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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1:3대(代)만에 최강국 전연을 무너뜨린 모용위(E)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9월11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8월17일 14시1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6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21) 모용황의 영토 사방 확장(AD339)

 

후조의 공격을 잘 받아치고 또 요녕성 전지역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진 조정에서는 모용황에게 연왕 칭호를 내리지 않았다. 동진 조정 내부에 사도 왕도가 죽는 등 여러 곡절이 있어서 혼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용황은 동진 조정에 장수 유상과 국운을 보내 최근의승전을 보고하고 후조를 맞대응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칭왕하지 않을 수 없었음 알려서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동진 조정에 함께 군사를 크게 일으켜 중원지역(즉 후조)를 토벌하자고 제안했다.   

 

후조가 버티고 있는 서쪽과 남쪽을 공략하는 대신 모용황은 적극적인 동진정책을 펴서 고구려 영토를 침략했다.  전연의군사가 신성(요녕성 신빈)에 이르자 고구려왕 고소(고국원왕)가 동맹을 맺기를 간청해 오므로 모용황은 군대를 돌려 돌아왔다. 대신 아들 모용낙과 모용패를 북쪽 우문씨 영토로 보내 그 지역을 경략했다. 

 

 

(22) 미친 척한 모용한(翰)을 모셔 온 모용황(AD340)

 

AD338년 후조의 석호와 전연 모용황의 연합작전으로 단씨가 무너질 때 모용한(翰)은 우문씨에게로 달아났었다. 그러나 우문씨의 주군 우문일두귀는 모용한의 재주와 용기를 항상 꺼리며 시기했었다. 모용한은 자신을 극도로 경계하는 우문일두귀를 우려하여 일부러 미친척하면서 술에 취하기도 하고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하면서 길에서 밥을 빌어먹기도 했다.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려는 작전이었다. 처음에는 모용한에게 의혹의 눈을 가지고 보았으나 계속되는 기행과 걸행을 보고 우문씨들은 더 이상 경계하지 않게 되었다. 어디를 가든 살펴보지도 않았고 의심하지도 않았다. 모용한은 이 기회를 살려 적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의 지형적 특징과 지역 인물들에 대하여 꼼꼼히 기억에 남겨 두었다.  

 

전연왕 모용황은 서형 모용한이 애초부터 반란을 획책한 것이 아니며 시기와 혐의를 받아 몸을 피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용황이 형의 그런 행각 소식을 듣자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 형님이 돌아오실 생각이 있으시구나.”  

 

왕거를 보내 모용한을 모셔오게 했다. 모용한은 원래 3석이 넘는 큰 활을 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작은 활을 손수 만들어 왕거에게 주어 땅에 묻게 하고는 그 사실을 모용한에게 알려 주도록 했다. 큰 활을 사용하면 당장에 모용한인 것을 알아차릴 것이므로 신분을 속이기 위해 작은 활을 사용하라는 뜻이 숨어있었다.

 

모용한이 그 해 2월 우문일두귀의 명마를 훔쳐서 묻어 둔 활과 아들 두 명과 함께 전연의땅으로 도망갔다 우문일두귀가 기병 100명을 보내 추격했지만 모용한이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오랫동안 손님이었을 뿐이라서

  돌아갈 생각이 깊었었소.

  이제 좋은 말을 얻었으니 돌아갈 이유가 없소.  

  내가 과거 어리석은 척하며 그대를 속였는데

  내 활솜씨가 아직 살아있으니

  죽지 않으려면 가까이 다가오지 마시오.“

 

추격하던 기병들이 모용한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가까이 다가오자 모용한이 다시 말했다.

 

“ 내가 너희 나라에 오래 살았으니

  너희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

  너희들이 나에게 100보 떨어져 칼을 세워놓으라.

  내가 활 한 발로 칼을 맞추면 너희들이 돌아 갈 수 있을 것이고

  못 맞추면 너희들이 와서 나를 잡아가라.“

 

쫓아오던 기병들이 칼을 모용한 백보 앞에 세워 놓았다. 모용한이 한 발의 화살로 그 칼의 고리를 정확히 맞추자 기병들이 혼비백산 도망쳤다. 서형 모용한이 돌아오자 모용황은 크게 기뻐하면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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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석호의 3차 모용황 공격(AD340) 

 

강력한 영토를 자랑하는 후조의 석호는 자그마한 변방의 나라 전연을 멸망시키지 못한 것에 격분해 있었다. AD340년 세 번째로 전연을 공격했다. 이번에는 전에 없는 대군을 동원했다. 사주, 청주, 서주, 유주, 병주 및 옹주의 일곱 주에서 가호 당 사람을 차출했는데 다섯 명의 장정이 있는 가호에서는 세 명, 네 명의 장정이 있는 가호에서는 두 명을 뽑았다. 이렇게 해서 약 50만의 대군을 모았고 배를 1만 척 마련하고 군량미 천백만 곡을 낙안성(하북성 낙정현)으로 운반했다. 그리고 북경 주변의 1만 여 호를 남쪽 여러 주로 옮겨서 전연에 호응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지역 백성들의 말을 모두 동원했으며 거역하면 요참에 처했다. 이렇게 해서 말 약 4만여 필을 얻었다. 근래에 보기 드문 대군의 동원이었다. 40여 년 뒤인 AD389년 전진 부견이 동진을 치기 위해 일으킨 비수대전 때와 맞먹는 군사동원이다.  

 

모용황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 석호가 지금 낙안성만 방어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분명히 계성(북경 서남쪽)방어는 치밀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저들을 속여서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뒷길로 습격해 들어가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10월 모용황은 제군을 이끌고 영옹새(거용관)으로부터 군사를 몰아서 계성을 습격했다. 후조의 유주자사 석광은 수만 명의 군사를 가지고서도 나오지 않고 버티었다. 모용황의 군사들은 계성 부근을 헤집고 다니면서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모용황은 군사를 몰아서 계성 남쪽으로 침입해 들어가 고양(하북성 보정)까지 다다랐다. 석광은 나약하다고 죄를 물어 소환되었다. 

 

 

(24) 전연의 사신 유상의 동진 설득(AD341) 

 

모용황이 동진 조정에 파견한 유상이 건강에 도착하였다. 황제 성제 사마연이 유상에게 모용황이 평안한지를 물었다. 유상이 잘 있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동진조정을 섬긴다고 말했다.그리고 모용황에게 대장군 및 연왕의 글이 새겨진 인새를 요청했다. 조정 신료들이 말했다.

 

“ 옛 고사를 보면 대장군이 변방에 있었던 적이 없었고

  또 한과 위 이래로 이성(異姓)은 왕으로 책봉된 적이 없었습니다.“     

유상이 발끈하며 나섰다.

 

“ 유연(전조)과 석륵(후조)이 천하를 혼란에 빠뜨려 

  장강 이북이 융족들의 온상이 되었습니다만

  그 잘난 중화의 공경들 중에서 어깨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창과 칼을 휘둘러 저 역적들을 깨뜨렸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모용황 장군의 부자만이 힘과 마음을 다하여 

  조정을 섬기면서 여러 차례 융적들을 섬멸하였습니다.

  공로가 매섭기 그지없는데

  저 북쪽의 땅을 애석하게 생각지 않으시고 

  왕읍으로 책봉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옛적 한 고조는 한신과 팽월에게 왕작을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황제의 대업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항우는 인새를 새겨놓고 차마 주지 않다가 

  끝내 위험이 닥치고 망하게 되었습니다.

  제 지극한 마음은 그 맡은 일을 잘 수행한 것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마음이지만

  충성을 다 바치는 의로운 나라(전연을 의미)를 조정이 멀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조정을 사모하라고 권고할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 자못 아쉬울 뿐입니다.“       

 

동진의 상서 제갈회는 유상의 자형이었는데 이렇게 말했다.

 

“ 이적들이 서로 싸우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도 해가 될 것이 없습니다. 

  비록 모용황이 석호를 제거한다고 해도 

  또 다른 한 사람의 석호가 만들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어떻게 조정이 기뻐할 수 있겠소.“

 

유상이 나서서 말했다.

 

“ 과부라도 나라가 망하는 것을 어찌 걱정하지 않겠소.

  헌데 지금 동진 조정은 큰 위험에 직면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대는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서 어찌 근심하는 마음이 

  그토록 없단 말이오. 

  미와 격의 공로가 없었다면 어찌 소강의 하나라 제사를 지켰겠으며

  환공과 문공의 승리가 없었다면 

  어찌 주나라가 좌임(오랑캐 복속)을 면할 수 있었겠소

  모용황 장군께서 창을 베고 아침을 기다리면서 

  흉적을 섬멸하는 것에 뜻을 두셨는데

  그대는 잘못되고 현혹하는 말로써 충신을 꺼리고 이간질하는 것이요.

  사해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대와 같은 사람이 조정에 있어서 그런 것을

   내가 오늘에야 알았소.“

 

유상이 일 년 이상 건강에 머물렀지만 모용황의 왕작 수여 문제가 결정되지 못했다. 유상이 마침내 중상시 욱홍에게 말했다. 

 

“ 지금 석호는 여덟 주를 장악하고 장강과한수를 병탄하고자

  10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여러 이민족들이 석호를 숭상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오로지 모용황 장군 만이 석호를 맞서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데도 특별히 예우하지 않으신다면 

  천하 백성들은 마음을 옮겨갈 것이고 국체를 해체할 것입니다.

  공손연은 오나라에 한 치의 땅도 덧붙여주지 못했지만   

  주군은 그를 연왕으로 책봉하고 구석을 얹어 주었습니다.

  모용황 장군은 석호가 내린 후한 상과 요위대장군과 요서왕의 자리를 

  부정하고 불의하다고 하여 마다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헛된 명분 하나만으로 이름 하나를 아끼려고

  충성스럽고 순종하는 사람을 막고 억누른다면 어찌 장구한 

  사직의 계획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나간 다음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중상시 욱홍이 놀라 황제에게로 달려가서 왕작을 주자고 졸랐다. 황제가 마침내 그것을 허락했다. 모용황에게 사지절, 대장군, 도독하북제군사, 유주목, 대선우 및 연왕의 긴 칭호를 내리고 필요한 물건과 법전과 책서를 갖추어 내렸다. 세자 모용준에게는 가절, 안북장구느 동이교위, 좌현왕으로 삼고 상응하는 물자를 내렸다. 유상에게도 대군태수와 함께 임천향후와 원외산기상시라는 직책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당시 동진의 고관대작들은 나라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종을 일삼으면서 서로를 추켜세워 주고 있었는데 유상은 이런 분위기야 말로 망국의 병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연회 자리에서 유상이 이렇게 말했다.

 

“ 사해가 전쟁과 노략질로 폐허가 된지 삼 세대가 지났고 

  종묘와 사직이 빈터가 되어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모든 신료들이 묘당에 참회하면서 근신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강가에 모여 연회나 즐기면서 

  제멋대로 사치하고 방탕하고 있소.

  게다가 오만하고 방자한 것을 현명함으로 여기고

  공정하고 솔직한 말은 듣지 아니하고

  정벌하는 공로를 폄하하면서 조롱을 하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무엇으로 주군을 높이고 백성을 지키겠소?“ 

  

유상은 장차 후조 석호가 파촉의 성도를 기점으로 웅거하고 있는 성한의 주군 이수를 침탈 한 뒤에 동진으로 칼끝을 돌릴 것이라고 경계하면서 그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할 것을 주문하였다. 

 

 

(25) 전연의 수도 이전 : 극성(요녕성 금주)에서 용성(요녕성 조양)으로(AD342) 

 

동진 조정에서는 돌아가는 유상과 함께 곽희를 사절로 보내었는데 떠난 지 6개월이 지난 AD341년 7월에 극성으로 돌아왔다. 모용황은 유상의 공로를 높이 사서 동이호군, 영대장군부 장사로 임명하고 당국내사 양유는 좌사마, 이홍은 우사마로 삼았다. 

 

모용황이 아들 모용각을 도요장군으로 삼고서 평곽에 진수하도록 했다. 모용각이 평곽에 도착하고서 백성들을 위무하면서 새 이주민들을 진심으로 보살피자 민심이 크게 그를 따랐다.여러 차례 군사를 내어서 동쪽의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고구려가 모용각의 위용에 눌려 국경을 감히 넘어 올 생각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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