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네오콘의 역사-기원, 이상, 그리고 실패 <4> 1975년, 잭슨과 레이건 ​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0001년11월30일 00시00분

작성자

  • 이상돈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대 국회의원,

메타정보

  • 4

본문

<4> 1975년, 잭슨과 레이건 

 

헨리 잭슨 의원은 1975년에도 포드 대통령 및 키신저 장관과 여러 차례 크게 충동했다.

 

1975년 4월, 파리협정을 위반하고 북베트남군이 남쪽을 침공해서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잭슨 의원은 엘모 줌월트 제독으로부터 얻은 자료를 근거로 닉슨 대통령이 북베트남 침공시 미군이 반격할 것임을 약속했다고 폭로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사실상 월남을 넘겨버렸다는 것이다.

 

1975년 6월 말, 노벨상 수상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소련에서 추방된 후 워싱턴을 잠시 방문했다. 7월 2일 전미노조 AFL-CIO 위원장인 조지 미니는 솔제니친을 위한 연회를 백악관에서 멀지 않은 호텔에서 주최했다. 헨리 잭슨과 제씨 헬름스 의원, 그리고 제임스 슐레징거 국방장관은 참석했으나 대통령과 부통령, 그리고 키신저 장관은 참석하지 않았다. 

 

키신저 장관이 미국이 솔제니친의 견해를 따르면 소련과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고 불참 이유를 설명하자 잭슨은 솔제니친의 견해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임기를 마친 로널드 레이건도 솔제니친을 만나기를 거부한 포드 대통령을 비판했다. 

 

그 해 7월 30일에서 8월1일까지 헬싱키에선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열렸는데, 포드 대통령도 참석해서 서명했다. 이 협정은 동유럽에 대한 국경현상을 인정하는 것이라서 소련의 동유럽 지배를 정당화해주는 격이었다. 공화당 보수파는 물론이고 솔제니친, 그리고 솔제니친을 지지하는 인권논자들도 비판에 나섰다. 

 

잭슨 의원은 헬싱키 협정이 닉슨-키신저 방식의 일방적 후퇴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비난했다. 로널드 레이건도 그것이 일방통행식의 항복문서라고 비판했다. 

 

카터 대통령 시절에도 잭슨 의원은 카터의 유화주의와 군비축소를 비판했다. 잭슨은 ‘어느 누구도 카터보다는 낫다’(Any body but Carter)고 했다. 1980년 대선에 카터가 또 출마하고 레이건이 당선되자 잭슨의 철학을 따르던 민주당원들이 대거 민주당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레이건은 조지타운대 교수이던 민주당원 진 커크패트릭 Jean Kirkpatrick 1926-2006을 유엔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긴 그녀는 민주당원이 레이건에 투표하는데 아무 잘못이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잭슨 의원은 민주당적을 지켰지만 그의 보좌관을 지낸 리차드 펄 등은 공화당원이 되었고, 레이건 행정부에서 요직을 맡게 된다. 네오콘 시대의 시작인 것이다.

 

< 신보수의 문화전쟁>

 

정리해서 말한다면, 레오 스트라우스와 앨런 블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네오콘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다만 이들의 성향을 이어받은 일단의 문화 비평가들이 주도한 담론(polemic)이 1960년대 이후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성장해 온 신좌파(New Left)를 상대로 한 문화전쟁 양상을 띠었기 때문에 200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조지 W. 부시가 승리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는 볼 수 있다. 여하튼 1980년대 들어서 앨런 블룸 성향의  인물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역사의 종언>으로 잘 알려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코넬 대학에 다닐 때 앨런 블룸에게서 정치철학을 배웠다. 그는 예일대에서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하고 조지 메이슨 대학 교수를 지내던 1992년에  <역사의 종언>을 펴내서  유명해 졌다.

 

이 보다 앞선 1982년에 뉴욕타임스 문화비평을 하던 힐턴 크래머(Hilton Kramer,1928-2012)가 뉴욕타임스를 사직하고 뉴 크리테리언(The New Criterion)이란 월간 인문비평지를 창간했다. 크래머는 미국의 문화비평이 미적 니힐리즘과 상대주의에 빠져있고 뉴욕타임스가 그런 경향을 조장한다면서 새로운 비평지 출간을 알렸다. 그는 오랫동안 이 잡지를 편집 발행해 오다가 로저 킴볼에게 넘겨주고 은퇴했다. 그가 2012년에 사망하자 뉴욕타임스는 문화전쟁에서 전통주의를 주창해온 문화비평가가 사망했다는 추모기사를 냈다.

 

1990년에는 로저 킴볼 (Roger Kimball, 1953-현재)이 <정년보장 급진파>(Tenured Radicals)를 출간했는데, 베스트셀러가 됐다. 예일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오래 공부한 그는 앨런 블룸으로부터 더 나아가서 1960년대 이후 신좌파들이 대거 대학에 교수로 진출해서 전통적인 서구문명을 부정하고 자유주의를 훼손해서 대학생들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주장해서 파문을 일으켰다. 

 

킴볼은 힐턴 크래머가 운영하던 뉴 크리테리언을 인수해서 발간해 오고 있다. 이 월간지는 오래된 진보성향의 네이션(The Nation)에 비하면 부수는 떨어지지만 고급 문화담론지로 자리 잡았다. 킴볼은 또한 피터 콜리어가 설립해서 운영해오던 엔카운터북 출판사를 인수해서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도 1960년대 신좌파 운동을 하다가 1970년대 후반기 들어서 베트남 캄보디아 소련 등 공산권에서의 인권 유린과 신좌파의 폭력성에 회의를 느끼고 우파로 전향해서 문화전쟁에 참여한 인물로는 피터 콜리어(Peter Collier, 1939-2019)와 데이비드 호로비츠 (David Horowitz, 1939-현재)가 있다. 이들은 1960년대 신좌파 학생운동의 진원지이던 버클리와 컬럼비아를 나왔는데, 활발한 저술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은 문화 사회 비평에서 활동했기에 이들을 네오콘으로 지칭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대외정책에서의 네오콘은 이어서 쓰고자 한다.    <계속>

 

4
  • 기사입력 -0001년11월30일 00시00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