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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뉴딜에서 탄소중립으로 휘청거리는 국정 목표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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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12월13일 17시10분

작성자

  • 이덕환
  •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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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월 28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느닷없이 ‘2050 탄소중립’을 선언한 이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10일에는 난데없는 흑백 영상으로 ‘더 늦기 전에 2050’을 주장했다. 청와대 의전비서관의 독창적인 발상이었다고 한다. 취임 3주년을 맞이해 지난 5월 떠들썩하게 내놓았던 ‘그린뉴딜’의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시점이었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국정의 목표가 ‘저탄소 경제’에서 ‘국제사회와 함께 하는 탄소중립’을 돌변해버렸다. 전문가의 조언과 국민적 합의가 존중되는 민주사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황당한 일이다. 널뛰듯 출렁거리는 대통령의 연이은 선언에서는 도대체 국정의 진중(鎭重)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언론의 반응도 역시 싸늘하다. 화려한 수사(修辭)를 빼고 나면 흔해빠진 로드맵도 찾아볼 수 없는 속빈 강정이라는 것이다.

 

너무나도 가벼운 졸속 선언

 

  파리 기후변화협약의 당사국인 우리에게 탄소중립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동안 그린뉴딜에 따라서 2017년 7억 914만톤인 온실가스 배출량을 2030년까지 5억 3,600만톤으로 24.4%를 줄이기로 했었다. 그런 노력을 계속하면 2072년에 넷제로(net-zero)가 된다. 환경부가 유엔에 제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2050 장기저탄소발전전략’(LEDS)의 내용도 그렇게 알려지고 있었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탄소중립 선언으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이제 넷제로를 22년 앞당겨야 한다. 대통령이 그린뉴딜 이후 5개월 만에 갑자기 터트려버린 폭탄선언으로 LEDS를 통째로 뒤집어엎어야 하는 환경부의 입장이 몹시 곤혹스러울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통령의 예고 없는 졸속 선언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2017년 6월 19일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의 ‘탈핵국가 선언’도 역시 역사에 남을 졸속이었다. ‘탈핵’(denuclearization)은 핵무기 개발의 포기를 뜻하는 ‘비핵화’(非核化)와 동의어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975년에 핵비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한 우리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선언이었다. 뒤늦게 문제를 깨달은 정부는 허겁지겁 ‘탈원전’(脫原電)을 내놓았다가 결국에는 독일의 대표적인 에너지 정책인 ‘에너지 전환’(Energiewende)으로 순화시켜야만 했다.

 

  탄소중립에 떠밀려 사라지게 될 그린뉴딜도 신선하거나 적절하다고 보기 어려운 어설픈 선택이었다. ‘대한민국을 추격형 경제에서 선도형 경제로, 탄소의존 경제에서 저탄소 경제로, 불평등 사회에서 포용사회로 바꾸겠다’는 목표부터 진부하고,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추격형과 선도형은 MB 정부 과학기술 정책의 주제어였고, 포용사회는 오늘날 정부·여당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21세기의 한 가운데를 살고 있는 우리가 굳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낯설고 물선 미국의 87년 전 역사책에 묻혀 있던 구시대의 정책을 소환해야만 했던 이유를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더욱이 ‘그린뉴딜’은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했던 경기부양책이었고, 내년에 출범하는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환경 정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30년 후 우리 미래의 꿈을 하필이면 남의 정책으로 포장하겠다는 발상은 부끄러운 것이다. 정책을 내놓는 정부에게 더 높은 수준의 신중함과 책임감을 촉구하고 싶은 형편이다.

 

‘저탄소’와 ‘탄소중립’의 차이

 

  대통령의 시정연설 이후 정부가 콩 볶듯이 바쁘게 움직였다. 결국 부동산 정책만으로도 등골이 휘고 있는 경제부총리가 또 총대를 멨다. 미래에 대한 열정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관료적 대응이었다. 여당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탄소중립을 목표’로 하는 ‘그린뉴딜기본법’을 발의한다. 대통령이 선언은 무작정 쓸어 담아 보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장난이다. 국회를 완전히 패싱해버렸던 탈원전은 먼 산 보듯 했던 거대여당이 무소불위의 입법권한을 뽐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산업부에 에너지 전담 차관을 신설하고, 대통령직속의 ‘2050 탄소중립위원회’를 설치한다. 국무총리실로 밀려나 풀이 죽어있는 녹색성장위원회와 화려하게 출범했지만 아무 역할도 못하고 있는 국가기후환경회의에 대한 고민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고민도 없고, 준비도 없이 등장한 탄소중립이 과연 녹색성장·기후변화대응·탈원전으로 뒤엉킨 에너지·산업정책의 실타래를 얼마나 정리해줄 수 있을 것인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경제부총리가 제시한 ‘3+1’ 전략도 해괴하다. 경제구조와 산업생태계의 ‘저탄소화’는 지나치게 순진하다. 석탄발전을 줄이는 대신 역시 탄소배출에 기여하는 LNG발전을 늘여야하는 현실을 고려하지 못했다. 철강·석유화학 등 소위 ‘고탄소’ 산업의 저탄소화는 꿈나라 동화책 이야기 수준이다. 무작정 전기차·수소차를 늘인다고 반드시 탄소배출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예산·세제 지원으로 ‘탄소중립’을 실현하는 ‘공정사회’를 만들겠다는 주장은 황당하다 못해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저탄소에서 탄소중립으로의 전환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탄소중립의 핵심은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회수(offset)하는 ‘탄소 포집’(carbon sequestration) 기술이다. 숲 가꾸기(afforestration) 이외에는 아직 어느 나라도 실현가능한 기술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걸음마 단계인 인공광합성은 먼 미래의 기술이다. 어설프게 마련하겠다는 ‘기후대응기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정말 심각한 걸림돌은 국민의 경제적·사회적 부담이다. 우리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서 경제·사회의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어리숙한 궤변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현실은 절대 녹녹하지 않다. 탈원전의 엄청난 비용을 끌어안고 있는 에너지 기업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무작정 탈원전을 밀어붙인 정부가 억지로 눌러놓은 전기요금의 수직 상승은 필연이다. 에너지 공기업이 땅을 파서 전기를 생산·공급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탄소세 도입과 유류세 인상도 절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지난 60년 동안의 노력으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킨 원전 기술이 있다. 원전은 온실가스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 진정한 청정 에너지원이다. 탄소 배출을 피할 수 없는 LNG가 반드시 요구되는 태양광·풍력과 같은 짝퉁 청정에너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어떠한 에너지 자원도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에게 원전은 신(神)이 내려준 기적의 에너지다. 물론 원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도 탄소중립은 우리 모두에게 쉽지 않은 과제다.

 

  원전의 위험성이 두렵다고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비겁하고 패배주의적인 것이다. 오히려 안전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제도를 강화해서 위험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겠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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