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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K)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9월04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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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45> 태자 탁발황의 사망(AD451)

 

탁발도의 장남 탁발황은 AD428년 생이었으므로 이 때 나이가 스물 셋이었다. 평소에 탁발도는 자주 그에게 정치를 맡겨 실습하게 했는데 탁발황은 측근들의 말에 너무 의존하여 정치를 하였고 또 사욕을 챙기기가 심하였다. 고윤이 그런 태자에게 간언하였다.

 

  “ 천지는 사사로움이 없으므로 모든 것을 담아 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자 또한 사사로운 것이 없으니 모든 것을 용납하시고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사사로이 땅을 경작하시고 닭을 길러 이익을 다투시니

    곧 비방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 덮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주나라 무왕은 주공(희단), 소공(희상), 제공(강상), 필공(희고)을 총애하였기 때문에 

    훌륭한 제왕이 되었습니다.

    은의 주왕은 비렴, 악래와 같은 간신을 가까이 한 결과로 나라를 망가뜨렸습니다.

    전하께서는 아첨하는 무리를 멀리하시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하를 곁에 두셔서 땅의 소출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시면 훌륭한 명성이 매일 높아져 

    비방의 말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태자 탁발황은 듣지 않았다. 이 때 황제의 내시 종애는 탁발도의 총애를 받아 험악하고 난폭하기 그지없었으므로 태자 또한 그를 싫어하였다. 그런 상황을 잘 아는 태자의 시종 구니도성과 시랑 임평성이 종애와 심하게 불화하였다. 종애는 그 두 사람을 탁발도에게 참소했고 탁발도는 구니도성과 동궁의 관속 몇 명을 처형시켰다. 종애로서도 태자 탁발황이 장차 황제가 되면 자신의 목숨이 보장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궁극적으로 태자를 제거할 생각을 품었다. 그걸 탁발황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태자에게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걱정을 거듭하던 탁발황은 걱정이 병이되어 죽었다. 어쩌면 종애에게 독살되었는지도 모른다. 탁발도는 아들 탁발황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알고 매우 후회하였다. 탁발황의 아들인 네 살 짜리 손자 탁발준을 가엽게 생각하며 가까이 하였다.    

 

 

<46> 탁발도 시해(AD452) 탁발여 옹립(AD452) 

 

종애는 매우 초조했다. 자신 때문에 태자 탁발황이 죽은데다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황제는 장차 황제가 아끼는 손자 탁발준을 황제로 지명할 것이 분명하니 자신들은 이제 죽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종애는 AD452년 2월 12일 부하를 시켜 황제 탁발도를 시해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 였다. 조정에서는 그 사실을 비밀에 부친 뒤 장성한 황제의 아들 탁발한(15세)을 세우려고 했으나 적통이 탁발준(4세)에게 있었으므로 격론에도 불구하고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종애는 탁발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은밀히 남안왕 탁발여를 모셔와 탁발황의 부인 혁련 황태후의 뜻이라고 속여 황제로 옹립하려고 꾀했다. 조정대신들이 미천하고 어리석은 종애를 가볍게 생각하고 전혀 경계하지 않고 궁궐에 소환되어 들어갔을 때 종애가 풀어 놓은 무장한 환관 30여 명이 난연 등 조정대신들을 모두 격살하고 탁발한을 가두었다가 처형한 뒤 탁발여를 황제로 옹립했다. 종여는 그 공로로 대사마 대장군 태사 및 도독중외제군사의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AD452.2월)      

 

 

<47> 탁발도의 북위건국의 완성과 통합 융화정책 

 

탁발도는 AD386년 나라를 건국한 할아버지 탁발규와 아버지 탁발사를 이어 AD439년 북중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열여섯 살인 AD424년 황제가 되어 AD452년 까지 38년 동안 재위하면서 북 중국의 강국인 하나라(AD434)와 북연(AD436)과 북량(AD439)을 차례로 병합함으로써 오호십육국 시대를 종결한 사람이 탁발도다. 탁발도는 건장하고 용감하였다. 적의 성을 공격할 때에는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몸소 가까이 다가가 공격에 독려하였고 좌우에 사망자가 쌓여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기색이 태연하였으므로 주변의 장수와 병사들이 겁내지 않고 공격에 진력했다. 성격은 매우 검소하고 솔직했으며 의복과 음식과 수레는 그냥 제공되는 것을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았다. 적군의 노획물은 모두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신하들이 권위를 높이기 위해 성벽이나 궁궐을 신축하거나 수리하자고 하면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 옛 사람이 말하기를

  성(城)은 덕망에 있지 높음에 있지 않다고 했다.

  혁련발발이 흙을 찧어 성벽을 높이 쌓았지만 내가 무너뜨리지 않았는가.

  지금 세상이 아직 통일되지 않아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어찌 담벼락 쌓는 일에 몰두한단 말인가? “

  

그러면서도 재물은 국가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여 가볍게 소비하지 못하도록 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매우 밝았으며 졸병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을 발견하면 반드시 중용하였고 그 사람의 재간을 보되 잘못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듣고 살피는 것이 매우 정밀하고 예민하므로 사람들이 속일 생각을 못하였다. 상은 반드시 죽음으로써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만 후하게 내렸으며 친척이나 아끼는 측근이라고 법을 어겨가며 후한 상을 절대로 내리지 않았다.  탁발도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 법이라는 것은 짐이 천하와 같이 나누는 것이니

  어찌 내가 감히 가볍게 여길 수가 있겠는가? (法者,朕与天下共之,何敢轻也)“

 

그의 대업의 기초에는 선대 이래로 중용된 이들에 그치지 않고 널리 등용된 인재의 힘이 컸다. 북중국의 통일대업에는 이 때 등용한 인재들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탁발도의 단점은 지나치게 잔인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가볍게 여겼는데 그러고 나서는 심히 후회하기를 잘 하였다.

 

북위는 유목민족인 선비족의 전통을 버리고 중국 전통에 의한 국가 체제를 채용하기로 정하고, 화북지방을 평정하면서 데려온 여러 유목 부족을 나누어 부민(部民)으로 구성한 뒤 각 군현(郡縣)의 호적에 편입하였다. 말하자면 한족과의 평등융화정책인 셈이다. 그 이전만 해도 막강한 군사력을 가졌던 유목이민족들은 경작지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한민족을 몹시 깔보면 하층민 취급을 하는 경향이 강했다. 북위는 그런 차별 정책을 없애고 한선비(漢鮮卑)동화 정책을 실시하여 통합을 추구해 나갔다.

이후 효문제(孝文帝) 탁발굉 때에는 국도를 뤄양[洛陽]으로 옮겼고(AD494), 호복(胡服)·호어(胡語)를 금하고 호성(胡姓)을 한인(漢人)처럼 단성(單姓)으로 고치게 하였으며, 황족인 탁발씨도 원씨(元氏)로 개성(改姓)하였다. 효문제는 봉록제(俸祿制)·삼장제(三長制)·균전법(均田法) 등을 창시하여 북위의 국력과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48> 탁발준 옹립 쿠테타(AD452)

 

종여의 쿠테타로 집권한 탁발여는 자신의 정통성이 약했으므로 관료와 군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든 국고를 털어 포상하는 바람에 국가재정이 크게 고갈되었다. 게다가 종여 또한 정치와 군권을 모두 쥐어 잡은 권력실세가 된 뒤 폭정을 서슴지 않고 착취를 더해가자 민심은 크게 이반되었다. 나이가 어렸지만 황제 탁발여는 그런 종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제거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종애는 분개하며 소황문 가주를 보내 제사를 드리고 있던 탁발여를 시해했다.(AD452.10.1) 우림군(황실 근위병) 낭중 유니가 탁발준을 세우자고 하자 종여가 깜짝 놀라며 대꾸했다.

 

“ 이 어리석은 사람아.

  황손이 어찌 정평(AD451년)의 일을 잊었겠는가?“ 

 

유니가 그렇다면 누구를 세워야 하는가를 묻자 종여가 대답했다.

 

“ 황자들이 환궁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적당한 사람을 세웁시다.”

 

유니는 종애가 또 엉뚱한 계략을 쓸 것이 두려워 몰래 전중상서 원하에게 그런 상황을 전하였다. 원하는 육려와 함께 의논한 뒤 탁발준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장손갈후를 보내 궁궐을 완전히 포위한 뒤 명령을 내려 모든 군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황손 탁발준을 궁궐로 모셔와 황제로 옹립했다. 종애와 가주의 가택에 군사를 보내 체포한 뒤 끌고 와서 오형을 내린 뒤 삼족을 멸했다.(AD452.10.3) 탁발여 황제 때 사도였던 고필과 태위였던 장려는 일단 귀양을 보낸 뒤 사약을 내렸으며 쿠테타의 공을 가지고 권력 다툼을 그치지 않았던 탁발수락과 장손갈후는 한 달 만에 모두 처형했다. 가장 가까운 신하인데다 황제 옹립에 큰 공을 세운 사도 육려에게 평원왕을 내렸으나 두 번 세 번 사양했다. 황제도 물러서지 않자 육려가 그러면 그의 아버지 육사에게 왕의 봉록을 내리도록 부탁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 어찌 천하가

  경의 부자로 두 명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겠는가.“

 

육사에게는 동평공, 육려에게는 평원왕을 내렸다. 유니와 원하에게도 왕을 내렸다.

 

<49> 유송의 북벌 실패(제5차 위송전쟁, AD452) 

 

 

북위의 탁발도가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유의륭은 지난 번 AD450년 제4차 위송전쟁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또다시 북벌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적극 권고한 사람은 사주자사 노상이었다. 황제 유의륭이 그 문제를 신하들과 의논하자 태자(유소)의 신하 하언이 반대하고 나섰다.

 

  ” 지난번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가 않았습니다.

    경솔히 움직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심경지도 반대했지만 황제는 듣지 않고 5월 19일 명령을 내렸다.

 

  ” 표기장군 유의공과 사공 유의선의 두 부대로 나누어 

    서로 동쪽과 서쪽에서 호응하도록 한다.“ 

 

청주자사 유흥조가 그 작전계획에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 지금 진군하려고 하는 동서군의 진로인 황하 이남에는 

    어렵고 굶주려 들판에 먹을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여러 성들은 굳게 닫고 방어에 힘쓰고 있어서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군대를 돌려서 더 서쪽으로 가신 다음에

    정주에서 치고 올라가는 것이 더 좋은 전략입니다.

    그리고 별도로 7천 기병을 이끌고 

    바로 그들의 심장부 평성을 습격하십시오.

    이기면 좋고 져도 크게 잃을 것이 없습니다.“

 

황제는 황하 이남의 뺏긴 땅을 회복하는 것이 근본목적이었으므로

그 지역을 두고 공격하는 방안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동군의 무군장군 소사화 지휘 아래 확오를 세 갈래로 나누어 공격했으나 수십일이 지나도 뺏지 못했다. 8월 5일 북위군들이 몰래 땅굴을 파고 빠져나와 유송의 부대에 불을 지르고 무기를 불태웠다. 유송군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소사화가 직접 나섰지만 전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소사화는 전군을 역성(산동성 제남)으로 물린 뒤 패전의 책임을 물어 장수 최훈의 목을 베고 장영과 신탄을 옥에 가두었다. 서쪽 방면에서는 노상이 장갈(하남 장갈현)에 당도하자 북위 수비군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유송의 노상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동관에서 북위군과 대치하였다. 유송의 노상이 북진할 생각을 가졌으나 동부전선에서 확오 함락에 실패하여 뒤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더 이상 공격을 중지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유송 황제는 동군 총책임자 소사화를 문책하여 서주자사에서 해직시키고 명예직으로 기주자사에 임명했다가 서군의 책임자 유의공의 권고를 따라 결국 그마저 해직켰다. 황제는 동군의 무능함에 매우 격분하였지만 분을 삭이고 있었다.  

      

<50> 탁발준의 논공행상 AD453)

 

탁발준은 즉위하고 나서 바로 불교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였다. 각 지역마다 불탑이나 사원을 짓게 하고 불교에 입문하는 것을 허용 인원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허락하였으며 황제 스스로가 사문(스님)을 불러 머리를 삭발하게 하였다.

 

탁발준은 낙릉왕 탁발주뉴에게 태위라는 직을 내리고 상서 육려를 사도, 두언보를 사공으로 삼았다. 육려는 탁발준을 옹립하는 주역이었으므로 그 누구보다도 권세가 높았다. 유니에게는 상서복야, 원하는 정북장군을 주었다. 그러나 탁발주뉴는 모반을 꾀하다가 죽었다.     

 

 

<51> 원하를 믿은 탁발준(AD454)

 

탁발준을 옹립하는 공을 세워 서평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원하가 그에 더하여 기주자사 및 농서왕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그가 탁발준에게 이렇게 말했다.

 

  ” 큰 죄를 짓은 경우가 아니라면 다 사면하여 

    북쪽 변경을 방어하는 군력에 보태도록 하심이 좋겠습니다.

    이는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새로 거듭나는 기회를 주는 것이고“

    요역을 담당하던 사람들에게는 쉴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탁발준은 그의 제안에 따라 모반죄나 흉악한 죄를 짓지 않은 죄수를 다 사면하여 북쪽 변경으로 보냈다. 평소에 원하에 대하여 반감을 품고 있었던 석화라는 사람이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고 원하를 무고하였다. 탁발준이 이렇게 말했다.

 

  ”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실제 수사한 결과 석화의 모함인 것으로 드러났다. 석화를 주살한 탁발준이 이렇게 말했다.

 

  ” 원하의 충성스러움으로도 이런 모함을 면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원하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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