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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0 : 정통의 전량(前涼)을 실질적으로 무너뜨린 장조 (b)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7월0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6월20일 12시12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7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8) 유요의 장안공격과 서진 멸망(AD316) 

 

전조의 유요가 장안을 공격해왔다.(AD316) 장식은 안정태수 초숭과 신평태수 축회와 홍농태수 송철을 보내 장안을 구원했다. 서진의 산기상시 화집이 패상(섬서성 남전)에 주둔하고  군사를 총지휘하자 유요군이 두려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상국 사마보가 호숭을 파견 유요를 격파했으나 서진 조정의 궈신 국윤과 삭침 무리가 다시 정권을 오로지 할 것이 두려워 군사를 뒤로 물린 뒤 흥평으로 철군하고 말았다. 

 

사마보의 군사들이 물러나자 유요는 장안외성을 함락시켰고 국윤과 삭침은 장안의 작은 내성을 지켰다. 전조 유요의 군사에 포위된 내성에는 곡식이 부족하여 쌀 한말이 금 2냥과 바꾸었고 사람을 서로 서로 잡아먹어 인구 숫자가 절반으로 줄었다. 서진의 군사나 백성들은 다 성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전량의 의병 천 여명은 죽음을 무릅쓰고 방어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AD316년 3월10일 서진 민제 사마업은 어깨를 드러내고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수레에 싣고 장안 내성 동쪽 문을 나와서 유요에게 항복했다. 유요는 관을 불태우고 사마업을 평양(산서성 임분)으로 호송했다.(3월17일) 전조 황제 유총은 서진황제 사마업을 광록대부 회안후에 봉하고 일단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러나 사마업은 2년 뒤 처형된다.

 

서진이 멸망한 뒤 조정의 황문랑 사숙과 시어사 왕충은 양주에 의탁하기 위해 도읍지 무위로 도망왔다. 그리고 민제가 유요에게 항복하기 전 몰래 보낸 조서를 장식에게 건넸다.

 

  “ 대도독 양주목 시중 사공 장식은

    승제(황제의 위임을 받아)하여 일을 처리하라.

    짐이 낭야왕(사마예)에게 때를 맞추어 

    대위를 받아 섭정하라고 명령하였으니   

    그대는 낭야왕을 도와 어려움을 풀어가라.“

 

말하자면 자신이 포로가 된 상황이니 장식이 망명정부의 수장이 되어서 마치 황제 위임을 받은 것처럼 정치를 하면서 낭야왕을 도와 서진 조정을 재건하는데 노력하라는 황명인 셈이었다. 낭야왕 사마예(AD276-AD323)는 사마관의 아들이다. 사마관은 서진 창업주 사마의의 아들 사마주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서진의 건국창업자 사마염의 사촌인 셈이다. 그러므로 사마예는 사마의-사마염의 직계 후손이다. 사마예는 다음해인 AD317년 건강으로 내려가 동진의 창업주가 된다. 장식과 그 후손들은 조상들이 서진 조정에 그랬듯이 동진 조정에 대해 끝까지 충성을 바쳤다.

 

(9) 전조의 천수지역 압박(AD318)

 

서진이 AD316년 유요에게 멸망될 때 일부 관료들은 남양왕 사마보를 중심으로 북서쪽으로 도망가서 천수를 중심으로 안정(감숙성 진원)과 신평(섬서성 빈현)과 부풍(섬서성 흥평)지역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전조의 안정태수 초숭과 토로장군 진안이 군사를 들어 상규(감숙성 천수)를 압박해 들어왔다. 당황한 서진 상국 사마보가 장식에게 다급하게 구원을 요청했다. 장식은 금성(감숙성 난주)태수 두도에게 보,기병 2만을 보내 구원해 주었다.

이 즈음 포로로 잡혀있던 민제 사마업이 평양에서 피살되었다.(AD317년12월20일) 파강도위장선이 장식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남양왕 사마보는 황실의 먼 친척

    스스로 존호를 가지려고 하나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왕 사마예는 가까운 친척 또한 명망덕행도 갖고 있으니

    마땅히 천하가 그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마보의 계통이 낭야왕 사마예처럼 황실과 가깝지 않으니 돕지 말자는 권고였다. 장식은 사신 채충을 표문과 함께 건강 사마예에게 보냈다. 장식은 민제 사망 후 계속해서 민제 연호인 건흥을 49년 동안 사용했다. 동진 효종 승평 5년(AD361)이 되어서야 당시 주군 장천석은 동진 연호 승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0) 독립을 선언한 사마보와 피살(AD319)

 

상규(감숙성 천수)에 주둔해 있던 남양왕 사마보가 AD319년 없어진 서진 조정을 부활한다는 의미에서 진(晉)왕을 자칭하면서 연호를 건강이라고 하고 장식을 정서대장군 및 개부의동삼사에 임명했다. 그런데 진왕 사마보의 부하 진안은 스스로를 진주자사라고 자칭하면서 전조에 투항했다가 성한에 투항했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상규에 큰 기근이 일어나자 진안이 상규를 공격해 들어왔다. 진안에게 압박 받던 사마보는 또 다시 장식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다. 충성스런 장식은 보,기병 5천을 보내 사마보를 도와줬다. 장식의 구원병이 진격해 들어오자 진안은 면제(감숙성 청수)로 퇴각했고 사마보는 측근 장천과 함께 다시 상규로 돌아 올수 있었다. 사마보가 천수로 복귀한 뒤 장식의 군대가 돌아가자 진안은 다시 상규를 압박했는데 이번에도 장식은 장수 송의를 보내 진안을 완전 퇴각시켰다.(AD319)

 

사마보의 장수 장춘과 양차는 별장 양도와 불화했다. 장춘과 양차는 사마보에게 양도를 죽이라고 졸랐지만 사마보가 듣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또 사마보에게 진안을 공격하자고 권했지만 이 역시 묵살하고 듣지 않았다. 화가 난 장춘과 양차는 사마보를 유폐시켰다가 곧 살해해 버렸다. 사마보는 순진하기는 했지만 아둔하고 결단력도 없으며 사실상 무능한 군주였다. 장춘과 양차는 사마보에게 아들이 없어서 종실의 자제 사마첨을 후계로 세웠다. 이 난리통에 사마보 무리 중 1만여 명이 장식이 있는 양주로 도망갔다.

 

진안은 주군 유요에게 장춘과 양차가 조종하는 사마첨을 토벌하기를 요청했다. 유요는 즉각 승낙했다. 유요의 대군이 진안의 선봉으로 쳐들어오자 장춘과 양차는 내부에서의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곧바로 사마첨을 살해했다. 그러나 유요와 진안의 연합군을 막기에는 턱없이 힘이 모자랐다. 장춘은 부한(감숙성 임하)으로 도망갔고 양차는 진안에게 포획되었다. 진안은 사마보의 영구 앞에서 양차를 참수했다.

 

 (11) 유홍의 반란과 전량 건국(AD320)

 

유홍이라는 사람이 양주 천제산(무위 남쪽 40KM)에서 요사한 술법을 가지고 혹세무민 하는 바람에 1천 여 명 백성들이 그를 열렬히 따르는 일이 벌어졌다. 그 무리 중에는 장식의 부하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관리 염섭과 조앙 등은 유홍과 고향이 같았다. 유홍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하늘이 내게 신의 인새를 주었으니 

    응당 내가 양주에서 왕노릇 해야 할 것이다.”

 

유홍을 철저히 따르며 신봉하던 염섭과 조앙은 주위의 10여명과 함께 장식을 암살하고 유헝을 옹립할 음모를 꾸몄다. 장식의 동생 장무는 그 사실을 전해듣고 장식에게 가서 유홍 무리를 잡아들이라고 재촉했다. 장식이 사초를 보내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염섭은 칼을 품고 장식의 침막으로 들어가 그를 암살하고 말았다. 나이 50세 였다. 사초가 유홍에게 갔을 때 유홍은 이미 장식이 죽었다고 말했지만 사초는 유홍을 잡아 혀를 자르고 가두었다가 고장(무위)의 저자에서 거열형에 처해버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하던 무리 수 백명도 함께 처단했다.

 

장식의 아들 장준이 13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삼촌 장무를 양주자사 서평공으로 세웠고 전국에 사면령을 내림과 동시에 장준에게는 무군장군의 직책을 내렸다. 이런 사면령 조치는 사실상 독립국가 만 할 수 있는 행위이다. 따라서 자치통감의 역사가들은 이 때를 전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바야흐로 중국에는 5개 국가가 병립하는 형국이 되었다. 동진, 전조, 후조, 성한, 그리고 전량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때 이미 탁발의로의 대나라가 건국(AD315)된 상태였으므로 사실은 6국체제가 된 셈이다. 곧바로 장무는 조카 장준을 세자로 세웠다. 

 

(12) 영균대 축조와 염증의 반대(AD321)

  

장무가 영균대를 축조하려고 했다. 높이가 9인이었는데 4-8척을 1인이라고 했으므로 36척에서 72척에 해당하는 높은 궁궐인 셈이다. 그 소식을 들은 염증이 한 밤중에 장무가 사는 양왕부의 대문을 두드렸다.

 

  “ 무공(장궤)이 사람을 내게 보내어서 말했습니다.

    ‘어떤 연고로 백성을 수고시키면서 영균대를 쌓는가?’ “ 

 

유사들이 죽은 장궤의 말을 하는 것이 요사스럽다고 하여 염증을 죽이자고 했다. 장무가 그런 신하들을 물리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백성들이 고생한다고 생각한다. 

    염증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받들어서 

    나를 고치도록 권유하는 것이니 

    너희들이 어찌 요사하다고 말하는가?“

  

장무는 사람을 급히 보내 영균데 축조를 그만두게 했다.(AD321) 그 다음해에 장무는 장수 한박을 보내 농서와 남안(모두 감숙성 농서현 부근)을 빼앗고 거기에다가 진주(秦州)를 설치했다. 이 진주는 지금의 농서 땅으로써 진안이 다스리고 있는 전조의 진주(천수)와는 다른 지역이다. 5d5d5045f6f1f8f1707608fb02e178df_1592620 

 

(13) 진안의 멸망(AD322)

 

진주자사 진안이 유요에게 알현을 요청했으나 유요는 지난 번의출정 때 얻은 풍토병으로 만나주지 않았다. 화가 난 진안은 유요의 후미를 공격했다. 일종의 반란인 셈이다. 농상지역 저족, 강족 10만 여명이 모두 진안에 귀부했다. 이런 호응을 받게 되자 진안은 스스로를 대도독 가황월 대장군 등이라 칭하였다. 노빙이 진안에게 큰 소리로 울면서 탄원했다.

 

  “ 나는 차마 당신이 죽는 것을 못 보겠습니다.”

진안이 반란했으므로 곧 죽을 것이라는 예기였다. 진안이 화가 나서 목을 치라고 명령했다. 노빙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꾸했다.

 

  “ 죽는 것은 내 스스로의 몫이요.

    죽거들랑 내 머리를 상규 저자에 걸어두어 

    전조와 유요가 당신의 목을 베는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진안이 화가 치밀어 올라 그를 드디어 죽였다. 유요는 그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

 

  “ 노빙은 현명하며 천하 백성들이 기대는 사람이다.

    진안이 현인을 찾아야 할 시기에 죽였으니 

    나는 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 사람임을 알았다.“     

 

진안은 내분에 빠진 서진 조정은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양왕이라 일컫고는 군사를 모아 유공이 주둔하고 있던 남안(감숙 농서현 동북)을 포위공격했다. 그러나 전조의 휴도왕 석무가 감숙성 임조에서 군사를 이끌고 상규(감숙성 천수)로 와서 유공을 지원하면서 진안은 크게 패했다. 진안은 7천 잔당을 모아 빠져나와 감숙성 장가천으로 달아났고 석무는 상규를 접수했다. 그 해 7월 유요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나와 진안이 있는 장가천을 포위했고 따로 군사를 보내 석무가 장악하고 있는 상규도 포위해 버렸다. 석무는 얼마 전 유요에게 귀부한 상황이었지만 이번에 무력으로 봉쇄해 버린 셈이다. 유요의 대군이 들이닥치자 장가천은 물론 상규의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진안은 정예기병을 대동하고 포위망을 빠져 나갔으나 결국 전조의 보위장군 호연청인에게 사로 잡혀 목이 베어졌다. 진안은 장군과 병사를 아주 잘 어루만지고 다루어 고락을 함께 했으므로 그의 죽음을 매우 애도하면서 다음과 같은 ‘장사의 노래(壯士之歌)’를 지어 불렀다.        

 

“ 농상(감숙성 동부 일대)에는 진안이라는 장사가 있었소,

  체구는 비록 작았어도

  배짱은 그 누구보다도 더 컸었소,

  장사를 아끼기를 자신의 심장처럼 아꼈고

  멋진 말을 타고 철 안장에 앉아

  일곱 척 큰 칼을 폭포처럼 휘둘렀고

  장팔사모(길이 1장 8척의 뱀 치장을 한 긴 창)를 좌우로 휘두르면서 싸웠는데

  열 번 전투에도 허물어지지 않았으나

  마침내 세 번째 싸움에서 장팔사모를 놓치자 멋진 말을 버리고

  수풀 속 바위틈으로 피신했소.

  밖에서 원군이 오기를 목 빼고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으니

  서쪽으로 흐르는 물,

  동쪽으로 흐르는 강,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으니 어찌할꼬, 어찌할꼬“ 

    

진안이 죽자 그 부하들은 모두 유요에게 항복했다. 농지역(감숙성 동남부 지금의 천수지역 일대)의 여러 부락들도 모두 유요에게 항복하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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