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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1:3대(代)만에 최강국 전연을 무너뜨린 모용위(H)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0월02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8월17일 14시1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36) 전연 모용준의 후조 내침계획(AD349)

 

사흘 뒤 4월 19일 업성에 태풍이 불었다. 집채만 한 나무가 뽑히고 바가지만 한 우박이 쏟아졌다. 궁궐에 큰 불이 한 달 이상 꺼지지 않는 바람에 많은 누각과 궁전이 불에 탔다. 승여나 어복도 절반 이상 타버려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이 때 패왕 석충은 계성(북경)에 진수하고 있었다. 동생 석준이 석세를 폐위시키고 황제로 앉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석준 토벌군대를 일으켰다. 5만 군사를 이끌고 업으로 내려오는 동안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정의로운 군사에 동참을 호소했다. 옛 조나라와 연나라 지역에서 구름처럼 지원군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10만이 넘는 대군이 되었다. 석준은 석충에게 편지를 보내 뜻을 충분히 이해하므로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군사를 돌리라고 권유했다.

 

석충은 부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군사를 돌릴 수가 없었다. 석준은 석민과 이농에게 정예군 10만을 주어 격퇴시킬 것을 명령했다. 석충의 10만 군사와 석준의 10만 군사는 평근(하북성 석가장 동남쪽 조현부근)에서 싸웠는데 석충이 크게 패하였다. 석충은 도망가다가 원지에서 붙잡혀 참수되었고 군사 약 3만 명은 매몰되었다.

 

석민은 석준에게 석호의 명령에 따라 관중지역, 즉 진주(섬서성 중남부)와 옹주(산서성 서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포홍이 장차 국가의 위협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당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종용했다. 석준이 포홍의 옹진주도독직을 파면하자 포홍은 화가 나서 동진에 투항하고 말았다.(포홍은 나중에 성을 부씨로 바꾸었고 전진을 세운 부견의 할아버지다)

 

석호의 죽음과 그에 다른 승계문제로 후조 조정이 혼란에 빠진 틈을 노린 것은 북쪽의 전연이었다. 평적장군 모용패가 작년 AD348년 모용황이 죽은 다음 계승한 그의 아들 모용준에게 편지를 써서 지금이야말로 한 칼에 후조를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북평태수 손흥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모용준은 아버지 대상(大喪)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답답하다고 느낀 모용패가 말을 달려 용성으로 가서 모용준을 설득했다.

 

“ 잃기는 쉬워도 얻기가 어려운 것이 기회입니다.”

 

모용준이 말했다.

 

“ 업에서 비록 혼란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등항이 낙안을 점거하고 있으니 쉬운 일이 아니요.

  군사는 강하고 곡식은 충분한데 

  바다로는 내려 갈 수가 없으니 노룡으로 가야 할 텐데 

  그 지역은 험준하기 이를 데가 없지 않소?“  

 

모용패가 응답했다.

 

“ 등항의 군사들은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만약 대군이 몰아치면 순식간에 와해될 것입니다.

  신을 선봉으로 세워 주신다면 동족 도하(요녕성 금주)로 나아간 다음에

  영지(하북성 천안)를 끼고 내려와 전격적으로 공격하면 

  적군은 그대로 놀라 무너지고 궤멸될 것입니다.“    

 

모용준은 미적거리며 결정을 하지 못하고 오재장군 봉혁에게 물었다. 봉혁이 대답했다.

 

“ 군사를 쓰는 방법이란

  적이 강하면 지혜를 쓰고 

  적이 약하면 형세를 쓰는 법입니다.

  따라서 큰 것이 작은 것을 먹는 것은 이리가 돼지를 먹는 것과 같고

  잘 다스려진 것으로 혼란한 것을 교체하는 것은 

  마치 태양이 눈을 녹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전부터 덕을 쌓으시고 인정을 베푸셨으니

  군사는 강하고 병졸은 훈련된 정예군입니다.

  석호와 그 아들들의 난폭한 정치가 극에 달한 지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하루라도 빨리 건져주기를 목을 빼어 고대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계성을 빼앗고 다음으로 업도(하북성 임장현)를 향하여 기치를 높이시면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업고서 대왕을 환영할 것입니다.

  흉적들은 깃발만 보고도 얼음 부서지듯 할 것이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종사중랑 황홍은 이렇게 말했다.

 

“ 지금 태백성이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세성은 필성의 북쪽에 모이고 있으니 

  음국이 천명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서둘러 군사를 펴십시오.“

 

절충장군 모여근도 거들었다.

 

“ 중군의 백성들이 석씨의 폭정에 쪄들어 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모두가 주인을 바꾸고 끓는 물과 불 속에서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는 천년에 한 번 오는 기회이니 놓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장수들이 한 목소리로 전쟁을 원하자 모용준이 웃으며 이들의 말을 쫓았다. 20만 군사를 모아 준비에 들어갔다.(AD349년 4-5월)

  

(37) 후조 석감의 쿠테타와 석민(염민)의 쿠테타(AD349)

 

모용준의 남침 이후 후조 조정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지난 AD349년 4월 석세의 조정을 무너뜨릴 때 석준은 석민에게 황태자 자리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정작 쿠테타가 성공하자 자신의 아들 석연에게 황태자 자리를 주었다. 군권을 쥐고 정치를 좌지우지 하려던 석민은 석준에게 불만을 가졌지만 드러내지 않고 휘하 장수들에게 많은 상훈을 내려서 환심을 샀다. 석민의 생각을 알고 있는 석준은 석민이 내린 상훈을 대부분 거절하거나 깎아내려 버렸다. 장수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중서령 맹준과 좌위장군 왕난은 석민의 병권을 서둘러 빼앗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석준에게졸랐다. 석준은 석시 종친 대신 석감과 석포와 석소 등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 이들의 생각은 한 결 같이 석씨 성이 아닌 석민을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태후는 반대했다. 

 

“ 극노(석민의 어릴 적 이름)가 없었으면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소.

  조금 교만하고 방종하다고 어찌 이리 급히도 죽일 수가 있겠소?“ 

 

석감이 몰래 빠져나와 환관 양환을 보내 석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석민은 이농과 왕기 겁박하여 석준 폐위를 모의한 다음 장군 소언과 주성에게 갑옷을 입혀 3천 군사로 남대에서 석준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석준은 태연히 부인과 바둑을 두다가 주성에게 물었다.

 

“ 주모자가 누구냐?”

 

주성이 말했다.

 

“ 의양왕 석감이 당연히 즉위 해야겠지요.”

 

석준이 말했다.

“내가 오늘같이 며칠 만에 물러나야 하는데

 석감은 며칠이나 가겠느냐?“

 

석준은 잡혀서 그날로 곤화전에서 참수되었고 정태후, 태자 석연, 맹준, 왕난 장비가 같이 죽었다. 석감이 즉위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석민은 대장군, 녹상서사 및 무덕왕에 봉해졌다. 사공 이농은 대사마, 낭개가 사공 노심이 중서감이 되었다. 석감은 불만을 지닌 채 서쪽 고향으로 쫓겨 가는 포홍 세력들을 무마하기 위해 업에 포로로 있던 포홍의 아들 포건을 풀어주면서 포홍에게는 도독관중제군사, 정서대장군 및 옹주목, 영진주자사로 삼았다. 

 

석감은 석민이 결국에는 반란을 일으킬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몰래 낙평왕 석포와 중서령 이송 등에게 야밤을 타고 궁중에 거처하는 석민과 이농을 습격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하고 궁궐이 소란해지면서 황궁무사와 석민군사 양측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황제 석감은 발뺌을 하기 위해 이송과 석포를 잡아 죽여서 자신과 무관한 일임을 보이려 했다. 석민이 일단 승기를 잡고 석감을 유폐시키면서 일은 그렇게 넘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석민 일당에게 반감을 가진 석호의 아들 석지는 요익중과 포홍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신의 임지인 양국에서 군대를 몰아 남쪽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석민은 이농과 7만 군사로 석지를 대응했다. 석감을 지지하고 석민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궁성 내에서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중령군 석성과 하동태수 석휘가 석민과 이농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했고 손복고도 황제 석감의 밀지를 받고 석민을 공격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했다. 손복도는 석민의 칼에 죽고 석감은 유폐되었으며 궁궐 안에서 무기를 들고 잇는 자는 모두 참수되었다. 한족이었던 석민은 명령을 내려서 한족으로써 호족과 갈족과 같은 이민족의 목을 베어 오는 자에게는 문관의 경우 3등급을 올려주고 무관은 모두 아문을 제수한다고 했다. 하루에 수만 명, 전체적으로 20여 만 명 이민족 목이 날아갔다. (AD349년)   

 

 

(38) 모용준의 후조 공격(AD350)

 

후조 조정이 혼란에 빠지면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자 후조의 영토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남쪽의 동진 조정에서는 실력자 환온이 북벌을 진행시키고 있었고 과거 후조의 장수였던 요익중과 포홍 또한 자기의 영역에서 독립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체계적으로 후진 공략계획을 진행시킨 쪽은 전연이다.   

 

주군 모용준은 모용패에게 2만 군사를 주어 동쪽길로 도하(요녕성 금주)로 나아가게 하고 모여우에게는 서쪽 길로 열옹새(거용관)로 나가게 했으며 모용준 스스로는 중간 길로 노룡새(하북성 천안)로 나와서 후조를 공격하면서 세자 모용엽에게 수도 용성을 지키게 했다. 전연의 군대가 몰려오자 후조의 장수들은 다투어 항복하거나 도망쳤다. 모용준이 계(북경)을 함락시키고 적장 왕타를 잡아 목을 베었다. 모용준이 왕타의 사졸 1천여 명을 땅에 묻으려 하자 모용패가 일어나 말렸다.

 

“ 후조의 주군들이 포학하므로 

  왕께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려 

  군사를 일으켜 일어나신 것 아닙니까.

  백성들을 구제하시어 위로하시지는 못할망정

  잔혹하게 땅에 묻어버리신다면   

  아마 왕의 군사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없을 것입니다.“ 

 

 

(39) 이적(AD350)

 

전연의 군사들이 남으로 진격하면서 범양(하북성 탁현)에 다다랐을 때 범양태수 이산은 도저히 방어할 능력이 되지 않음을 알고 관내의 여덟 개 성과 모든 부하들을 대동하고 모용준에게 투항했다. 모용준은 이산을 그대로 범양태수로 재임용했다. 그러나 이산의 아들 이적은 유주별가로 있다가 공격을 당하자 아버지와는 달리 주군 유주자사 왕오를 따라 남하했다. 정동장군 등항이 왕오에게 조용하게 말했다.

 

“ 이적의 아버지는 전연에 투항했소.

  지금 이적이 우리에게 와 있으나 

  언제 우리를 배반하고 전연으로 갈지 모르오.   

  지금 해치우는 것이 좋겠소.“

 

왕오가 등항을 나무라며 말했다.

 

“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지금과 같은 전쟁의시기에 

  이적은 국가의 대의를 위하여 가사를 버렸으니

  그의 정절은 옛날의 열사라도 이보다 지나친 사람이 드물 것이요.

  마침내 그를 시기하고 혐의를 가지고 덮어씌우다니 

  만약 후조의 병사들이 들으면

  스스로 도적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겠냐고 하지 않겠소?

  무리들의 마음이 한 번 흐트러지면 

  다시 주워 담기 어려운 법이니 스스로 무너지는 첩경이요.“

 

등항은 자신의 생각을 거두었다. 그러나 왕오는 다른 사람들이 등항과 같은 생각을 할까 두려워 이적을 북쪽으로 돌려보냈다. 이적은 작별하고 전연으로 들어와 연왕 모용준을 만났다.

 

“그대는 천명이 뭔지 알지 못하고 

 아버지를 버리고 명성을 좇다가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군.“

이적이 대답했다.

 

“ 신은 옛 주인을 사모하였고

  뜻은 작은 절개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관직에 있는 자가 어찌 주군 아닌 사람을 모시겠습니까.

  전하께서 바야흐로 의를 가지고 천하를 얻으시려하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 신이 전하를 만나본 것을 늦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용준이 기뻐하며 그를 잘 대우했다. 이 해에 모용준의 전연 국경은 북경을 지나 하북성 중부까지 펼져 졌다. 

 

    

(40) 국가이름을 위로 바꾼 석민(AD350)

 

황제 석준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석민은 ‘계조이(繼趙李)’ 라는 도참설, 즉 ‘조씨를 잇는 사람은 이씨‘를 신봉하여 성을 이씨로 바꾸고 나라도 위(衛)로 고쳤다. 석준 밑에 있던 신료들은 뿔뿔이 지방으로 흩어져 할거하였다. 예를 들어 요익중은 섭두(하남성 조강현), 단감은 진류(하남성 진류현), 포홍은 반두(하남성 준현), 장침은 부구(하북성 자현) 등지를 장악하고 웅거하였다. 결국 후조는 석민이 장악하고 있는 업성 부근과 석지가 장악하고 있는 형태 부근, 그리고 군웅이 할거하고 있는 여러 지방으로 갈기갈기 찢긴 셈이었다.

 

기주로 달아났던 여음왕 석곤은 7만 무리를 이끌고 석민을 공격하다가 참패당했다. 갇혀있던 석감은 몰래 환관을 바깥으로 장침에게 보내 석민을 습격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교활한 환관은 그 사실을 석민과 이농에게 고해 바쳤다. 석민과 이농은 결국 석감과 그 식솔들을 모두 죽이고 남아있는 석호의 손자 28명을 죽였다. 석씨 성을 가지고 살아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석민은 주변의 강권에 따라 국호를 다시 대위(大魏)라고 고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역사에서는 이 나라를 염씨의 위나라 즉 염위(冉魏)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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