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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8 : 꺼져가는 등불, 모용덕의 남연(南燕) <G>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4월24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14일 13시0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40) 부견의 환관 광조의 등용(AD387)

 

전진의 부견에게는 광조라는 충직한 내시가 있었다. 모용수와 부견은 장안에 같이 있을 때 자주 손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부견에게 광조가 이렇게 물었다.

 

“ 폐하께서는 아직도 모용수를 많이 의심하시는지요?

  그는 아무래도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견은 그 말을 모용수에게 알려줬다. 광조라는 사람조차도 모용수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다는 호의로 모용수에게 전한 것이다. 한참 뒤 모용수가 독립하고 업을 포위하며 공격할 때 광조는 빠져나와 동진으로 갔고 광조는 동진 조정에서 하북지방 태수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하북지방이 모용수의 영토로 들어오게 되자 광조 또한 모용수에게 사로잡혔다. 모용수는 부견의 은혜가 생각나 눈물을 흘리며 광조 등을 용서해 주었다.

 

“ 그대들을 모두 용서한다. 

  전진왕(부견)이 나를 깊이 대해줬고

  나 또한 그를 마음깊이 섬겼으나

  두 공(부비와 부휘)가 질투하고 시기하여 내가 뛰쳐나온 것이다.

  전진왕을 생각할 때마다 한 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모용수는 슬픔에 빠진 광조에게 금과 비단으로 후하게 선물을 내렸으나 광조는 받지 않았다. 모용수가 이렇게 물었다.

 

“경은 아직 나를 의심하는가?”

 

광조가 대답했다.

 

“ 신은 오로지 주군에게 충실해야 함만을 알고 살아왔습니다.

  폐하께서 지금까지도 부견황제를 마음속에 품고 계신 줄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신은 어찌 감히 죽음에서 도망칠 수가 있겠습니까.“ 

 

모용수가 이렇게 말했다.

 

“ 이것이야말로 경의 충성이요 진실로 내가 요구하는 것이다.

  앞서 의심하느냐고 물은 것은 농담이었다.“

 

모용수는 광조를 더욱 두터이 여겨 중상시라는 자리에 앉혔다. 

 

(41) 모용수가 청주, 연주, 서주를 장악하다.(AD387)

 

제섭이라는 사람이 8천여 무리를 이끌고 신책(하북성 청하부근)이라는 곳을 장악하고서는 후연에 투항하자 모용수는 그를 위군태수(하북성 임장현)로 임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제섭이 장원이라는 사람과 연합하여 후연에 등을 돌리고 배반했다. 장원은 1만여 군사를 이끌고 축아(산동성 우성현)에 주둔하면서 변방 이민족의 하나인 정령족 우두머리 적요를 불러서 서로 연대를 꾀했다. 고양왕 모용륭이 주군 모용수에게 말했다.

 

 “ 신책이라는 곳은 매우 험하여 갑자기 뽑아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오랫동안 포위한다면

   장원이 유랑민들을 규합하고

   적요 또한 정령무리들을 부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걱정거리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 장원 무리를 공략해야 합니다.

   저들은 먼 길을 걸어왔고 또한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어서 

   우리가 먼저 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지 않고 덤벼 들것입니다.  

   일단 장원무리들만 격파하면 

   제섭 일당들은 싸움거리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모용수는 모용륭의 전략을 전폭으로 지지하고 수용했다. 2월 모용덕, 모용소, 장숭에게 2만 기병을 주어 모용륭과 함께 장원을 치게 했다. 장원군대는 모용덕의 대 부대가 이동중 잠시 쉬고 있는 틈을 타서 습격해 들어왔는데 모용덕의군대가 놀라서 급히 퇴각했지만 모용륭은 이미 그것을 예견하고 있었으므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장원이 아들 장귀를 보냈지만 모용륭의 부장 왕말이 장귀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 

 

모용륭의 부대가 장원의 습격을 훌륭히 방어하는 동안 피했던 모용덕의 대군이 다시 합류했다. 모용덕은 잠시 공격을 늦추자고 제안했지만 모용륭은 거부했다.

 

 “ 기대하지 못할 때에 습격을 하고도 장원이 이기지 못한 이유는 

   급박한 상황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각오가 투철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들은 매우 낙심하고 있을 것입니다.

   싸우자는 사람과 우리의 병력이 너무 강하므로 

   피하자는 생각들로 복잡할 것입니다.         

   이 때를 놓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조카지만 지략이 뛰어난 것에 놀란 모용덕이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오직 경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할 뿐입니다.”

 

모용륭의 부대는 적 7천8백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장원은 도망가서 숨었다. 후연의 군사가 역성(산동성 제남)을 공략하자 주변의 모든 성이 투항하고 사람들이 복속해 들어왔다. 이로써 후연은 청주는 물론 서주, 연주지역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모용수는 모용소를 역성에 주둔하게 하고 군대를 돌려 신책의 제섭에게로 향했다. 장원을 제압한 후연의 대군이 신책으로 몰려들자 신책에 있던 동란이라는 사람이 제섭을 잡아 모용수에게 보내왔다. 모용수는 제섭 부자의 목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AD387년 2월) 

     

(42) 후연의 인사와 용성지역 안정화(AD389)

 

장신과 왕조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모용수는 이 지역의 총괄을 위해 모용유를 양국(하북성 형태시)에 부임시켰다.(AD389년 1월) 요서왕 모용농이 이 때 조정에 편지를 올렸다.

 

 “ 신이 고구려 군을 쳐내고(AD385) 

   이곳을 진수한 지 벌써 오년이나 되었습니다.

   장수들은 편안하고 백성들은 한가롭게 지낸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청주(산동성), 서주(강소성 북부), 형주(하남성 남부),

   형주(하남성 남부) 및 옹주(섬서성 중서부)지역에 남은 도적들이 많다고 하니

   적절한 시기에 교대하고 그곳으로 가서

   죽을힘으로 도적들을 몰아내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살아남아도 남은 힘을 조정을 위해 다 쏟아 부을 것이니

   죽는다하더라도 조그마한 여한이 없겠습니다.“    

 

모용농은 태자 모용보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모용수는 모용농의 충심을 알고 바로 소환하여 시중 및 사예교위로 임명하고 고양왕 모용륭을 도독유평지주제군사 및 유주목으로 삼아 용성에 유대를 건설하고 모용륭이 유부와 평주(요녕성 일대)의 모든 정치군사업무를 도맡게 하였다. 모용륭은 형님 모용농이 만든 법규와 질서를 계승하여 이를 넓히고 닦으니 요와 갈(하북성 동북부 지역) 지역이 매우 안정되었다.

 

(43) 모용덕과 모용린이 하눌 공격(AD389-AD391)

 

범양왕 모용덕과 조왕 모용린이 하눌을 공격했다. 하눌이 달아나자 좇아가서 물근산(내몽골) 부근에서 하눌의 항복을 받았다. 모용덕은 하눌을 상곡(하북성 회래)으로 잡아오고 그의 동생 하염간은 수도 중산으로 압송했다. AD390년 4월 탁발규가 후연 조왕 모용린과 내몽고에서 전투를 벌였다. 모용린의 치하에 있던 하눌, 흘돌린 및 흘해의 세 부락이 모두 탁발규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이들은 후연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후연의 모용수가 중산(하북성 정주)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는 AD390년 경 후연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위 탁발규나 그 너머 후진 요장은 후연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AD394년 멸망하기 직전인 전진의 부등 또한 감히 후연에게 대적할 세력은 되지 못했다. 그러니 내몽고 오르도스 이금곽락기에 웅거하던 유위진에게 북위나 후진이나 전진은 후연의 예봉을 막아주는 방패와 같은 역할을 했던 셈이다. 교활한 유위진은 그 틈을 타고 아들 유직력제를 보내 내몽고 너머 북쪽에 자리 잡은 동쪽 하란부 하눌을 공격했다. 다급해진 하눌은 조카 탁발규의 북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탁발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하눌 지원에 나섰다. 그리고 하눌의 요청에 따라 하란 부족을 모두 흡수하여 북위의 근거지인 지금의 산서성 대동지역으로 이주시켰다.(AD390) 

 

하눌의 동생 하염간은 형이 나라를 통째로 탁발규에게 넘겨준 것이 못 마땅했다. 과거에도 여러 번 탁발규를 시해하려다가 실패한 것도 형님 하눌의 방해 때문이지만 나라를 그런 조카에게 그냥 넘겨주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염간은 형 하눌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AD391) 그러나 평소 신망이 두터운 하눌이었으므로 하염간의 밀모를 전해준 사람이 있었다. 하염간과 하눌 사이에 무력다툼이 일어났다. 북위 탁발규는 종주국 후연에게 하염간 토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모용수의 넷째 아들이자 영리한 모용린은 탁발규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기회에 탁발규마저 잡아들여 후환을 끊어버리자고 아버지 모용수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모용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특한 탁발규 또한 후연 조정 내부에서의 자신을 해하려는 움직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마침 사신으로 보낸 탁발규 동생 탁발고를 후연이 인질로 잡고 더 많은 조공을 무리하게 요구하자 후연과의 우호관계를 끊고 서연 모용영과 선린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후연의 북쪽 국경은 대와 머리를 맞대며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44) 모용수의 인사

 

AD393년 정월 모용수는 대대적인 이사를 단행했다. 태자 모용보를 대선우로 책봉하고 동생 범양왕 모용덕을 사도로 삼았다. 조카 태원왕 모용해(모용각의 아들)는 사공, 진류왕 모용소(모용각의 아들)는 좌복야, 그리고 어린 아들 모용회는 하간왕, 모용랑은 발해왕, 모용감은 박릉왕으로 책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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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인사를 마친 모용수는 곧바로 서연을 공략할 방법에 대해 의논했다. 제장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 모용영은 틈이 없고

   우리가 해마다 출정하는 바람에 군사들이 모두 지치고 흐트러져 있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범양왕 모용덕은 생각이 달랐다.

 

 “ 모용영은 국가의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참람하게 국호와 지위를 들먹이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겠습니까.

   백성들의 혼란이 없도록 마음을 통일하려면 서둘러 제거해야 합니다.

   어찌 사졸들의 피곤을 핑계로 국가대사를 미루시렵니까?“

 

모용수가 대답했다.

 

 “ 사도의 마음이 나와 꼭 같소.

   내가 비록 늙기는 했지만 주머니 밑바닥의 지혜만 짜내도

   충분히 그들을 빼앗을 수 있소.

   어떻게 도적을 자손들에게 남겨두겠소.“

 

11월 모용수가 보,기병 7만을 이끌고 출정에 나섰다. 모용찬과 장숭은 서쪽 정형(하북성 정형)으로 보내 태원에 있는 서연의 모용우(모용영의 동생)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평규를 보내 남쪽의 사정(하북성 무안)에서 서연의 단평을 공격하게 했다. 모용영은 조운과 모용종에게 5만 군사를 주어 노천(산서성 여성현)을 방어하도록 시켰다.(AD393년 12월)     

해가 바뀌어 AD394년 2월 대군을 모아서 업에 있던 모용수는 청하왕 모용회에게 업을 수비하도록 맡기고 사주(하북성 업 부근), 연주(산동성 견성지역), 청주(산동성 제남부근) 및 기주(하북성 시현 지역)의 군사를 몰아 서연의 수도 장자를 향해 서남진했다. 모용해는 무구(하북성 무안)으로 가게하고 모용농은 호관으로, 자신은 장자를 향해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 소식을 들은 서연 주군 모용영은 군사규율을 엄하게 다루면서 급하게 식량과 인력을 대벽(하남성 여성)으로 모으고 1만여 병사와 함께 모용소일두귀와 왕차다와 늑마구 등을 보내 여성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모용수가 한 달 이상이나 출병을 머뭇거리자 모용영은 이상하게 여겼다. 모용수가 남진하지 곧바로 않고 대신 태행(하남성 심양, 낙양 북쪽)을 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군대를 모아 지관(하남성 제원시 부근)을 막았다. 그러나 모용수는 제원방면이 아니라 곧바로 서연 수도 장자의 북쪽 여성과 중간 지점인 노성으로 치고 들어왔다. 

 

5월 후연의 군사가 대벽에 도달하고 서연 장군 모용대일두귀가 나가서 싸웠으나 후연의평규에게 대파당하였다. 서연의 장수 모용소일두귀가 또 나섰지만 모용농에게 패하였고 늑마구는 목이 잘리고 앙차다는 포로로 잡혔으며 대벽은 포위당했다. 모용영은 있는 군사를 다 모아서 방어에 나섰지만 부하 조운과 모용종이 후연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모용수는 대벽성의 남쪽 성벽에 포진하고 있었다. 모용수 부장 모용국을 매복시켜 놓고는 모용수가 패전하여 물러나는 척하자 모용영이 곧바로 군사를 몰고 뒤쫓아오다가 모용국의 매복에 걸려 모용영이 대패하였다. 목이 잘린 모용영 군사만 8천여 급이라 했다. 모용영은 장자로 도망갔다.

   

모용수는 장자를 포위했다. 모용영은 후진 요장에게로 도망가려 했으나 시중 난영이 버티고 지키는 것이 현명하다고 깨우치자 생각을 바꾸어 수비하기로 했다. 모용영은 곤궁하고 급하게 되자 아들 모용홍을 보내 옥새 하나를 넘겨주면서 동진 옹주자사 치회에게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치회는 곧바로 조정에 서한을 보내 이렇게 말했다.

 

 “ 모용수가 모용영 마저 아우른다면

   동진조정으로써는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양쪽이 다 남아있도록 하다가 적절한 시기에 

   다 쓰러뜨리는 것이 좋은 계책일 것입니다.“

     

동진황제 효무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청연이주자사 왕공과 예주자사 유해를 보내 모용영을 구원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모용영은 동진의 구원군사가 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아들 모용량마저 인질로 보내려했는데 평규가 쫓아와서 모용량을 고도(산서성 진성 부근)에서 나포해 붙잡았다. 모용영은 다급한 나머지 북위 탁발규에게도 구원을 요청했는데 탁발규 또한 진류공 탁발건과 장군 유악을 보내 서연을 지원하도록 했다. 북위 지원군은 수용(산서성 삭주 수용천)까지 내려왔다. 이렇게 되면 서연의 방어근거지 여성을 중심으로 서연은 북위와 동진의 연합하여 후연과 전쟁을 하게 되는 셈이고 전세는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이때 여성을 지키고 있던 모용대일두귀의 부장 벌근이라는 사람이 후연의 군사가 들어오도록 성문을 몰래 열어주었다. 후연의 군사가 들어가 모용영을 붙잡아 죽였고 조운, 모용대일두귀 등 30여 명의 서연 공경들이 죽음을 당했다. 이로써 AD384년 전연 모용준의 아들 모용홍에 의해 세워진 서연은 10년 만에 멸망했다. 모용수는 단양왕 모용찬에게 병주자사로 진양(태원)에 주둔하게 하고 의도왕 모용봉은 옹주자사로 장자에 주둔하게 하였다. 서연의 신하들 중에 상서복야 굴준, 상서 왕덕, 비서감 이선, 태자첨사 봉칙, 호모량, 장등 등과 같이 재능있는 사람들을 모두 재등용했다. 그 해 9월이 되어 모용수는 업을 돌아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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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4월24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14일 13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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