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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L)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9월11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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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52> 탁발준의 예리한 정치(AD456)

 

정주(定州, 하북성 정주시)자사 허종지가 몹시 탐욕스럽게 정치를 하여 혹독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주민들이 허종지를 싫어했는데 그 중에 마초라는 평민이 특히 허종지를 드러내어 비판했다. 허종지가 마초를 때려서 죽이고는 마초가 조정을 비판하므로 벌을 주다가 죽게 되었다고 거짓보고를 올렸다. 탁발준이 이렇게 말했다.

 

 

  ”이는 분명히 속이는 것이다.

   짐이 천하의 주군인데 어찌 마초가 그런 말을 했겠는가.

   반드시 허종지가 죄 지은 것이 두려워 마초르 무고한 것일 것이다.“

 

조사관을 보내 면밀히 수사한 결과 자초지종이 다 드러나게 되었다. 허종지를 정주 도성 남문 밖에서 목을 베었다. 

 

 

<53>드러나지 않은 충신 고윤(高允,AD458)   

 

탁발준을 말하면서 고윤을 빠뜨릴 수는 없다. 고윤은 AD431년 황제 탁발도의 부름으로 조정에 징소되어 나온 수 백 명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특히 죽은 경목태자 탁발황의 깊은 아낌을 받았던 사람이었다.<국기>, 즉 국가역사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연루된 고윤을 태자 탁발황이 아버지 탁발도에게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그에게 거짓말을 하여 빠져 나오도록 종용했으나 고윤은 거부하고 직설했고 이것이 오히려 약이 되어 탁발도에게 칭찬을 받음과 동시에 면책된 일이 있었다.

 

사실 고윤은 탁발준이 황위에 오르는 모의에도 참여하여 결정적인 공로가 있었다. 그러나 원하나 육려와 같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여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그 결과 논공행상에서 또한 밀려나 있었지만 고윤은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고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기를 몹시 거리는 성격이었다.  

 

탁발준이 황제가 되고나서 6년이 되었을 때인 AD458년 간신 곽선명이 황제를 꾀어 황궁인 태화전을 지으려고 했다. 중서시랑 고윤이 나서서 반대했다.

 

“ 태조(탁발규)께서는 반드시 농한기에만 궁을 지으셨습니다.

  지금은 나라가 세워진 지 오래되어 조회에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고

  설사 넓힌다 하더라도 급할 것이 없습니다.

  대략 2만 명 정도가 필요할 텐데

  부수인력까지 합하면 4만 명 정도가 있어야 합니다.

  한 명의 농부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수 백 명이 굶어야 할 형편이데

  수 만명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탁발준이 결국 궁궐 신축을 포기했다.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 고윤은 간절하게 간하기를 좋아하여 

  편치 않은 일이 있으면 번번이 알현을 요청하였고

  황제는 즉시 주위를 물리치고 그를 맞이하였다.

  혹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르렀고

  혹은 날을 넘기기도 하였으나 

  다른 이들은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알지 못하였다.

  혹 통렬하고 아프도록 간절하여 황제가 차마 들을 수가 없어서

  좌우에 명하여 그를 끌어내라고 하기도 하였으나

  결국에는 사과하고 그의 뜻을 높이 받들었다.」

 

탁발준은 이렇게 조서를 내리기도 하였다.

 

“ 군주와 아버지는 같은 것이다.

  아버지가 잘못했는데 자식이 어찌 은밀히 편지를 써서 지적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있는데서 들추어내듯 고발한단 말인가. 

  사사로이 감추어진 곳에서 간언한다는 것은

  어찌 아버지의 악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싶음이 아니겠는가.

  군주의 잘못을 면전에서 지적하지 않고 표문을 올려 지적하는 것은 

  어찌 군주의 잘못을 드러냄으로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어찌 충신이 할 짓이겠는가.

  고윤은 짐의 허물을 대면하여 은밀하게 말하지 않은 때가 없었으며

  짐이 듣기 거북한 말을 피한 적 또한 없었다.   

  천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어찌 가히 충신이라 말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고윤은 자신의 책무만 묵묵히 최선을 다해 감당할 뿐 승진이나 영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는 27년 동안 친구들이 수도 ㅇ벗이 자사나 이천석의 고관자리에 올랐지만 자신은 낭관이라는 같은 말석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탁발준이 마침내 고윤을 알아보고는 주위의 대신들을 꾸짖으며 말했다.

 

“ 너희들은 비록 칼과 활을 들고 바로 내 곁에 있으면서도

  바로잡는 말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이

  오로지 짐이 기뻐하는 기회를 틈타 관직을 빌고 구걸하여

  별다른 공로도 없이 왕공이 되지 않았느냐.

  그러나 고윤은 붓 하나로 

  나라와 짐의 가족을 보필하여 국가의 이익이 됨이 적지 않았으나

  단지 나의 낭관에 불과하니      

  너희들은 심히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탁발준은 고윤에게 중서령을 내렸다. 그제야 사도 육려가 나서서 고윤을 옹호했다.

 

“ 사실 고윤은 집이 찢어지게 가난하고 청렴하여

  아내와 아들을 세워두기조차 힘든 지경입니다.“

 

탁발준이 육려를 꾸짖으며 말했다.

 

“ 공은 어찌 여태껏 아무 말도 없다가 

  지금 짐이 그를 높이는 것을 보고서야

  마침내 그가 가난하다는 것을 말하는가?“

  

당시 고윤은 초가 몇 칸과 무명이불과 솜 옷 몇 벌이 재산의 전부였고 부엌에는 소금과 채소 몇 단 밖에 없었다. 탁발준이 탄식하며 비단 600 필과 곡식 천 곡(1곡=10말)을 내렸고 장자를 장락태수에 임명하였다. 고윤이 극구 사양했으나 황제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고윤을 ‘영공(令公)‘으로 높여 불렀다. 고윤과 함께 징소되었던 유아가 이렇게 고윤을 평가했다.

 

“ 고윤은 안으로는 글에 밝고 

  밖으로는 공손 온화하지만

  그 말은 눌변이라서 웅얼웅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옛날 탁무와 유관의 사람됨을 칭찬했는데 사람들이 믿지를 않았다.

  나는 고윤과 40년을 같이 지냈는데

  일찍이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그제야 옛 사람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을 알았다.

  전에 사도 최호가 말하기를 

  고윤은 재능이 풍부하고 학문이 넓어 한 시대의 훌륭한 선비이지만 

  모자라는 바가 ‘고고한 절개와 위엄’이라고 평했었는데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최호가 작은 실수로 결국 죄를 지어 죽게 된 것(국기사건)에서

  황제가 조서를 내려 꾸짖자 모두가 땅에 엎드려 땀을 흘리는 것이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오직 고윤만은 홀로 당당하게 일의 이치를 상세하게 밝히고 

  옳고 그름을 풀어서 아뢰었는데

  말의 뜻을 바르게 하였고 소리가 맑고 높았었다. 

  인주께서는 이 때문에 얼굴빛이 달라지시고

  사람들의 정신이 솟구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이것이 고고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종애가 권력을 휘두를 때 왕공이하 모든 백관이 

  뜰로 나아가 무릎 꿇고 위를 바라보며 절을 하였지만 

  오직 고윤은 계단에 머물면서 고개만 숙여 읍만 할 뿐이었으니

  어찌 급장유가 드러누워 위청을 올려다 본 것만을 항례(抗禮)라 할 것인가.

  고윤의 행동 또한 어찌 절개가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쉽게 알지 못하니

  나와 또한 최호가 그 부분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관중이 포숙아에게 가서 큰 소리로 울었던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윤은 북위 건국부터 건강하게 다섯 황제를 섬기다가 AD487년 98세로 죽었다. 위나라 신하 가운데 고윤만큼 후한 대우를 받은 신하가 없었을 정도로 훌륭하고 덕이 많았다.

 

 

<54> 탁발준의 사망(AD465)과 위업

 

탁발준이 황제로 오른 AD452년부터 약 10여 년 동안 북위와 남쪽 유송과의 관계는 평화로왔다. 그것은 북위로서도 종애의 탁발도 시해와 탁발여 집권과 탁발준으로 이어지는 내부 문제도 있었고 또 탁발준 스스로가 정벌 보다는 내치에 더 힘을 기울였다. 사실 탁발도는 재위 30년 동안 21회나 전쟁을 일으켰으니 국력이 피폐한 것은 말할 것이 없었다. 남쪽 유송에서도 AD53년 유의륭이 시해되고 유의소와 유의준으로 옮겨가는 과정의 내부적인 혼란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전쟁을 일으킬 형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북위는 남쪽과 친목을 유지하면서 북쪽의 유연과 서쪽의 토욕혼지역을 순회하면서 국가영토의 안정을 살피는데 주력하였고 유송은 황족과 무벌의 갈등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잇었다.   

   

탁발도는 AD386년 나라를 건국한 할아버지 탁발규와 아버지 탁발사를 이어 AD439년 북량을 정복함으로써 북중국, 즉 북조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열여섯 살인 AD424년 황제가 되어 AD452년 까지 38년 동안 재위하면서 북 중국의 강국인 하나라(AD434)와 북연(AD436)과 북량(AD439)을 차례로 병합함으로써 오호십육국 시대를 종결한 사람이 탁발도다. 그러나 비록 국가영토는 크게 확장되었지만 국가재정은 말이 아니었다. 재위 30년(AD423-AD452) 동안 21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국고가 당연히 고갈되었다. 게다가 전임 탁발여의 선심 정책으로 그나마 있던 재정이 완전 고갈되었다. 이 국가재정을 13년 만에 바로 세운 사람이 북위 고종 문성제 탁발준이다. 탁발준의 정책은 민생중심의 안정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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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준은 정치를 시작하자마자 아버지 때인 AD446년 도입한 불교배척 정책을 모두 철폐했다. 당시 조정과 유사들은 오로지 유교만 중시할 뿐 불교를 매우 배척했다. 특히 탁발도는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억불정책을 시행해왔었다. 그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해탈과 깨달음을 좇는 불교의 내면중심의 도리가 적극적인 국가관과 부자, 군신, 혹은 부부간의 윤리를 강조하는 유교정신과 상통하지 않은 면도 있었지만 잦은 대부분의 유력한 장정과 가문들이 전란을 피해 절을 세우고 피해 숨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원인이 어떠했든 백성과 관료사회에서 몰래 불교교리를 배우는 사람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억불정책에 대한 완화요구도 거세어짐에 따라 불교에 대한 정책은 조금씩 완화되었다. 특히 탁발도의 정복전쟁이 마무리 되면서 불교 억제 정책은 빠른 속도로 정상화되었다. 탁발준은 즉위하는 그 해(AD452) 조서를 내려 모든 행정구역 마다 불교사찰 혹은 불탑을 하나 세울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주 별로 작은 주는 40명, 큰 주는 50명 씩 사문으로 출가를 허용했다. 지난 날 훼손 된 모든 사찰은 복구하도록 했으며 위 주군이 몸소 사현 등 5명의 머리를 깎아주었다. 국가통합을 위해서는 민생에 부합하는 정치가 시급함을 탁발준은 잘 알고 있었다. 

 

탁발준은 국가기강의 확립을 위해 금주령을 시행했다. AD458년 탁발도는 술을 빚거나 사고팔거나 사서 마시는 사람의 목을 베도록 하였다. 다만 길흉의 모임에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 예외로 술을 허용하였다. 탁발준이 이런 가혹한 형벌을 내린 이유는 사람들의 다툼과 국정비판이 모두 술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꼭 필요한 경우의 예외를 인정하면서 과도한 음주문화를 척결하여 건강한 사회가 되도록 조치를 내린 것이다. 

  

탁발준은 또한 공직기강 및 관료의 대민 착취를 근절하기 위해 안팎으로 후관(候官), 즉 염탐꾼을 늘려 파견하여 여러 행정관청과 주군현을 사찰하였다. 때로는 본인이 직접 미복을 하고서 부시(府市,관청과 시장)의 여러 곳을 잠행하면서 관리들의 횡포를 찾아내었다. 당시 뇌물로 포 2장(丈: 10척)을 넘기면 목을 베었다. 또 새로운 범법행위를 규정하는 법을 79장 새로 만들어 법을 규제하였다.

 

무리한 건축을 자제하고 세금을 낮추었으며 될 수 있으면 전쟁이나 공역에 백성들을 동원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민생조치들은 크게 외형적으로 넓어진 통일국가를 내면적으로공고하게 다지는데 필수적인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탁발준은 AD465년 2월 14일 26세 나이로 죽었다. 열두 살 탁발홍이 황제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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