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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0 : 정통의 전량(前涼)을 실질적으로 무너뜨린 장조(c)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7월10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6월20일 12시1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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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14) 유요의 장무 양주 공격(AD323)

 

유요가 직접 28만 대군으로 서쪽 양주를 공격해 들어왔다. 유함은 기성(감숙성 감곡)에서 전량의 한박를 공격했고 호연안은 상벽(감숙성 농서)에서 음감을 공격했다. 유요의 군영 길이는 100리에 뻗었고 쇠북치는 소리에 땅이 흔들리고 황하 물이 끓어올랐다고 기록될 정도로 광대한 규모의 침입군이었다.

   

장무의 방위군들은 유요군의 풍문만 듣고도 흔들리고 무너졌다. 참군 마급이 장무가 직접 항전에 나설 것을 권고했다. 그래야만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라갈 것이라는 말이었다. 장사 범위는 이런 위급한 상황으로 주군을 몰아넣는 마급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범위의 한심한 대꾸에 대해 마급이 이렇게 내뱉었다.

 

  “ 역시 범공은 조박한 서생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만 들추어내는 소인배일 뿐

    국가의 계책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밝으신 공의 부자는 역도 유요를 베지 못하여 한이 된 것이 여러 해 였습니다.

    지금 유요가 직접 가까이 왔으니

    멀고 가까운 모든 사람들이 명공의 거동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마땅히 용기가 있음을 보이셔서 

    진주와 농산의 희망에 부응하셔야 합니다.

    비록 세력으로는 대적하지 못할 지라도

    형세를 보면 출전 못할 것도 없습니다.“ 

 

장무가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마침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석두(고장성 동쪽)에 주둔했다. 장무가 참군 진진에게 물었다.

 

  “ 유요가 삼진(三秦,관중지역을 일컫는 말)의 무리를 이끌고 

    이긴 기세를 타고 돗자리 말 듯 쳐들어오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소?“

 

진진이 이렇게 말했다.

 

  “ 유요의 병사는 수효는 많지만 정예병은 매우 적습니다.

    대개 강족과 저족의 까마귀 떼와 같습니다.

    은혜를 베풀고 믿음을 주는 일이 거의 없었고 

    또 고향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니 뱃속 고질병을 잊고 어찌 몇 날 몇 달을 싸움에 몰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20일이 지나도 물러나지 않으면  

        저 진진이 지친 병졸 수 천 명을 청해서 그들을 잡아오겠습니다.“

           

진진의 말에 크게 위안이 된 장무가 군사를 주어 기성(감숙성 감곡)의 한박을 구원하게 했다. 전조의 장수들이 서둘러 황하를 건너려고 하자 유요가 이렇게 말하며 말렸다.

 

  “ 우리 군사가 비록 왕성하기는 하지만 

    위엄이 두려워서 온 사람이 2/3이고 

    중군 또한 피곤하니 실제로 써먹을 군대는 별로 없소.

    다만 갑병을 관장하여 움직이지 말고

    나의 권위와 위엄으로 저들을 굴복시켜야 할 것이니

    만일 중순을 넘어도 장무의 표문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내가 경들에게 진 것이오.“ 

 

장무는 얼마 후 사자를 파견하여 번속을 자칭하면서 말, 소, 양 및 진기한 보물을 보내왔다.

유요도 답례로 장무에게 시중, 도독양남북진약익파한농우서역잡이흉노제군사, 태사 및 양주목으로 삼고 구석을 덧붙여 주었다. 이만하면 전조 조정이 장무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영예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번 출병으로 유요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량의 무릎을 꿇릴 수 있었고 장무 또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영토를 지켜냄과 동시에 전조 조정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데 성공했다. 

 

(15) 영균대를 수리한 장무(AD323)

 

유요의 군대가 물러가자 장무는 수도 고장의 성을 크게 쌓고 이 틈에 영균대를 대대적으로  수리하는 공사를 일으켰다. 별가 오소가 반대 상소를 올렸다.

 

  “ 공께서 성을 수리하고 대를 축조하시는 것은 

    대개 과거 환란(유요침공)을 경계 삼으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저는 진실로 은혜를 베푸는 것이 부족하면 

    아무리 높은 대를 쌓아도 적을 방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사람들의 충성을 의심하고

    병사와 백성들이 의탁할 곳을 잃으며

    겁 없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시어 

    이웃 적들이 시시때때로 쳐들어 올 모의를 한다면

    장차 어떻게 천자를 보좌하며 

    어떻게 제후의 패자가 되시겠습니까?

    바라건대 이 공역을 파기하시고 

    백성들의 노역과 경비를 줄여 쉬게 하십시오.“

 

장무가 조용히 오소를 설득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 돌아가신 형님(장식)이 어느 날 적에게 몸을 잃게 되었을 때

    어찌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병사가 절개를 다 바칠 생각을 하지 않았겠소?

    돌아보면 화란이란 생각지 않은 곳에서 생각지 않은 때에 일어나는 법이요.

    비록 용기와지혜가 있다고 한 들 사용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소.

    왕공들이 험한 곳을 만들어놓고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라도 거듭하여 문을 닫아걸었던 것이 

    옛날의 도리였소.

    지금은 국가가 태평하지 않으니    

    태평시대의 이치로 진퇴양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을 탓할 수는 없소.“  

 

장무는 끝내 성을 완성했다.

 

 

(16) 장무 병사(AD324)

 

유요의 침공을 외교적으로 잘 막은 장무가 병환이 들었다. 국가가 위태로운 이 시점에 드러눈ㅂ게 되자 장무는 조카이자 세자인 장준을 불러 눈물 흘리며 말했다.

 

  “ 우리 집안은 대대로 효성과 우애와 충성과 순종으로 

    세상의 칭찬을 받아왔다.

    오늘날 천하가 크게 혼란하여도 

    너는 이 전통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아라.“

 

그리고는 장무가 명령을 내렸다.

 

  “ 내 관직은 왕명을 따른 것이 아니고 

    진실로 사람을 모아 벌인 일이니 

    어찌 영광스럽다고 할 것이냐?

    죽는 날 흰 옷을 입혀서 관에 넣되 

    조복(지위에 맞는 관복)을 입히지 말고 묻어라.“

     

그 날로 장무는 죽었다.(AD324년 12월) 48세였다. 형 장식의 자리를 계승한 지 4년 만에 죽은 셈이다. 조카 장준이 그 자리를 계승하여 양주목, 양왕이 되었다. 이 때 장준의 나이는 열 일곱살 이었다.

 

(17) 신안의 반란(AD324년 12월) 

 

전량의 장수 신안이 부한(감숙 임하)을 점거하고 전량의 명령을 복종하고 따르지 않았다. 장준이 토벌계획을 세웠다. 전량 조정의 종사 유경이 말했다. 

 

  “ 패권을 가진 왕의 군대는 반드시 

    하늘의 때와 인간의 사정이 맞아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법입니다.

    신안은 흉악하고 미친 짓을 하므로 저절로 망할 것이 분명합니다.

    어찌 기근이 든 해에 군사를 일으키시고 

    추운 겨울에 성을 공격하시는 것입니까?“

 

장준이 출병계획을 중단시켰다. 

 

 

(18) 전량의 책사 왕즐(AD325)

 

장준은 전량의 참군 왕즐을 유요에게 보빙으로 보냈다. 보빙이란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을 담고 가는 사신이다. 사실상 복종의 뜻을 내포하기도 한 셈이다. 유요가 왕즐에게 물었다.

 

  “ 진실로 우호관계를 보장할 수 있소?”

 

왕즐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 없습니다.”

 

전조의 시중 서막이 물었다.

 

 “ 그대가 와서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면서 

   우호관계를 보장하지 못한다니 그것이 무슨 말이요?“

 

왕즐이 대답했다.

 

  “ 제 환공이 관택의 맹약을 할 때에는 

    걱정하는 마음에 전전긍긍했지만 

    모든 제후들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앞 다투어 달려왔소.  

    제 환공이 규구에서 모임을 할 때에는

    힘을 떨치고 자랑했지만 배반한 나라가 아홉 나라였소.

    전조 조정의 교화가 오늘 같다면야 약속할 수 있겠지만

    만약 정치와 교육이 허물어진다면 

    가까운(내부) 곳에서 부터 반란이 일어날 텐데

    어떻게 우리 주군이 우호를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즉, 전조와 전량의 우호관계란 전조 조정이 얼마나 바른 정치를 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전량에게 달린 것이 아니니 우호관계의 모든 것이 너희에게 달려 있지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말이었다. 유요가 이렇게 외쳤다.

 

   “ 이 사람은 양주의 군자다”

 

왕즐을 후히 대우하고 돌려보냈다.

 

 

(19) 장준의 성한(成漢)과의  우호관계(AD327) 

 

아무리 우호관계를 수립했다고 하더라도 장준은 전조의 압박이 항상 두려웠다. 전조의 군사력이 막강한 반면 전량의 군사력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약했기 때문이다. 장준은 전조와의접경인 농서(감숙 농서)지역과 남안(농서 동북쪽)지역 주민 2천 가구를 고장(감숙 무위)로 이주시킴과 동시에 남쪽 익주(사천성 성도)지역에 웅거한 성(또는 성한)과 우호관계를 수립하면서 서로 황제라는 존호를 사용하지 말고 동진에 충성하자고 권고했다. 성한은 저족인 이웅이 AD306년 파촉지역에 세운 나라다. 성의 창업자 이웅이 이렇게 말했다.

 

   “ 저는 본래 제왕이 되는 것에 전혀 관심 없습니다.

     진 황실의 공신이 되어 더러운 먼지를 소제하고 싶지만

     진 황실이 지지부진하고 은덕을 베풀지 못하여 

     목을 뽑아 동쪽을 바라본지 몇 년이 됨

     마침 편지를 보내오셔서 부탁하시니 어찌 그리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성한과 전량의 우호관계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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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20년06월20일 12시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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