅히 하류로 내려가서 피해야 할 것이다.“

  

휘하 장수들은 끝까지 싸우자고 했으나 소륜은 거부하고 작은 배를 타고 제창(호북성 황피현)으로 들어가 북제에게 화의를 청했다. 북제는 소륜을 양왕으로 책봉했다.(AD550년 8월) 그러나 제는 소역과도 화의했으므로 소륜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 여기저기 떠돌던 소륜은 AD551년 2월 소륜은 여남(호북성 종상)에서 서위의 양충의 군대에게 피살되었다.

 

 

<69> 우문태 암살 시도(AD554)

 

서위 상서 원렬이 우문태를 죽이려다가 누설되는 바람에 실패했다.(AD553년 11월) 당시 15살 짜리 서위 황제 원흠은 거사가 실패한 것을 매우 애석해하며 다시 사람을 규합하여 우문태 암살을 모의했다. 여러 원로 황실 친척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렸지만 원흠은 아랑곳없었다. 원흠의 계획이 탄로가 나 우문태는 원흠을 가두고 그의 친동생 원곽을 황제로 세웠다. 원씨 성도 다시 탁발씨로 돌렸으며 그 외에 AD496년 단씨로 성을 바꾼 모든 복씨 성을 원래대로 돌렸다. 

 

 

<70> 북제의 양나라 공격(AD555)

 

북제 고양은 건강의 왕승변에게 편지를 보내 양나라 황제 소방지가 나이가 어리고 유약해서 어려운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으니 소연명으로 대체하라고 했다. 소연명 또한 직접 편지를 보내 자신을 영접하라고 독촉했다. 왕승변이 답변을 보내왔다.

 

  ” 이어받은 주군(소방지)는 황제(소역)에게로부터 나왔으니

    창업주 소연의 후손입니다. 

    밝으신 공께서도 당연히 조정으로 들어 와 

    이윤과 여망의 책무를 계승하셔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자리를 주장하시면 우리는 명령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북제에서는 육법화를 도독형옹등십주제군사 및 태위, 대도독, 서남도행대사로 임명하여 장차 왕승변을 칠 계획을 세웠다. AD555년 3월 소연명이 동관(안휘성 함산)에 도착하여 건강을 협박하자 배지횡이 나와 처음에는 잘 방어해냈으나 제나라에게 크게 패하여 배지횡이 전사하였다. 북제의 공격을 방어하지 못하게 되자 왕승변은 북제에 편지를 보내 소연명을 받아들이고 군신의 예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아들 왕현과 그의 생모 유씨 조카 왕세진 등을 인질로 제나라에 보냈다. 대신 진안왕 소방지를 황태자로 삼을 것을 요구하여 허락을 받았다. 5월 22일 소연명이 채석(안휘성 마안산)에서 장강을 건너 건강으로 들어갔다. 왕승변은 대사마, 진패선은 시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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