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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the New Deal) 정책 대해부 : <제1부> 정책과 정치의 갈림길 ① 20C 초 미국정치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7월01일 10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7월01일 10시1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8

본문

 문재인 정부의 향후 정책기조가 뉴딜(New Deal)을 표방함에 따라 세간의 이목이 다시 뉴딜을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뉴딜이 태동된 배경과 그 구체적인 정책의 내용과 성과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내려 볼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뉴딜의 좋은 점은 다시 배우고 나쁜 점은 반복하지 않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1> 공화당 진보파의 분당과 테디 루즈벨트의 ‘Bull Moose Movement’(1912)

 

미국의 26대 대통령 테디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이하 TR)는 1909년 3월 퇴임했다. 그리고 후임으로 쟁성장관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를 지명했다. 천성적으로 적극적이며 진보주의자였던 TR에 비해 제2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태프트는 성실한 보수주의자였다. 자신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태프트가 인종차별에 관한 개혁주의적인 정책을 지지하지 않고, 통적인 보수정책을 견지하자 TR은 노골적으로 태프트에 반감을 나타내었다. 

 

태프트의 정책에 반감을 가진 많은 공화당 진보세력의 강권에 따라 TR은 1912년 가을에 있을 차기 대선에 출마할 것을 선언하였다. 공화당 대선 프라이머리 투표가 진행되면서 태프트는 통적인 공화당지지지역(뉴욕, 미시건, 인디애나 등)에서 승리했고 TR은 진보색이 강한 주(일리노이, 미네소타, 캘리포니어)는 물론 태프트의 고향 오하이오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대통령후보 지명은 당 지도부의 ‘최종평가’에 따라 결정되었고 당 지도부는 집권대통령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므로 TR의 승산은 거의 없었다. 불만에 싸인 공화당진보세력과 TR은 새로운 당을 창당하기 위해 탈당을 감행했다. 이들이 창당한 개혁당을  ”불-무스 당(Bull-Moose Party) “ 이라고 부른다.  당명의 유래는 TR이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황소(bull)나 말코사슴(moose) 처럼 준비된 사람” 이라고 한 데에서 연유한다. TR은 대통령 임기 내내 영원한 원칙 정의(the eternal principle of righteousness)에 바탕을 둔 “스퀘어 딜(The Square Deal)”로써 3C를 강조하였었다.

 

<3C 정책목표>

   · 자원보호(Conservation of natural resources), 

   · 대기업 규제(Control of corporations), and 

   · 소비자보호(Consumer protection). 

 

TR과 불-무스 개혁당이 내세운 개혁정책은 “새로운 국가주의(New Nationalism)”라는 이름아래 산업규제를 더욱 강화하고 법관의 권한을 제한하며 국가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공공사업과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자는 것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였다.

 

(1) 사회개혁(social reform)으로써

 

  · 국가적 의료보험체계 구축 

  · 고령자, 실업자 및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보험(Social insurance) 

  · 법원의 노동쟁의 개입 제한

  · 여성의 최저임금

  · 주 8시간 근무 

  · 증권감독기구 설립

  · 농장농업지원 

  · 근로자 산업재해보험 

  · 상속세 도입

   

(2) 정치개혁으로써

 

  · 정치후원금 제한 및 투명성 보장

  · 로비스트 등록

  · 의회 위원회의록 기록 및 공개

  · 여성참정권

  · 상원의원 직접선출

  · 헌법 개정 용이화

  · 지방정부의 소환제 도입

  · 입법찬반 투표제

  · 시민 입법제

  · 사법부 소환제 도입

 

1912년 11월 5일에 있은 28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민주당 윌슨의 승리로 끝났다. ‘새로운 자유(New Freedom)’를 내세운 민주당 윌슨이  629만 3천표로 42% 득표(대의원 435), 진보당 TR이 412만 2천표로 27%득표(대의원 88), 그리고 공화당 태프트 현직 대통령이 348만 6천표로 23% 득표(대의원 8), 그리고 사회당 뎁스가 90만 2천표로 6%를 득표하였다. 집권 공화당이 분열한 당연한 결과였다. 

 

<2> 윌슨 대통령과 WWI(1914-1918)와 베르사이유 조약(1919)

 

새로운 자유(New Freedom)를 앞세운 윌슨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의욕적으로 새로운 대책을 쏟아내었다. 

 

   · 관세인하 및 세제개혁

   · 은행혁신과 연방준비제도 

   · 대기업 규제를 통한 자원의 형평배분

   · 노동 및 농업 

 

(1) 관세인하와 증세

 

민주당은 대대로 관세를 소비자에 대한 부당한 과세이고 대기업에 의해 정부가 쉽게 조종되는 악폐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윌슨은 관세인하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삼았다. 상하 양원을 장악한 민주당과 윌슨 행정부 곧바로 관세를 40%에서 26%로 대폭 인하하고 고소득자 소득세를 인상하는 법(The Revenue Act 1913)을 통과시켰다. 1916년 세법개정에서는 연방부동산세를 재도입하고 소득세최고세율을 15%로 올렸으며 법인세율은 1%에서 2%로 인상하였다. 윌슨의 세제개혁을 통해 연방정부의 세수는 과도한 관세수입 의존구조에서 벗어나 내국세에 기반을 두는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2) 연방준비제도 (Federal Reserve System)

 

윌슨 대통령의 다음 과제는 중앙은행 개혁이었다. 영국이나 독일과는 달리 미국에는 중앙은행이 없었다. 1907년 금융(은행)위기 이후로 여야 지도자들 사이에는 잦은 금융위기에 신축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할 중앙은행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있었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법적 지위에 관해서는 엄격한 공적기관이어야 한다는 진보주의자와 사적기관에 머물러야 한다는 보수주의자 사이에 의견이 충돌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금융권을 지배하고 있던 금융계로써는 강력한 공적 중앙은행의 설립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윌슨은 중앙은행의 공공성을 강조하면서 중도적인 견해를 받아들였다. 민주당 하원의원 글래스와 상원의원 오웬이 주도하여 만든 연방준비제도법은 

 

  · 민간은행이 주주가 되는 12개 지역연방은행을 설립하되  

  · 지역연방은행을 총괄하는 조직은 대통령이 추천하여 상원이 결정

 

하도록 하였다. 이것을 내용으로 하는 연방준비제도법은 1913년 12월 23일 윌슨 대통령이 서명하였다.

   

(3) 대기업규제 Antitrust legislation

 

1890년에 제정된 셔먼 반-트러스트 법(The Sherman Anti Trust Act, 1890)은 

 

      “ 정상적인 거래를 저해하는(in restraint of trade)  

        계약(contract)이나

        결합(combination)이나

        모의(conspiracy)는

        금지한다.“ 

 

라고 규정하였지만 대형 기업결합(trust)을 막는 데에는 치명적으로 결함이 있었다. 대기업이나 철도회사나 금융기관의 영악한 임원들은 신규 참여기업의 자유로운 경쟁을 막는 방법들을 교묘하게 만들어내었다. 윌슨 대통령은 하원의원 클레이튼을 지원하여 트러스트를 통한 차별적 가격행위, 배타적 거래, 상호이사교한 등을 규제하는 클레이튼 법(the Clayton Anti-trust Act, 1914)을 입법하였다. 윌슨은 입법을 통하여 모든 부당행위를 세세히 막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담기구(Federal Trade Commission)를 설립하도록 했다.(the Federal Trade Commission Act of 1914).

 

(4) 노동 및 농업 Labor and agriculture

 

윌슨의 노동정책은 노동부를 통해서 노사의 분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분규가 일어날 때마다 윌슨은 정부대표를 보내 중재를 도모했으며 1914년 콜로라도 탄광분규 때처럼 물리적인 분규가 발생할 때에는 군대를 보내기도 했고 1916년 철도분규 때에는 대표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대표자회의를 주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사분규의 이면에는 뿌리 깊은 제도적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파악한 윌슨 대통령은 일일 8시간 근무제를 상한으로 하는 법(the Adamson Act, 1916)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사기업의 근무시간을 법으로 규제한 역사상 최초의 미국 연방법이다.

 

농업에 관해서는 대학과의 연계프로그램(extension program)를 통해 새로운 작물법을 시도하는 농가에게 정부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법(the Smith–Lever Act of 1914)을 제정하였고 12개 지역 농업은행을 설립하여 저리금융을 도왔고(the Federal Farm Loan Act, 1916) 이와 더불어 도로 건설을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었다.(the Federal Aid Road Act of 1916)

 

1916년 대통령 선거에서 윌슨은 49.2%(대의원 277)를 얻어 46.1%(대의원 254)를 얻은 공화당 후보 휴즈 대법관을 이겼다. 하원에서는 민주당이 16석을 잃고 214석을 얻어 215석을 얻은 공화당에 1당을 내주었고 상원에서는 1석을 잃었지만 56석으로 다수당 자리를 지켰다.

 

(윌슨의 제1차 대 중립)

 

제1차 세계대은 1914년 7월 일어났다. 그 해 9월 제1차 마르느 투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이후 추축국과 연합국 측은 장기으로 들어갔는데 쟁 초기서부터 1917년 초까지 윌슨 대통령의 입장은 중재를 시도하면서 철저한 중립을 유지했다.   

 

1915년 독일 해군이 미국 상선 3척을 침몰시켰을 때에도 고의가 없는 단순한 사고로 보았고 영국여객선 루시타니아를 침몰시켜 미국인 128명을 포함하여 1198명이 사망했을 때에도  윌슨은 독일에게 엄중하게 재발방지를 요구했을 뿐 쟁에 뛰어들 생각은 혀 없었다. 독일과의 쟁을 선언하기를 바랐던 TR은 격렬하게 중립주의자 윌슨을 비판했고 철저한 중립을 주장한 국무장관 브라이언은 점점 쟁에 가까워지는 듯한 윌슨에 대항하여 사표를 쓰고 말았다.  

 

(제1차 대 결정)

 

1917년 1월 독일은 무제한적인 잠수함 작에 돌입했다, 영국 주변에 접근하는 선박에 대해서는 무제한적으로 공격을 감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런 략이 미국을 쟁으로 끌어 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았지만 영국을 봉쇄하여 성공하면 미국이 참하기도 에 승리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17년 2월에 지머만 보사건(*주 1)이 터졌다. 독일 정부와 멕시코 정부 사이에 교환된 비밀문서였는데 미국이 독일과의 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멕시코가 미국에 대해 쟁을 일으키면 1836년 잃어버린 멕시코의 땅 아리조나와 텍사스와 뉴멕시코를 되받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17년 2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작이 감행되자 미국 여론은 급격하게 참 쪽으로 기울었고 윌슨은 3월20일 각의에서 만장일치로 쟁을 의결했다. 윌슨의 요청에 따라 4월 6일 상하원 특별회의가 열렸고 상원 82:6, 하원 373:50 찬성으로 미국이 독일에 대해 선포고를 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과 베르사이유 조약)

 

쟁은 1918년 11월 11일 휴조약으로 종식되었으나 연합국과 독일 간의 쟁은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이유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형식적으로 끝이 났다. 다른 나라들과의 종조약은 개별적으로 별도로 체결되었다. 베르사이유 조약의 주요 내용은

 

   · 독일이 쟁의 책임과 손실과 파괴의 궁극적인 책임을 질 것 

     (조약 제231조, 소위 범조항) 

   · 독일은 무장을 해제하고 영토를 할양하며, 일정한 승국에게 쟁보상을 할 것

     (총 쟁보상액은 1320억 독일마르크 = 2020년 가치로 약 $4420억)  

     

케인즈는 조약의 내용이 너무 가혹하고 비생산적이라고 비판했다. 독일 경제가 살아나지 못하면 세계경제에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카르타고의 평화(The Carthaginian Peace)라고 혹평했다. BC 146년 제3차 페니키아 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페니키아의 거의 모든 시민들을 죽였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아서 완히 멸절시켰던 것을 말한다. 반대로 프랑스는 배상이 너무 가볍다고 불만이었다. 1924년의 도즈플랜과 1925년의 로카르노 조약에서 쟁보상이나 군사외교적인 제약은 일부분은 완화되었지만 독일의 불만은 혀 누그러지지도 않았고 납득하지도 않았다. 제2차 세계대의 불씨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주 1) Zimmermann Telegram 사건(1917년 1월 16일)

 

- 독일 외무부 장관 지머만이 주 멕시코 독일 대사관에 보낸 비밀문.

- 내용은 (1) 독일이 2월부터 무제한 잠수함작을 펼칠 예정

         (2) US가 계속 중립을 유지하기를 바람

         (3) 그렇지 않을 경우 멕시코가 미국에 대해 쟁을 일으키면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

         (4) 멕시코가 1836년 빼앗긴 텍사스, 아리조나 뉴멕시코를 

            되찾는 것을 독일이 지지할 것.

- 첩보의 습득 : 영국이 미국의 케이블 통신망을 감청하다 습득.

                => 영국은 습득 경위를 거짓 짜맞춘 다음 뒤늦게 발표함.

- 미국 내에서는 정보진위에 대해 의문하며 참반대 움직임(독일계이민자 및 반주의자)

                반독일 반멕시코 주의자가 다수

                2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작 돌입

                지머만 본인이 정보의 진짜라고 발표.(3월 3일)

                => 3월 20일 미국 각의만장일치 참의결

                => 4월 6일 대독일 참 양하원 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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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딜(the New Deal) 정책 대해부

제1부 정책과 정치의 갈림길  -  세부목차

 

<1> 공화당 진보파의 분당과 테디 루즈벨트의 ‘Bull Moose Movement’(1912)

<2> 윌슨 대통령과 WWI(1914-1918)와 베르사이유 조약(1919)

 

<3> 미국의 1920년대 : 포효하는 20년대 (Roaring Twenties) 

<4> 농업위기와 후버의 대책 농업유통법Agricultural Marketing Act, 1929년 6월)

 

<5> 월-스트리트 증시 대폭락(the Wall Street Crash of 1929)과 대공황

<6> 후버의 대공황 종료선언 (1930년 5월 1일)과 11월 중간선거 참패 

 

<7> 1930년 은행위기

<8> 스무트-홀리 관세법(1930년 6월 17일 서명 발효)

<9> 1931년 미국과 유럽의 은행위기 

 

<10> 후버의 대공황 타개정책

<11> 후버의 1932년 증세법(The Revenue Act of 1932)

 

<12> 1932년 11월 대통령 선거와 FDR 집권

<13> 1933년 금융위기와  긴급은행법(the Emergency Banking Act, 1933)

 

<14> FDR의 집권 100일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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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7월01일 10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7월01일 10시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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