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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가 일본 총리가 된 세 가지 요인과 한국의 대일(對日)전략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0월05일 12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10월05일 13시54분

작성자

  • 국중호
  • 요코하마시립대 경제학 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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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가 총리가 된 세 가지 요인


2020년 8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건강상의 이유로 돌연 사임을 표명했고, 다음 달 16일 제99대 총리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정권이 출범했다. 요시히데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 스가 가즈사부로(菅和三郎)가 남만주철도에서 일했을 때, 상사로부터 “아들이 태어나 이 이름을 붙여주면 출세할 것”이라 하여 지어준 이름이다. 이름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운도 따랐고, 그의 노력도 뒷받침 되어 정치가로서의 야망이 실현되었다.

 

스가가 일본 총리가 된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일본에서 정치가로 출세하려면 간반(看板, 간판), 지반(地盤), 가반(鞄, 가방)이라는 ‘삼반’이 필요하다고 회자되곤 한다. 간반은 높은 지명도, 지반은 충실한 후원조직, 가반은 풍부한 선거자금 동원력을 뜻한다. 삼반이 없었던 스가가 어떻게 일본 총리가 되었을까?  ‘큰 나무에 기대기’, ‘계속은 힘이다’, ‘무파벌의 파벌 제어와 소외자 관심’이라는 세 가지 요인이다. 이를 토대로, 한국이 어떤 식으로 일본을 상대하는 것이 현명한 전략일 것인지에 대해 제언해 보기로 한다.

 

'큰 나무에 기대기'


먼저 ‘큰 나무에 기대기’ 요인이다. 일본에는 ‘이왕 의지할 상대를 선택한다면 힘 있는 자가 낫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기대려면 큰 나무에 기대라(寄らば大樹の蔭)’는 속담이 있다. 스가는 이 속담 전략을 잘 이용했다. 일본에서 지금과 같은 의원내각제가 실시된 것은 18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원내각제 역사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해 온 정치세력은 메이지(明治) 신정부를 세우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쵸슈한(長州藩, 현 야마구치현(山口縣)) 출신이다. 지금(2020년 10월)까지 135년 동안 65명의 총리가 있었는데 이 중 야마구치현 출신이 9명이나 된다.

 

스가는 동북지방 아키타현(秋田縣) 출신이다. 동북지방은 일본 역사에서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에도(江戶) 막부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 유신(1868년)으로 신정부가 들어섰을 때도 그랬다. 메이지 유신은 쵸슈한(현 야마구치현)과 사츠마한(薩摩藩, 현 가고시마현(鹿兒島縣))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무사정권이었던 에도 막부(幕府, 바쿠후)를 물리쳐 신정부를 세우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며 근대화를 이루어간 역사적 사건을 뜻한다. 에도 막부와 메이지 신정부와의 싸움에서 동북지방은 패한 막부 편에 섰다는 연유도 있어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정치 기반이 약했다.

 실제로 아키타현 출신 총리는 스가가 처음이다. 스가는 자신에 비해 삼반이 월등히 강한 야마구치현 출신 아베 신조를 내세웠고 자신은 막후 역할을 자처했다. 아베 도령을 무동 태워 총리에 앉히는 전략이었고 그 전략이 잘 맞아떨어졌다.

 

'계속은 힘이다'


다음으로 ‘계속은 힘이다’라는 요인이다. 일본에서 어떤 일을 추진하면서 곧잘 등장하는 격언 표현이 ‘계속은 힘이다(繼續は力なり)’라고 하는 말이다. 스가는 이 말을 실천하며 뚝심으로 밀고 나갔다. 지속적으로 보좌 역할을 잘 하는 이들에 높은 호감도를 갖는 곳이 일본이다. 스가는 아베에 대한 충성으로 일관하며 정치적 잡음을 잠재우는 해결사 역할로 나섰다. 아베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총리를 역임하였고 스가는 그런 아베를 보좌하며 제2차 아베정권(2012년 12월~2020년 9월) 내내 최장수 관방장관으로 있으면서 꾸준히 자신의 지명도를 높여갔다. 

 

일본에선 겉으로 자신을 뽐내며 드러내는 사람을 경계하며 멀리하려 한다. 스가는 아베가 말실수를 하거나 무리수를 두어도 거기에 토 달지 않고 비호하고 언론과 여론의 비판을 잠재우며 정권을 옹호하는 쪽으로 유도시켜 갔다. 그러면서도 아베 정권에서 설치한 내각 인사국(人事局)을 통해 인사 문제에 민감한 공무원들을 차츰차츰 장악했다. 발톱을 숨기며 ‘인사이동’이라는 권한 행사로 말없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스가를 고위 관료들은 두려워했다. 이처럼 스가는 ‘계속은 힘이다’를 실천하며 ‘2등으로부터 1등 전략’을 구사했고 이 또한 주효했다.

 

파벌 제어와 소외자 관심


 마지막으로 ‘무파벌의 파벌 제어와 소외자 관심’ 요인이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당내 파벌이 큰 힘을 발휘한다. 스가는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무파벌이다. 무파벌인 그가 어떻게 총리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민당 내에서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는 니카이 토시히로(二階俊博)간사장에 가장 먼저 접근하여 니카이파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 후 아베 전 총리가 속했던 최대 파벌인 호소다(細田)파의 지지를 이끌어내자, 정치 지분(장관이나 당 간부 자리) 상실을 우려한 아소(麻生)파, 이시하라(石原)파, 다케시타(竹下)파도 덩달아 편승했다. 

 

 집단주의가 강한 일본에선 개개인이 소신을 피력하거나 개성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며, 많은 이들이 소외감이나 무력감을 느끼며 지내곤 한다. 스가는 말 붙여주기를 기다리는 국회의원들을 파고 들었고, 식사시간 등을 활용하며 한 사람 한 사람에 우호감을 심어나갔다. 결국 파벌에 속해 있지 않거나 삼반에서 밀리고 있던 의원들도 “스가를 지지한다”며 목소리를 높여갔다. ‘무파벌의 파벌 제어와 소외자 관심’ 전략은 잘 들어맞았고, 그 결과 당 총재 후보로서의 소신이나 사람됨됨이에 대한 토론도 있기 전에 자민당 소속 의원 3분의 2를 초과하는 의원 표가 일찌감치 스가 쪽으로 기울어졌다.

 

한국의 대일(對日) 전략


스가가 총리가 된 과정은 ‘살아남기’의 달인이 되기 위한 처신술의 표본을 보여준다. 더불어 한국으로서 일본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다. 스가는 “아베 정권을 계승한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는 향후 외연을 키워 나가고 재선을 노리면서 자기 색깔을 드러내 갈 것으로 보인다. 

 

스가가 어떻게 정국(政局)의 난제를 헤쳐 나아갈지는 예단하기 어려우나, 그 동안 그가 해 온 방식으로부터 유추해 볼 수는 있다. 그는 내부조율 작업 없이 갑작스런 결정을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물밑 작업으로 조정하고 그렇게 결정된 사항을 가시적 성과로서 보이려는 성향을 띠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이 일본을 상대할 때는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는 축적 방식이 힘을 발휘한다. 일본은 ‘터놓고 담판을 보자’는 방식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스가의 성향으로부터도 짐작할 수 있듯이, 물밑조정을 하여 합의된 것을 겉으로 발표해 가며 이루어가려 한다. 공개적으로 “허심탄회하게 결판을 짓자”며 들고 나와서는 진전을 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다행히 스가가 아베 정권과 차별화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 디지털청(廳)의 신설이다. 일본에 비해 디지털화가 앞서 있는 한국으로서 이를 계기로 한일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겠다 싶다(2020년 세계 디지털 평가에서 평가 대상 63개국 중 한국 8위, 일본 27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발표). 한국 정부로서는 스가 정권에 대한 면밀한 파악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는 전략을 세워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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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20년10월05일 13시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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