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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the New Deal) 정책 대해부 : <제1부> 정책과 정치의 갈림길 ③증시 폭락과 대공황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7월06일 09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7월01일 11시02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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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문재인 정부 향후 정책기조가 뉴딜(New Deal)을 표방함에 따라 세간의 이목이 다시 뉴딜을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뉴딜이 태동된 배경과 그 구체적인 정책의 내용과 성과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내려 볼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뉴딜의 좋은 점은 다시 배우고 나쁜 점은 반복하지 않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5> 월-스트리트 증시 대폭락(the Wall Street Crash of 1929)과 대공황

 

1929년 상반기까지 실물경제 상황은 농업부문을 제외하면 괜찮았다. 536개 주요 제조업체 및 대형유통업체의 영업이익은 1928년에 비해 36.6%나 증가했는데 이는 상반기 실적으로는 역사상 최대실적이었고 그것을 주도한 업종은 철강업이었다. 

 

당연히 1929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증시는 다시 폭등했다. 증권회사들은 앞 다투어 투자금액의 2/3까지 융자를 했고 투자가들은 폭발적으로 대출을 늘렸다. 당시 증권대출 잔액 $85억은 당시 현금통화를 넘어서는 금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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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9월 3일 다우지수는 381.17까지 올라서 역사상 최고점을 기록했다. 예일대학 교수 어빙 피셔(Irving Fisher)는 ‘영원한 고원(permanent plateau)’에 도달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대폭락을 경고한 전문가들도 많았다. 증권전문가 로저 뱁슨(Roger Babson)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조만간 증시의 대폭락이 올 것을 여러 차례 경고했다. 그러던 차에 1929년 9월 20일 영국 런던에서 증권투자 사기사건이 발생했다. 9월 말 그 여파로 잠깐 충격을 받던 다우지수는 곧 회복되었지만 10월 24일의 검은 목요일에 11% 하락, 10월 28일 검은 월요일에 12.8%, 그리고 10월 29일에 11.7% 하락하면서  11월 13일에는 고점대비 48% 하락 한 198.6을 기록하는 대폭락이 발생한 것이다. 

 

<다우지수 폭락>

 Date                Change    % Change    Close

 October 28, 1929 −38.33     −12.82          260.64

 October 29, 1929 −30.57     −11.73          230.07

 

다음해에 4월 중순에 294.07 까지 회복된 다우지수는 계속해서 등락을 거듭하면서 추락하여 1932년 7월 8일 20세기 들어 가장 낮은 41.22 까지 폭락하였다. 3년 사이에 주가가 89.2%나 떨어진 것이다. 1929년 9월 3일 기록한 당시 역대 최고 지수 381.17는 꼭 25년이 지난 1954년 11월 23일에 회복하였다. 월스트리트 주가가 폭락한 이유에 대해서는

 

 · 1920년대 호황에 따른 과도한 증시 투기

 · 농업부문의 침체와 과잉공급이 농가소득을 떨어뜨리면서 

   주택수요, 내구소비재 등 수요의 감소를 초래했고

 · 농가에 과다 대출한 지방 금융기관의 건전성에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주식대폭락과 대공황의 인과관계) 

 

주식대폭락과 대공황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는 견해는 소수 의견이다. 1929년 전후하여 실물경제는 대체로 견고했기 때문에 주식대폭락은 대공황의 문턱에서 공교롭게 우연히 발생한 현상으로 보는 것이 다수의견이다. 당시 재무장관 멜론(Andrew Mellon)은 그런 견해를 대표했다. 따라서 그의 조치는

 

   · 그냥 내버려 두는 일과 

   · 실업자와 휴지가 된 주식을 그냥 내버려두면

     썩은 기업과 낙후된 노동력은 자연히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믿었다.

 

연준(The Federal Reserve)의 대책도 공개시장을 통해 유동성을 공급하고 기준금리를 낮추기는 하지만 과도한 대출을 지속하는 은행에게는 재할인 자금줄을 닫았다. 후에 밀튼 프리드만과 안나 슈왈츠가 연준의 소극적인 통화정책을 비판하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프리드만은 당시에 연준의 무제한적인 자금공급이 있었다면 대공황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 당시 자금공급이 프리드만 지적대로 무제한적으로 제공되었다 하더라도 1930년 이후의 후버와 FDR의 잘못된 정책과 세계적인 금융위기에 따른 대공황 악화를 감안하면 설혹 대공황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타당하다.   


(후버의 재계 연합포럼 개최 : 1929년 11월)

 

증시대폭락을 겪은 후버대통령은 11월 15일 경제현안을 풀기위하여 재계와 다양한 대화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말이 협의지만 속셈은 재계의 지지를 얻고 동시에 재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경제회복의 낙관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리더십을 발휘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11월 19일 최초로 12개 철도회사 대표들과의 회의를 워싱턴에서 개최했다. 회의가 끝나고 후버는 증시대폭락에 상관없이 철도회사들의 대표들이 대규모 신규투자와 보수투자를 하겠다는 확약을 받아냈다고 자랑했다. 11월 21일에는 재계와 노조지도자들과 만나서 경제안정을 위해서 양자가 평화를 위한 협력을 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재계는 임금삭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노동계는 임금인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1월 21일 후버는 전국 주지사들에게 전보를 띄워 도로, 교량, 공공건물, 등등의 건축공사를 신속하게 진행해줌으로써 고용을 증진시키도록 협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낙관론을 펴는 후버 정부)

 

1929년 12월 3일에 후버대통령이 의회에 보낸 교서(State of the Union message)를 보면 

 

  · 올해의 경제문제는 성장과 진보에 따르는 불가피한 문제이며, 

  · 재계는 물론 지방정부와 재계와 제도적이며 자율적인 협력방안을 마련했고,

  · 임금과 구매력과 고용은 축소되지 않을 것이므로, 

  · 자신감을 다시 회복했다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1929년 연말인 12월 31일 상무장관 라몬트(Rbert P. Lamont)도 1930년은 번영과 진보를 계속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내었고 재무장관 멜론(Andrew W. Mellon)도 겨울 동안에는 경제활동이나 고용에 있어서 다소간의 부진함이 있겠지만 통상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봄이 되면 활동이 살아날 것이고 내년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갈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는 낙관론을 펼쳤다.   


<6> 후버의 대공황 종료선언 (1930년 5월 1일)과 11월 중간선거 참패 

     

1930년 5월 1일 후버 대통령은 재계대표자 모임에서 최악의 경제상황은 벗어났으며 단합된노력을 통하여 신속하게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버는 다음과 같은 실적을 바탕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 증시가격 : 4월에 손실의 1/5 회복 

    · 지방은행 회생기미

    · 연준가맹 회원은행 예금 지속증가

    · 실업율 더 악화되지 않음

   

그러나 후버의 판단은 아주 성급하고 잘못된 것이었다. 실제 1930년의 경제적 실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 1930년 1년 동안 26355개 기업이 파산했고

    · 실질 GNP 증가율은 –11.9% 였으며

    · 민간소비는 –5.4%, 투자는 –31.9%

    · 철강, 자동차 생산량은 –38%였고

    · 실업자도 4.3백만 명(실업률 8.9%)로 1921년의 4.6백만(11.9%)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러나 후버 대통령과 각료들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과감한 부양정책도 쓰지 않았다. 1930년 11월 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은 참패하였다. 특히 하원선거가 심각했다. 상원에서는 공화당 56석이 50석으로 6석 감소했지만 민주당은  39석에서 45석으로 과반으 ㄹ차지했다. 하원에서는 공화당이 270석에서 217석으로 53석이 날아간 반면 민주당은 164석에서 217석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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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버정부의 1929년 감세정책)

 

후버정부는 1929년 12월 16일 감세조치를 단행했다. 물론 조세권한은 입법부에 있었지만 1928년 세법개정 제605조에 따라 상하원 공동의결에 의해 재무부의 감세안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소득세를 인하했다. 1929년 귀속 소득세에 있어서 일부 중산 이하 소득계층의 소득세율을 1.0% 포인트 인하했고 법인세율도 같이 1.0% 포인트 낮추었다. 연 소득 $4000미만의 저소득계층의 경우에는 소득세율이 1.5%에서 0.5%로 1/3로 낮아지는 것이라서 감세의폭이 매우 컸다. 그러나 법인소득세의 경우에는 11%에서 1% 포인트 낮아지는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감세 폭이 작았다. 그리고 여전히 소득세를 내지 않는 계층이 절대 다수였으므로 당연히 감세의 효과는 그리 크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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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딜(the New Deal) 정책 대해부

제1부 정책과 정치의 갈림길  -  세부목차

 

<1> 공화당 진보파의 분당과 테디 루즈벨트의 ‘Bull Moose Movement’(1912)

<2> 윌슨 대통령과 WWI(1914-1918)와 베르사이유 조약(1919)

 

<3> 미국의 1920년대 : 포효하는 20년대 (Roaring Twenties) 

<4> 농업위기와 후버의 대책 농업유통법Agricultural Marketing Act, 1929년 6월)

 

<5> 월-스트리트 증시 대폭락(the Wall Street Crash of 1929)과 대공황

<6> 후버의 대공황 종료선언 (1930년 5월 1일)과 11월 중간선거 참패 

 

<7> 1930년 은행위기

<8> 스무트-홀리 관세법(1930년 6월 17일 서명 발효)

<9> 1931년 미국과 유럽의 은행위기 

 

<10> 후버의 대공황 타개정책

<11> 후버의 1932년 증세법(The Revenue Act of 1932)

 

<12> 1932년 11월 대통령 선거와 FDR 집권

<13> 1933년 금융위기와  긴급은행법(the Emergency Banking Act, 1933)

 

<14> FDR의 집권 100일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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