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 극복의 일등공신, 의료보험 (1) 출생의 비밀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6월07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6월07일 17시36분

작성자

메타정보

  • 6

본문

 

 이 글은 필자가 집필한 책 ‘한국의 사회보험, 그 험난한 역정’(코리안 미러클 5)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 2019.3, (주)나남>을 토대로 작성된 것임을 밝혀둡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국가별 의료보험제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코로나19 극복의 일등공신은 의료인들의 헌신과 봉사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의 정착이 버팀목으로 작용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국내에서는 의료보험제도의 도입이 어느 정부에서 이뤄졌느냐를 놓고도 설왕설래가 일기도 했다. 사실 오늘의 의료보험제도(건강보험)는 박정희 정부시절에 탄생됐지만 튼실한 열매로 키워낸 것은 어느 정부의 작품이 아니라 역대 모든 정부가 험난한 역경을 극복하면서 하나씩 일궈놓은 축적의 결과물이다. 

 

코로나 시대에 가장 망신을 당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 아닌가 싶다. 환자발생 숫자나 사망자 수에서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의료혜택에서도 후진적인 면모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의료보험제도의 미비로 저소득층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 사망에 이른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료민영화 정책을 채택하고 있는 미국은 의료보험 역시 국가가 아닌 개별기업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의료보험 가입도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보험료도 비싸 저소득층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미국 국민의 약 15% 정도는 의료보장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코로나19의 만연은 필연의 결과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세계 최고 부자나라 미국이 왜 이런 열악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원래 미국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최우선가치로 내세운 나라인 만큼 의료보험도 국가보다는 민간이 운영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많았고,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사회보장법’을 제정할 때 이 같은 민영화 논리를 앞세운 의사들의 반대로 의료보험 도입이 좌절된 바 있다.

 

독일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1883년에 만든 ‘질병보험법’ … 세계 최초 사회보험

 

 사회보장 수단의 하나인 사회보험제도는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1883년 6월 독일에서 처음 ‘질병보험법’이 도입돼 세계 최초의 사회보험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독일보다 선진국이었던 영국은 그보다 29년 뒤인 1911에야 ‘국민보험법’을 성안해 의료보험 등을 실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1935년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사회보장법’이 만들어졌으나 실업보험이나 공적연금 등에 국한되고 의료보험은 도입이 보류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미국도 그 이후 국민들에 대한 의료부문 정책의 보완책을 여러 차례 강구했으나 근본적인 국가의료보험체계는 도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사회보장 또는 사회보험제도의 도입은 이런 선진국들과는 비교대상이 될 수가 없다.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어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고는 하지만 1963년만 해도 국민소득이 100달러 안팎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미국 원조를 받아 배고픔을 달래던 시기였으니 사회보험이라는 복지제도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가난한 나라였기에 오히려 사회보장제도의 도입이 절실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함께 나눠쓰자고 해도 나눌 돈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나눠 주려해도 나눠줄 국가재정 자체가 텅텅 비어 있었으니 어찌할 방법이 없다. 

 

그나마 사회보장제도에 눈을 돌린 것은 5.16군사정변 이후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 국가적 큰  변환점을 맞아 사회복지제도는 신설되고 발전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정권교체기에 특히 그러했고, 지금은 대통령선거, 총선, 지자체 선거 등 국민들의 선택을 받으려는 정당들의 공약(公約)에서 그 발전의 빌미가 주어지고 있다. 

 

해방 후 자유당시절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정신없다가 4.19혁명으로 내각책임제인 민주당 내각이 들어서면서 사회복지제도에 대한 각종 제도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다. 역시 정권이 바뀐 탓에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방편은 복지제도 확충이 특효약임은 세계 선진국들의 역사가 증명해 왔다. 민주당 정부의 의욕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채 1년을 못 넘기는 과도 정부에 그쳐, 이를 실천하는 데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군사정부 역시 선진역사의 예외일 수는 없다. 쿠데타를 일으킨 만큼 국민들의 환심을 사는 정책 천명이  무엇보다 절실했고, 그 수단의 하나로 사회복지제도의 확충을 내세웠던 것이다. 사실 군사정부가 사회복지제도의 확충을 단시간 내에 천명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과도내각이라 불리는 민주당 정부에서 이미 제도 검토를 잘 해놓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경제개발5개년계획’도 군사정변을 일으킨 다음해(1962년)부터 시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미 과도내각인 민주당정부에서 이미 입안해 놓은 초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의료보험법’, 5.16직후 군사정부시절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입법

 

 게다가 박정희를 의장으로 하는 군사정부의 최고 정책결정기관이었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강력한 추진력을 갖고 내각을 지휘하면서 많은 사회보장법안들을 양산해 냈다. 사회보장의 기본법이라 할 수 있는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고,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의료보험법 역시 민정이양을 앞둔 1963년 12월16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마지막 날에 다른 법안들과 함께 무더기 처리됐다. 이것이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의 첫 출발이다.

 

 물론 당시의 의료보험은 강제보험이 아닌 임의보험방식이어서 사회보장제도로서 실질적인 혜택은 많지 않았고, 의료보험조합의 결성과 운영실적도 성과를 내기는 힘든 것이었다. 사실 국사정부시절 원래 정부(내각)가 내놓은 안은 지금과 같은 강제보험으로 ‘종업원 500인 이상 대기업’부터 적용하는 것이었지만 최고회의 심의 과정에서 임의보험으로 변질됐던 것이다. 당시 내각 의료보험제도를 변질시킨 국가재건 최고회의 논의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헌법에 위배 된다”는 논리가 강해 강제보험 적용이 무산됐다. 지금 생각하면 군사정부와는 어울리지 않고 어딘지 어색해 보이는 논리적 귀결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어찌됐든 우리의 의료보험제도는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의 국민건강보험제도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의료보험법이 ‘고고(呱呱)의 성(聲)’을 울리고 탄생된 것이다.(계속)

 

 국민건강보험 진화일지(進化日誌) <1>

 

1959.10. 1  보건사회부 의정국, ‘건강보험제도 도입을 위한 연구회(목요회) 결성

1962. 3.30 사회보장심의위원회(사보심) 설치

      * 4개반(종합반,노동반,의료보험반,공적부조반)으로 구성

1963.11. 5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제정

      (1999년 이후 ‘사회보장기본법’으로 대체)

1963.12.16. 의료보험법 제정, 공포

      *국가재건최고회의 심의 의결

      *4개 피용자조합,8개자영자조합에서 임의보험제도 운영 시작

1965~1975 임의의료보험조합 인가  

1776.12.22. 의료보험법 2차 개정

            * 전국민을 대상으로 강제적용과 임의적용을 병행하되 강제적용 범위를 일정규모 이상의 사업장부터 단계적으로 확대

          * 공무원, 군인 및 사립학교연금법 대상자와 ‘생활보호법’ 적용자 제외

    * 피보험자는 제1종 피보험자(근로자 및 사용자)와 제2종 피보험자 (일반주민 및 제1종 이외의 자)로 구분

 

<ifsPOST>

 

 

 

 

 

6
  • 기사입력 2020년06월07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6월07일 17시36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